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진] 성공한 소수 (小數)

유학생의 삶


성공한 소수 (小數)



예 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여 가니라. (막 10:17-22)


마 가는 자신이 적은 복음서 10장에 한 사람과 예수님의 만남에 관하여 적고 있다. 예수님께 찿아온 이 사람을 다른 복음서에는 부자 청년 관원이라고 했다. 그는 젊고, 관원이고, 부자이며, 종교적으로 열심이었으며, 또한 예수님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찾아왔다. 그 당시의 기준으로 그는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으로 생각이 되어진다. 그러나, 그의 배경을 조금 생각해 보면, 그는 모순 투성이의 인간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젊어서 부자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관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관원은 많은 돈을 벌기가 힘들다. 그러나 그는 젊어서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는 모든 율법을 지켰다고 한다. 당시의 율법을 지키던 많은 사람들은 로마에 대하여 저항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관원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예수님께 찾아와서 영생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그당시, 율법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별로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 달려와서 자신의 질문을 던지는데 주저하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부자관원의 삶의 모습을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의 삶속의 모순은 바로 성공을 지향하는 그의 삶의 결과임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성공”을 목표로 살았던 사람이다. 세상 속에서는 로마의 관원으로, 그 동네에서는 부자청년으로, 회당에서는 율법을 잘 지키는 청년으로 살았다. 그러한 그에게 예수님은 또 다른 하나의 “성공”의 대상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예수님께도 인정을 받기를 원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물어본 영생에 관한 질문은 그가 진정으로 영생에 대하여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기 보다는 어쩌면 예수님께 칭찬을 받기위한 잘 준비된 질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청년의 모습 속에서 나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많은 크리스찬 유학생들의 모습을 또한 본다. 지극히 성공지향적이다. 어느 곳에서나 인정받기를 원하고 성공하기를 원하는 모습이다. 그곳이 학교이든 교회이든, 그곳에서 두각을 나타내서 인정받기를 원하는 그런 모습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나의 주변에 힘있는 자를 위해서 살았다. 세상적인 성공의 기준은 바로 나보다 힘있는 자들에게 인정받는 것이다. 내 주변에 있는 로마정부, 율법주의자, 사업가, 그리고 심지어 예수님까지, 그들은 나에게 있어서 단지 내가 “인정받아야할 대상”이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과 교수님께 인정받아야 하고, 직장에서는 상사에게 인정받아야 하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가장 인기있는 친구의 가장 친한 둘도 없는 단짝이 되어야 하고, 집에서는 부모님들께 가장 훌륭한 아들이 되어야 하고, 교회에서는 목사님 앞에 가장 모범적인 신앙인이 되어야 하는 모습이다. 그러다 보니, 나의 삶은 나보다 힘이 센 사람들을 위한 삶이 되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 주변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한 삶이다. 나의 삶의 내면은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 마치 부자청년에게 로마정부와 율법주의자와 예수님이 각각 상충된 삶의 모습을 요구했었던 것 처럼, 나의 삶속에서 모순된 삶의 모습을 본다. 그러나 성공에 대한 욕망이 그와 같은 모순을 덮어놓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그 렇게 성공한 젊은 청년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네게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성공을 추구하고, 강한 자들을 만족시키기만을 위하여 살아온 부자 청년 관원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은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는 것이다.


성 공한 자들의 주변에는 반드시 실패한 자들이 있기에 마련이다. 이세상의 법은 한사람의 최후 승리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패배자가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세상의 법은 그와 같은 생존경쟁을 통한 약육강식의 법칙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강한자는 약한자 위에 군림하고, 그들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부자 청년에게 혁명적인 권유를 하신다. 예수님은 그에게 자신의 성공을 가지고 그의 성공을 위해서 희생한 이웃을 섬기라는 것이다. 그때 그의 성공은 아름다운 성공의 모습을 가지게 된다.


유 학생들은 성공하려고 온 자들이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 이미 성공을 체험한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학의 소원은 품으나, 어떤 이유에서든, 유학을 오지 못하고 그 꿈을 접는 사람들이 많다. 일단 유학에 성공하면, 그 유학에서 살아남는 것 자체가 성공이다. 우리과에서는 박사과정 신입생들을 매년 50%이상 걸러내곤 한다. 2년차로 진급하는 것이 성공이다. 그러나 그 성공의 뒤에는 실패한 자들의 아픔이 깔려있기에 마련이다. 학위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면 직장을 구해야 한다. 우리분야에서 교수 한명을 뽑는데 150명 정도의 지원자가 들어오는 것은 일반적인 예이다. 한 사람이 교수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149명의 실패자가 생겨야 한다. 학회지에 논문을 보내면 평균 선택율이 5%를 못미친다. 5편의 성공한 논문을 위해서 95편의 논문이 rejection의 통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치열한 경쟁의 환경속에서 살다보면,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 마치 나의 삶의 DNA 속에 박혀있는 것 같은 느끼게 된다.


그 런 나에게 주님이 주신 말씀이 바로, 내가 그 부자 관원이라는 것이다. 너의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네 주변에 너의 성공을 위해서 희생한 자들을 섬기라는 것이 주님의 음성이다. 참으로 힘든 적이 많다. 그러나 주님이 그 부자관원을 보실적에 마음속에 사랑이 가득하셨다는 말씀이 힘이 된다. 그 말씀에 의지하여 나의 눈을 내가 자연적으로 보지 않는 곳으로 돌리는 훈련을 한다.


교 수라고 하는 직업은 참으로 묘한 자리이다. 주변의 모든 사람, 비서, 학생, 심지어 가족들까지, 자신이 하는 연구와 강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자리이다. 주변의 사람들이 그러한 기대를 당연한 것으로 만들게 만든다. 내가 6년전 Case 대학에 가서, 처음으로 학회를 가려고 준비하는 때였다. 비행기표를 끊어야 하는데 비서가 물어본다. “Do you have any preference?” 그래서 아무자리나 괜챦다고 말했다. 그 비서가 웃으면서 하는말이, “Youngjin, you have a long way to go to become a faculty member. As a faculty member, you should say, ‘I will never fly unless I get seat number 4C on that flight.'” 물론 그때는 웃고 넘어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 마음속에 그와 같은 대접을 기대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교수들의 삶은 deadline으로 이루어져 있다. Deadline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교수들 같다. 그래서 연구제안서나 강의안 제출 마감일이 되면 학교가 마치 동물원 같다. 마감 시간 직전까지 자신의 제안서를 붙잡고 이렇게 저렇게 고치다가, 마감 직전에 비서나 학생들이 기타 다른 모든 필요한 자료를 완벽하게 준비해 놨다가, 제출시간에 맞추어서 제출하기를 원한다. 모든 주변의 사람들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삶, 그것이 교수들의 삶의 모습이다.


학 교에서 하는 일이 많아지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면 받을수록, 나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난다. 그럴수록 대접받기를 바라는 나의 욕망은 더욱 커져 간다. 그들이 나를 위해서 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착오가 생기면 짜증이나고 분노가 생긴다. 그들이 나의 일을 잘 도와줬을 때에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넘어가게 된다. 내가 늦어서 일이 지연되는 것은 아무 일없는 것처럼 지나가게 된다. 나의 주변의 사람들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도구이상의 그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그 때, 주님은 나에게 젊은 부자 관원을 기억나게 하신다. 너의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 섬기기 위해서 나를 그곳으로 보내셨음을 주님은 다시 한번 기억나게 하신다. 나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바로 내가 섬겨야 할 사람들임을 주님이 생각게 해 주신다. 그들은 더 이상 나를 위한 도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해야 할 나의 섬김의 대상임을 다시한번 기억케 해 주신다. 문득, 나의 비서의 책상에 붙어있는 그의 딸이 그린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한번도 보이지 않던 그림이 오늘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녀가 첫딸을 백혈병으로 잃은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다. 그 그림은 최근 자주 아픈 그의 둘째딸이 그린 토끼 가족 4마리의 그림이다. 그 그림을 이야기 하면서 그 딸의 건강을 물어보았다. 오랜만에 그녀와 이런 저런 말을 나누면서 웃어보았다.


학 교에서 있다가 저녁에 집에 도착하면 몹시 피곤하다. 저녁강의를 마치고 집에 간 날은 특히 더 피곤하다. 밤 늦도록 하루종일 아이들과 씨름하다가 저녁을 준비해놓고 졸린 눈으로 나를 기다리던 아내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한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얼른 허기를 채우고, TV를 켜고 CNN 뉴스를 보면서 강의하느라고 긴장해 있는 나의 태옆을 풀기를 원한다. 그때 주님이 다시 한번 나에게 부자 청년관원을 생각나게 하신다. 나는 나의 가족을 섬기기 위해서 이곳에 있음을 기억하게 하신다. 대부분의 유학생 배우자와 마찬가지로, 나의 아내는 나를 위해서 많은 것을 희생하였다. 너무나 많은 순간, 단순히 내가 남편이라는 이유하나로 나를 위한 아내의 희생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공부하는 남편 뒷바라지 해야지라고… 주님은 나에게 나의 아내는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상기시켜주신다. 오히려, 내가 아내를 섬기기 위해서 존재함을 생각하게 하신다.


우 리집에는 두아들이 있다. 아내가 학교에서 첼로 레슨을 하는 목요일과 토요일은 이 두아이들이 내차지이다. 목요일은 저녁 6시경에 학교에 가서 after school care에서 두녀석을 pick-up해서 집에 온다. 집에 오면, 나도 배가 고프고 그 녀석들도 배가 고프고, 모두다 cranky해져 있기에 마련이다. 집에 들어오면서부터 녀석들은 가방과 겉옷을 사방으로 집어 던지면서 저희 방으로 뛰어들어간다. 집에서 오후내 혼자있던 강아지 Freddie는 정신없이 날뛰면서 밖으로 자기를 데리고 나가서 오줌을 뉘여달라고 성화를 한다. 둘째놈은 배가 고파서 뛰어내려와 냉장고를 열고는 먹을 것을 찾는다. 학교에서 피곤한 미팅이라도 있던 날, 신경질부터 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문득 주님이 나는 그들을 섬기기 위해서 이곳에 있다는 것을 기억나게 해 주신다. 자녀들이 더 이상 집안에 TV 리모콘이 보이지 않을 때, 리모콘 대신 내가 원하는 채녈로 바꿔주는 “인간 리모콘”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나눠야 할 섬김의 대상임을 생각하게 된다. 물론 자연스럽게 오는 생각은 아니다. 내속의 싸움이 있다. “나도 피곤한데…” 밥먹으로 식탁에 앉은 두 녁석에게 “Tonight, I am your servant. What can I do for you?”라고 물었다. 생각없는 둘째 동현이는 “Water, please!”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러자 마음 좋은 큰아들 광현이가 “I will do it.”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항상 이렇게 섬기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나의 생각에 떠오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그날은 평안한 저녁이었다.


섬 기는 삶. 나누는 삶. 나에게는 참으로 힘든 짐이 된다. 나 때문에 희생하고 나를 돕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는 훈련, 이것이 나에게는 자연스럽게 오지를 않는다. 나는 평생 나의 주변의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살아왔고 그렇게 훈련받아왔다. 내가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오는 훈련을 하였다. 그런 나에게, 남을 돌아보는 마음은 자연스럽게 오는 마음이 아니다. 나는 그래서 자연스럽게 주변의 사람을 돕고 그들과 함께 아퍼하고, 그들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무척 부럽다. 그래서, 끊임없이 주님의 깨우치심이 필요하다. 성령님이 주시는 민감한 마음이 필요하다. 나의 성공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웃사람보다, 내가 맘대로 할 수 있는 그사람들을 먼저 바라보는 훈련이 나에게는 필요하다. 부자관원처럼, 근심하고 떠나가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능히 하실 수 있다는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위로가 된다.


주 변의 많은 유학생들에게서 나와 같은 모습들을 발견한다. 많은 부자관원들을 본다. 아니면 부자관원이 되기를 원하는 자들을 본다. 그들에게 질문해 보고 싶다. 왜 성공하려고 하는가? 성공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나, 그 성공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스스로를 부인하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는 훈련을 할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인간의 역사의 발전은 소수의 천재들의 탁월한 능력과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능으로 이루어지기 보다는, 그 소수의 리더들이 자신을 죽이는 헌신과 섬김으로 주변을 사람들을 보다 낳게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성경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소수의 희생적 리더들을 찾고 계시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그리고 수많은 사사와 선지자, 그리고 왕들의 순교적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사회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보이시고, 그 계획을 이루어나가셨음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이 이와 같은 소수의 헌신적 섬김으로 역사를 이끌어가는 모습을 잘보여주고 있다.


한 민족, 한 국가, 한 사회, 한 교회, 그리고 한 가정을 발전시키고 변화시키는데에는 많은 사람들의 변화와 희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적은 수의 자들, 자신이 받은 복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는자, 자신의 성공을 사명으로 발견한 적은 수의 리더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계획을 이끌어나가고 계신다. 가지지 못한 자들이 가진 자들을 강제로 끌어내려서 평등을 이루는 혁명적인 방법이 아니라, 스스로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자들이 그것을 사명으로 삼고, 주변의 자들을 섬길 때, 진정한 사회의 변화가 일어나리라고 믿는다. 오늘 한국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바로 성공한 소수이다. 자신의 성공으로 자신의 주변을 섬기는 소수가 필요하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학교에서, 회사에서, 그리고 국가에서, 부자관원을 찾고 계신 예수님의 찾음에 대답하고 나오는 자들이 필요한 때이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는 성공한 소수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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