세상 속의 순결한 그리스도인 구약의 제사장들은 성막에서 봉사할 때 신발을 신지 않았다. 발은 땅을 밟고 몸은 여호와를 섬겼다. 맨발의 제사장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구성하는 땅과 하늘,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고 있다. ‘ 순결’은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이중적 삶에서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선택하는 ?거부와 선택?의 투명성을 뜻한다. 인간의 가치관과 삶의 목적성 그리고 말과 생각과 행위에서 세속적인 삶의 방식을 거부하고 거룩, 곧 하나님께 구별된 삶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순결과 세속화란 단어는 오늘도 서로를 적대감으로 마주보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서로 지배하려는 보이지 않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다. 나 사렛대학교 백위열 총장은 “…어느 독일 작가는 유대인 학살이 시작됐을 때 위대한 독일교회는 침묵을 지켰다고 저술했습니다. 곧 그 교회는 교회로서의 존립 가치와 합리성을 잃었으며 결국은 흉포한 히틀러 독재에 의해 통치되는 힘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세계의 교회는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를 드리거나 시간과 물질의 바탕이 없이 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걸까요? 교회가 진정으로 이 세상의 일부분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만 충실한 나머지 세상의 고통과 공포는 외면한 채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잊고 있는지 진실로 반성하지 않으면 세상과 타협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평화로운 내일을 위해 각 개인의 적합한 역할을 찾아서 반성하고 노력해야 할 때입니다.” 라고 크리스천 논단에서 교회의 세상에 대한 책임을 쓰고 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조롱받는 괴상한 단체가 되어버렸다. 순결은 거룩성이다 순 결은 세상에 대한 의도적인 고립이 아니며 술과 담배…등 원시적 도덕성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순결?은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1:14-16) 말씀하신 구원의 부르심을 자아 실현하는 삶으로 ?거룩의 실현?에 있다. 초 대교부였던 제롬은 “거짓된 거룩함은 두 배로 악한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리스도인은 이중적이다. 자아 속에도 이중세계를 갖고 있으며 (옛사람과 새사람, 육과 영..) 살아가야 할 삶의 세계도 이중적이다 (죄와 하나님, 세상과 하나님나라..).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삶의 일반적인 방식이다. 주님께서도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지적하셨다. 하나를 중요하게 여기고 하나를 경멸하는 것이 생존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거룩은 버리는 능력이다. 세상 속에서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죄와 세상과 세속적 사욕을 버릴 줄 아는 능력을 소유해야만 한다. ‘거룩’은 ‘하기오스’ 구별하다, 세속적이고 비 신앙적인 것으로부터 철저하게 구별되다 는 뜻이다. 구별은 버리는 능력이다. ”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탈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시24:3-6). ‘누구며..누군고..’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우리는 복음의 중심진리를 깨닫고 복음의 진리를 따라 ‘버리는 능력’을 찾아내야만 한다. 싱 가포르 리관유 전 총리는 “중국을 막기는 이제 어렵다”고 말했다. 싱가포르에 와서 장학금 받으며 공부하는 중국 유학생들이 각 학교에서 수석과 상위권을 차지하는 것을 지적하면서, 중국의 잠재력과 고도성장과 국세확장이 더 거세질 것으로 전망했다. 중국의 미국시장 점유율은 이미 11%.. 한국의 4배에 달한다. 2002년 자동차 생산은 한국을 추월하여 세계5위 자리를 빼앗았으며, 철강과 조선 업도 위협하고 있다. 한국 경제는 지난 4년 반 동안 계속 낮은 수치의 성장을 계속하면서 뒷걸음질치고, 청장년들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방황하고 있다. 정부는 경제재건을 위해 진실하게 고민하고 바른 정책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로마서 강해 2003 년 미국 코스타 오전 성경강해 시간에 로마서를 강해한 목적이 여기에 있었다. 로마서는 복음의 교과서였다. 로마서엔 거룩에 이르는 복음의 바른 정책에 대해 논리적인 교리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로마서를 알지 못하고 세상 속의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죄와 하나님의 이중 세계 속에서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 대해 산 자”(롬6:10-11)를 만드시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며 구원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SEX. 첫째 시간의 주제는 도덕적인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었다. 성적문제는 도덕성의 문제 이전에 하나님을 버린 인간을 심판하시는 죄의 유배지가 ‘성적욕구와 열등감’이었기에 우리는 먼저 죄의 본질적 속성부터 이해 할 필요성이 있었다. 구원과 순결을 말하면서 먼저 성적욕구에 의해 형성되는 인간의 가치관과 삶의 정체성, 문화의 형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순결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세상에 보여줄 수 없을 것이다. 오 전 성경강해는 행위 적이고 도덕적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었다.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복음의 능력. 복음의 근본 원리를 함께 나누는 시간이었다. 독일의 변증 철학자 헤겔은 삶의 인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아는 만큼 볼 수 있다. 끊임없이 교양을 채우고, 깊은 사색을 반복하면, 인식의 진보는 마지막 종착점으로 절대정신에 이르게 된다. 인식의 크기를 키우는 것이 자기 계발이다.“ 로마서를 개인적으로 공부하며 복음의 절대정신에 이를 때까지 반복해서 학습과 깊은 사색을 반복할 필요성이 있다. 빌립보서는… 제1장. 중심주제: 복음 우 리는 복음의 능력으로 구원받았으며(롬1:16), 세상 한 가운데서 복음의 진리를 따라 거룩한 삶을 연출하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도록 ‘복음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이며 완성인 복음에 대해 새로운 삶을 연출하는 자세가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시작이다. 빌립보서 1장에 ?복음?에 대한 세 가지 생활방식을 가르치고 있다. 1: 5.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1. 복음의 교제(1:3-11) 그리스도의 심장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 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1:3-5). 빌 립보 교회는 바울에게 기쁨과 즐거운 추억을 남긴 교회였다. 바울은 10여 년 전을 되돌아보며 미소짓고 있다.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감사하고 기뻐했다. ‘생각’ ‘므네이아’ 즐거운 회상을 뜻한다. 바울에게 빌립보 교회는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빌립보 교회와 바울은 ‘첫날부터 이제까지’(5절) 복음 안에서 지속적인 교제를 나눴다. “너 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1:6-8). 그 들의 교제는 “바울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7절)에 서로의 사역과 고통과 어려움을 함께 동참하는 교제였다. 바울과 빌립보 교회는 ?동정- 동역?의 협력의 교제를 가졌다.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동정하고, 소망을 주고, 복음을 위해 함께 고난을 받았다.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도 빌립보 교회와의 지속적인 교제 때문이었다. 바울과 빌립보 교회는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서로를 섬겼다. 헨 리 나우엔은 “거의 모든 인간관계가 일정한 가치에 따라 판단된다. 고용자는 피고용자를 지식과 기술과 능력으로 판단한다. 은행과 상점은 신용에 따라 사람을 대우한다. 친구는 공통된 관심사를 기초로 한다.”고 지적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교제는 조건 없는 사랑이어야 한다. 부모가 자기 자식의 지능지수가 40이라고 해서 다른 자식과 맞바꾸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조건 없는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주님은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사회가 버린 사람들 곧 가난한 자들과 죄인들, 창녀들의 친구이셨다. 사랑과 순결의 방정식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위해 “사랑이 계속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라고 자신이 하고 있는 기도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내 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9-11). 바울은 세 가지를 위해 기도했다. 2. 복음의 진보(1:12-26). 그리스도의 이름 바 울은 14년 동안 3차례 전도여행을 다녔으며, 7년 간 감옥생활을 했다. 바울은 전도자로 로마에 가기를 원했으나 죄수의 몸으로 끌려가야 했다. 예루살렘에서의 불법적인 체로, 로마의 반역자로 지중해를 가로지르는 항해, 로마의 투옥..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감옥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진보’ ‘프로코페’ 앞서가며 길을 만들다, 뒤에 따라오는 군대를 위해 길잡이 표적을 세워 놓는 것을 뜻한다. 미 션 인디아 존 데브라스 회장은 인도 땅에서 자행되는 기독교인에 대한 핍박으로 오히려 수천의 인도인들이 하루 3천 여 명씩 주님께로 돌아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핍박이 없었다면 그렇게 많은 중생과 헌신의 부흥이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흥분했다. 바 울이 로마 감옥에 갇힘으로 감옥에 있었던 로마 시위대 안에서와(13절), 시위대 밖에서 복음의 진보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바울을 보초 섰던 시위대 군인들에게 복음이 증거 되었을 뿐 아니라 시위대 밖에서는 두 부류의 반응이 더욱 강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① ‘투기와 분쟁,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외모로’ 복음을 전하는 파벌의 전도자들이 있었다(15,17절). 교회의 유익과 그리스도의 영광보다는 자신들의 명성과 영향력을 추구하는 자들이었다. 세계선교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모든 종족마다 자기 언어로 된 성경이 번역되어야 한다. 전 세계 7천여 다양한 언어 가운데 아직 3천여 종족은 성경을 갖고 있지 못하다. 선교사가 없어도 자국어 성경만 있으면 토착교회설립이 가능하고 건강하게 부흥할 수 있어서 성경번역은 매우 중요한 선교사역이다. 선교사 파송과 함께 성경번역을 위해서도 중보기도와 필요한 은사와 자질을 갖춘 사람들의 헌신이 요구된다. 전도의 순결성 바 울은 무엇이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그는 경쟁심이나 하찮은 시기심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열등감과 시기심은 영적인 능력을 파괴한다.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전부를 드렸다. 그리스도께 바쳐진 삶이 순결하다. 세상을 향해 복음전도의 사명을 다하는 사람들이 순결하다. 전도는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생명의 사역이다. 세상에 복음을 증거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역은 없다.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그리스도의 목표를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날마다 전진해야 한다. 복음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전진해야 한다. 캐 나다의 약사 엔드류 스타렛은 복음을 전하지 않는 무관심의 죄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예수께서 재림하셨을 때 약 팔고있을 자신의 모습 생각하니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사업과 집을 정리하고 수단내륙선교회에 기증하고, 아프리카로 떠났다. 친척들에게 인사할 겨를도 없다는 짤막한 쪽지를 남기고 떠났다. 결혼과 안식년도 포기하고 41년 간 아프리카에서 복음을 전하며 살았다. 전도의 열정이 그의 삶의 유일한 기쁨이었다. “모든 부족에게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는 일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18). 그리스도 중심의 인생관 “내게 있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 일할 기회가 된다면 죽는 것은 더 나은 기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의 중간지대에서 바울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그의 순결의 영성을 우리에게 자세하게 고백하고 있다. “나 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1:20-24). 죽 음은 위대한 모험 “기독교 신앙에서 그리스도를 제외하면 우리는 핵심을 잃게되며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며 그 밖의 모든 것은 주변의 것에 불과하다” 존 스토트의 말이다. 바울은 오직 한 가지 목적에 고정된 삶을 살았다. “살든지 죽든지..” 삶과 죽음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계셨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 외에 어떤 삶의 계획도 없다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바울의 삶 전체를 점령하셨다. 최상의 순결과 능력의 삶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바울의 모든 것이 되셨고 모든 것을 지배하고 계셨다. “죽 는 것도 유익함이라” ‘유익’ ‘이익, 소득’ 죽음은 완벽한 이익이었다. 그리스도와의 영광스럽고 완전한 연합으로 가는 기회의 문으로 여겼다. ① “살든지” 감옥에서 석방된다면 주님과 세상을 위해 열매맺는 삶을 살 것이다. ② “죽든지” 죽음은 위대한 모험이며 여행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거할 소망 때문이었다. 바울은 ‘죽음이 훨씬 좋다’고 주저 없이 말한다. 벵겔도 고백했다. “나는 무엇을 살든지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 제18 회 도쿄올림픽 마라톤에서 2연승을 했던 에티오피아 아베베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무명의 선수였다. 마라톤 경기 한 달 전 급성맹장염 수술을 하고도 그는 초인의 힘으로 우승을 이뤄냈다. 아베베의 연습장소는 산과 들이었으며, 운동화도 없는 맨발로 연습을 했었다. 도쿄올림픽 후 그는 11회나 우승을 했으나 자동차 사고로 하반신 불구가 되었다. 그러나 희망과 웃음을 잃지 않았다. “두 다리는 잃었지만 나는 아직 건강한 두 팔이 있습니다” 그는 노르웨이에서 열린 장애인 올림픽 썰매경주부분에서 또 다시 우승을 이뤄냈다. 오늘 우리도 세상 속에서 순결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실천할 수 있는 강한 복음의 인생관을 가져야 한다. 3. 복음의 신앙(1:27-30) ‘오 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행하라’ Manner of Life. 생활방식을 가져라. 너희의 말과 행동을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서약한 사람답게 행동하라는 뜻이다. ‘폴리테스’ 하나님 나라 시민답게 행동해야 한다.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였다. 그들은 로마시민처럼 라틴어로 말하고, 라틴 풍의 옷을 입고, 로마인 신분에 집착했다. 로마시민이 되는 것이 그들의 삶의 목표였다. 로마시민으로서 완전한 충성을 바치는 것이 그들의 삶의 전부였다. “오 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1:27-28). 주님을 섬기는 가운데 고난은 피할 수 없는 삶이다. 바울은 일치와 협력을 열망하며 복음의 신앙을 위해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다. “우리에게 싸움과 고난은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함께 그리스도를 위해 참된 일을 계속해야 하지 않겠는가?”
SIN. 로마서의 중심주제인 죽음과 부활의 교리는 죄와 하나님의 이중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처리를 우리에게 설명한다. 죽음과 부활, 죄와 하나님. 4개의 단어의 관계와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하고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을 소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죄에 대한 죽음과 하나님께 대한 부활 신앙이 인격화된 그리스도의 제자들만이 세상 속에서 세속에 빠지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SUCCESS. 세상은 성공주의에 지배되고 있다. 세상 속에서의 진정한 성공에 대한 가치관 회복과 성공을 이루어 가는 제자의 자아상을 원리적으로 제시했다. 죽음과 부활, 나와 그리스도 그리고 육과 영의 복음의 전개를 이해해야만 한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에서 바울에게 첫 사역의 기회를 제공한 도시였다. ‘마게도냐인의 환상’(행16:8-10)에서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시작된 첫 번째 교회였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세 번 방문했다. 신학자 사우는 “이 서신은 바울 사도 자신의 가슴에 달린 창문과도 같다”고 설명한다. 바울은 자신 속에 계시된 그리스도를 그의 창문을 통해 자신의 가슴을 열어 보이고 있다. 신학자 본 소든은 “우리는 이 서신을 읽으면서 매우 거룩한 땅을 밟게 된다. 빌립보서는 의심할 여지없이 바울의 마지막 친서이다”라고 빌립보서의 귀중함을 강조했다. 빌립보서를 통해 우리는 ?세상 속에서 순결한 그리스도인?만이 가능한 적극적인 생활과 인격을 배울 수 있다.
1:12.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① 사랑이 모든 지식과 총명으로 풍성해지도록 기도했다.
② 사랑으로 위선된 삶에서 해방되기를 기도했다.
③ 사랑으로 의의 열매가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했다. ‘진실하여’ ‘밀칠 하지 않은’ 고대사회는 도자기 산업이 성행했다. 가장 좋은 제품은 두께가 얇은 도자기였으나 굽는 동안 가는 금이 생기곤 했다. 가는 금이 간 도자기를 밀초로 몰래 칠해놓고 도자기를 파는 상점들이 많았다. 햇빛에 비춰보아야 장사꾼이 밀초로 틈을 메웠는지 여부를 알 수 있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심장만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능력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열매를 맺을 수 있다.
② ‘착한 뜻..참됨과 사랑..’ 바울에 대한 동정심과 복음전파의 동역자 정신으로 바울의 빈자리를 채워준 전도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