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의 삶 (9)


하나님의 손을 보는 유학의 삶



이 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중에 무릇 그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대하 36:21-23)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장 11장을 시작하면서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11:3) 이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땅의 물리적인 세계에서도 눈에 보이는 것은 대부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는다. 눈에 보이는 날씨의 변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대기권의 변화로 인함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히터와 전등도 결국은 눈에 보이지는 않는 전자력의 영향이다. 온 우주가 유지되는 것도 온갖 힘의 작용이다. 사회 현상도 마찬가지이다. 경제학이든, 사회학이든, 경영학이든, 눈에 보이는 사회현상은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변수들의 상호역학작용에 의한 것임을 우리는 배워서 알고 있다. 시장에서의 가격이라고 하는 눈에 보이는 변수는 결국 수요와 공급이라고 하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고 배웠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혜로운 자와 지혜롭지 못한 자들의 차이는 바로 이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배후의 힘의 역학을 이해하는냐 하지 못하는 냐에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결국은 모든 학문의 궁극적인 종착점이라고 하겠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도 결국은 개인의 삶, 한국가와 사회의 변화를 보면서, 그 역사의 변화를 일으키는 원동력을 바라보는 시각을 얻기 위함이다. 따라서 역사를 공부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한 개인과 국가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리더들을 가까이서 만나면 남들에게서 만날 수 없는 묘한 매력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한 시대의 흐름을 꿰뚫어 보는 그 시각의 매력이다. 얼마전 일본에서 한 때 가장 빠르게 성장한 회사였던 DoCoMo의 회장으로부터 직접 그의 경영관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21세기의 지식경제 시대의 일본사회경제를 놀라운 역사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바라보는 그의 혜안에 큰 감동을 받았다. Cisco의 회장 John Chamber도 그와 같은 인물이다. 시대의 경제, 사회, 기술의 흐름을 꿰뚫고 있는데에서 나오는 탁월한 시각이 있다.


개인이건 국가이건, 역사의 맥을 보지 못하고 사는 삶은 그 quality가 역사의 맥을 보고 사는 삶에 비하여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와 같은 삶은 계속해서 반복되어지는 삶의 패턴을 보면서도 그것에 대한 거시적인 반응을 하지 못하는 삶이다. 그때 그때 삶에 사건이 터질 적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에 바쁜 삶이다. 이번주는 시험으로, 다음주는 가족일로, 그 다음주는 교수와 세미나준비로 정신없이 끌려가면서 사는 삶이 바로 그런 삶이다. 그런 삶은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잃고 사는 삶이다. 그래서 그곳에 내가 왜 있는지, 뭘하면서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삶이다. 어제 동료교수가 집에 가다가, 자신의 수첩에 그다음날 아침 8:30분에 약속이 잡혀있는 것을 보면서 비서에게 “What am I doing here at 8:30 tomorrow morning?”이라고 말하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That’s what happen, when you let others control your life”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불행이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역사의 맥을 보지 못하고 삶을 영위해 간다. 많은 기도를 한다. 병이 나면, 병을 고쳐달라고, 돈이 떨어지면 돈을 채워달라고, 직장이 없어지면 직장을 구해달라고, 마음이 불안하면 평안을 달라고, 교회가 어지러우면 교회가 평안하게 해달라고, 많은 기도를 한다. 그러나, 그 인생의 나가는 방향은 마치 안개속을 달리는 자동차와 같다. 두렵고, 답답하다.


역사의 맥을 잡는 것이 중요한 만큼, 어떤 시각에 역사를 보는가 하는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하나님의 시각에서 역사를 보아야 한다. 나는 유학생들이 역대상하서를 읽으면서 자신의 개인의 역사와 그 속해있는 국가의 역사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는 훈련을 하라고 권하고 싶다.


열왕기서가 솔로몬왕 때부터 이스라엘과 유대왕조의 멸망의 시점까지를 기록한 책인데 반하여, 역대상과 역대하는 정통 유대왕조를 중심으로 창세기부터 시드기야왕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때까지를 왕실에 있던 기록을 중심으로 적은 책이다. 열왕기가 왕들의 치적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사건들, 엘리야와 엘리사의 활동, 그 당시 백성들의 고통받은 장면이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역대기는 매우 담담한 어투로 유대 왕들의 치적을 중심으로 기록을 하고 있다. 역대상은 성경책을 창세기부터 다시 시작해서, 그 지루한 족보를 줄줄이 엮어가고 있다. 왜 하나님은 역대상과 역대하를 쓰게 하셨을까? 그리고 왜 구약성경 한 가운데 그 책들을 넣도록 하셨을까? 이미 다른 성경책에 모두 기록된 이야기인 이스라엘과 인류의 역사를 왜 두 권의 책에 다시금 기록하게 하셨을까?


일반적으로 역대기는 에스라에 의해서 포로귀환시기에 쓰여졌다고 믿어지고 있다. 에스라는 고레스왕의 칙명으로 인하여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의 성전이 다시 건축되어지는 상황에서 이 책들을 쓴 것으로 알려진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은 참으로 참담한 지경이었다. 국가는 없어지고, 왕실은 산산이 분해되었으며, 그들이 믿던 하나님의 성전은 돌부리하나 남지 않고 부숴졌다. 찬란했던 솔로몬의 궁전은 시랑의 굴혈이 되고 잡초가 무성한 황무지로 변해버렸다. 영화를 누리던 그들의 왕은 눈알이 뽑혀서 적들의 손에 끌려가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고, 그들 백성은 포로로 끌려가 이름도 알지 못하는 이방 신들을 섬기며 다른 민족의 종노릇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라는 역대기를 통해서, 이제까지 놀랍게 자신들의 민족을 축복해 주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일깨워 준다. 그들은 선택받은 다윗의 후손이며, 그들의 조상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 놀랍게 축복하여주었던 것을 일깨워 준다. 그는 눈에 보이는 환경의 지배를 받으면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준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오늘 바로 이와 같은 황무지의 돌무더기 가운에서도 우리에게 유효하며 우리 조상을 지켜주셨던 하나님은 바로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이 역대기의 주제이다. 우리에게는 다윗과 같이 용맹한 왕도, 솔로몬과 같이 지혜로운 왕도 없고, 오히려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다윗과 솔로몬에게 하셨던 그 약속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하다는 것을 설파하고 있다. 그는 역대하 마지막에 고레스왕의 성전재건축 명령이 오히려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였다는 것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신실하시고 단 하나의 실수나 오차도 없이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추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다. 역대기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주도하신 하나님의 손길로 우리들의 눈을 돌려준다. 그리고 역대기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역사를 볼 것을 우리들에게 권면한다.


역대기를 읽고 나서 이후의 예언서를 읽으면 하나님의 이스라엘 사랑하는 마음을 생각하며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줄을 잇는다. 오늘 역대기를 읽으면서 그리고 그 이후에 계속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을 읽으면서 오늘날을 살아가는 나의 삶, 조국 한국, 그리고 이 땅 썩어져가는 미국을 생각해 본다.


우리는 나에게 주어진 힘든 상황, 한계적인 상황 앞에서 좌절하고 낙심한다. 더 이상은 어떻게 손댈 수 없을 정도로 썩어 들어가는 환부를 보고 포기를 선언하며 환자의 상처부위를 덮어버리는 외과의사처럼, 우리는 스스로를, 그리고 이 사회를 포기하고나 있지는 않은가? 이제까지 나를 지키고, 축복하시고, 보호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그 손길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그분과의 약속을 잃어버리고 일방적으로 파기하였는지 모르나, 그분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은 신다는 것을 잊고 있지는 않았는가? 당신의 유학의 삶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라. 지금 성공하고 있는가? 이스라엘민족의 고난은 가장 영화스러웠던 솔로몬왕의 시대때 이미 시작되었음을 잃어버리지 말라. 아니면 지금 고통당하고 있는가? 예루살렘의 멸망도 결국은 하나님의 예정안에서 그분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음을 기억하자. 더 이상, 그때 그때 임시방편으로 살지 말자. 비롯 유학을 오는 결정은 기회가 있어서, 남들이 다와서, 직장이 지겨워져서, 아무 생각없이 왔다 할 지언정, 앞으로의 남은 유학의 삶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살아보도록 몸부림쳐보라. 이제까지 나를 위해서 살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눈을 위해서 살았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마음을 채워드리기 위해서 한번 살아보자. 당신을 이곳을 끌고 오신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자. 만일 당신이 당신의 삶을 놓고 역대기를 쓴다면 당신은 당신의 삶을 뭐라고 기록하겠는가?


한국의 사회와 교계의 모습을 보면서, 정치인과 경제인을 욕하기 전에, 반미 혹은 친미를 논하기 전에, 북한의 핵위협을 논하기 전에, 그 뒤에서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자. 전세계에 가장 큰 교회가 있는 나라, 가장 많은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했다고 자랑하는 나라, 가장 뜨겁게 기도하는 전통이 있는 나라라고 자랑하기 전에, 썩어가는 한국의 교계와 정치와 문화를 바라보고 계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어보자. 하나님의 손이 무엇을 어떻게 움직이시는 지를 주목하여 살펴보자.


미국을 생각할 때, 이락과의 전쟁이 옳고 그르고를 논하기 전에, 부시의 외교정책의 옳고 그름을 논하기 전에, 미국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라보도록 하자. 역사상 유례없는 군사, 정치, 경제, 문화, 학문의 초강국이 된 미국, 신앙의 자유를 찾아온 청교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신앙과 자유를 바탕으로 한 정부를 세우기 위하여 6개월을 토론하며서 세운 나라 미국, 그 미국의 역사 뒤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마음을 읽어보려고 노력하여 보자. 그 마음을 품으려고 몸부림쳐 보자. 인류역사상 유례없이 청교도의 신앙의 고백을 근거로 세워지고, 그들의 지폐에 “In God We Trust”라고 쓰는 나라인 미국. 그러나, 미국으로부터 무엇을 원하냐고 물어보는 뉴스위크 기자에게 한 이라크인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민주주의, 위스키, 섹스!” 전세계의 포르노 수출의 대부분이 미국에서 만들어지고, 타락과 향락의 상징이 되어버린 할리우드가 문화의 대명사가 되어버리고, 하루에 3000명이 넘는 unborn child가 낙태로 살인되어지는 이땅 미국을 하나님의 심장으로 한번 바라보기를 바란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라오디게아 교회에 하신 말씀이 바로 오늘 미국에게 하고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90년대의 유례없는 경제 호황으로 엄청난 부를 쌓았으나, 하루아침에 그 부는 다시 천문학적인 숫자의 재정적자로 돌아섰고, 그 엄청난 부를 통해서 복음의 말씀의 도구로 사용하기 보다는,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미국을 바라보면서, 가슴을 찟는 회개의 눈물이 있기를 바란다. 미국이 좋아서, 친미를 하기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 보자. 만일 당신이 오늘 미국의 역사를 가지고 역대기를 기록한다면 무슨 말을 기록할 것인가?


이스라엘 민족의 역대기를 읽으면서, 내 자신의 역대기를 생각해본다. 한국과 미국 교회의 역대기를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