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2년 2월호
노아 방주의 참된 의미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믿음 안에 세워지는 하나님의 나라
노아시대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두 말 할 것 없이 방주다. 방주에 들어간 자는 살고, 방주를 거부한 자는 다 죽었다. 중간은 없었다. 죽음 아니면 삶 뿐이었다. 그런 절대절명의 장소가 바로 방주였다. 그런데 “이 방주가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일까”라고 누가 묻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만약 “교회”라고 대답했다면 당신은 올바른 답을 했다. 대부분이 그렇게 배워왔고, 또 그렇게 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라고 답했을 때 그 “교회”의 의미를 더 깊이 함께 나누어 본다면 많은 사람들이 대답한 교회라는 답이 틀린 답이 될수도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곳에 들어가는 자는 살고 그렇지 않는 자는 죽는, 그렇게 목숨이 달린 중요한 곳이라면, 그리고 그 방주가 교회를 의미한다면 그런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분명히” “정확하게” 파악되어야만 한다.
교회라고 대답했을때 그 교회가 의미하는 바는 대답하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개교회(individual church)주의자들은 매 주일 자신이 다니는 교회를 생각하며 답했을 것이고, 개인영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개인의 몸이 성전이라는 차원에서 각자가 교회라는 의미로 답했을 것이고, 공동체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성도들의 모임 자체가 교회라는 의미로 답했을 것이고, 로마 카톨릭의 신도들은 전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는 모든 성당들의 전체 모임 자체라는 의미로 교회라 답했을 것이고, 보편교회(universal church)의 의미를 더 많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전 세계의 모든 교회 전체라는 의미로 답했을 것이고…
방주로 이끌지 않으면 물에 빠져 죽는다는 생각을 할 때 방주의 의미와 동일한 교회의 참된 의미는 분명히 개교회주의나, 교단주의나, 교파주의, 혹은 교회가 갖는 지엽적인 제한성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가 갖는 많은 의미 가운데 한 두 가지의 지엽적 의미로 방주의 의미를 국한시킨다면, 그렇다면, 교회 밖의 사람들은 다 물에 빠져 죽는다는 말인가? 분명히 우리가 갖고 있는 교회의 개념은 정확하게 재정립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갖고 있는 교회 의미 밖에 있는 사람들은 다 지금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교회 밖의 사람들을 방주 밖으로 끌어내어 물에 처 넣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의미에서 “방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질문에 다시 답해 볼 필요가 있다. “방주”는 “교회”라는 답은 개교회주의, 교단주의, 교파주의가 만연하는 오늘날의 지상교회시대에서는 오해되기가 쉬운 표현이다. 오히려 방주는 “예수”를 의미한다고 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깊은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쉽게 생각해도 될 문제를 내가 이렇게 걸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바로 교회의 참다운 의미, 사명을 다시 한번 더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이런 말이 있다. “오늘날 전도의 가장 큰 방해물은 바로 교회이다”(The biggest obstacle for evangelism today is church). 부인하고도 싶고, 받아 들이고 싶지도 않은 표현이지만 실제로 현 상황이 그러하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사람들은 교회 오기를 거부하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현실적으로 많이 있다. 이런 씁쓸한 유머가 있지 않는가? 캘리포니아 지역에는 한인 노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어느날 노인들이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여행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행중 두 노인이 싸우게 되었다. 아무리 말려도 싸움을 멈추지 않자 한 노인이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기가 교회도 아닌데 왜 싸우느냐고…”
교회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교회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성장이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교회부흥이 아니다 – 물론 교회부흥은 원리적으로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 말의 동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참다운 의미의 교회부흥이 아닌 경우가 많다. 개교회 부흥이 교회의 참된 목표인가?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서 개교회가 약해지고, 심지어 “없어지게 되더라도” 그 교회가 속한 지역사회에 하나님 나라가 건설된다면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과연 소금과 빛이라고 일컬어지는 교회가 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소금은 그저 소금으로 있을 때가 아니라 음식 속에서 자신이 없어짐으로 그 음식을 싱싱하게 유지시킬 때 “소금다운” 것이다. 빛도 자신이 타 들어감으로써 어둠을 밝힐 때 빛답다고 할 수 있다. 환한 대낮의 양초불은 아무런 역할을 못한다. 깜깜한 어둠 속에 있는 불은 아무리 작은 양초라도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내적 성장으로 인해 그 모습이 건재하다면 감사할 일이지만, 그것이 지역사회의 아픔과 어두움에 별 영향을 못 미치는 성장이라면 그 교회를 참다운 교회라고 할 수 있는가? 결과는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그러나 교회는 교회로서의 사명감당에 충실해야 한다. 세상을 향해, 지역사회를 향해 몸부림치는 교회의 모습이 없다면 본질적 의미의 교회, 하나님 나라 건설을 목표로 하는 교회가 아니라고 하고 싶다.
주님을 향하여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베드로의 그 고백 위에 주님은 자신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교회가 하늘을 매고, 푸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태16:19). 즉 천국의 상황을 가장 잘 소개하고, 천국으로 향하는 길을 안내하는 유일한 소개소가 바로 교회인 것이다. 교회(혹은 성도)가 잘못하면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할 수 있다(마태23:13). 또 에베소서 1장 마지막 장면은 교회를 향하여 엄숙한 사명을 주고 있다.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엡 1:22). 이 구절을 분석해 보면 맨 위에 머리되신 예수님이 계시고, 그 분의 몸 역할로 교회가 있으며, 그 교회의 발 아래 만물, 즉 세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교회이고, 교회를 다스리는 분은 주님이시다.
결코 세상의 정치가, 경제가, 학자들이 이 세상을 다스리지 못한다. 정치가들이 운영하는 세상에 왜 이렇게 죄가 만연한가? 학자들이 제시하는 사상이 진정한 소망과 가치관을 주는가? 왜 세상은 이토록 개인주의, 이기주의, 현세주의, 다원주의로 흘러 가는가? 경제가들이 섬기는 세상에 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가?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교회라고. 이 말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 교회의 위상을 높여 주는 것 같아서 신나게 들릴 지 모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진지하고 엄숙하게 들어야 할 말이다. 세상이 잘못되면 누구의 책임인가? 하나님은 누구에게 책임을 물으실까? 바로 교회라고 생각하는 우리 개개인(개인이 성전이므로-고전 3:16), 성도들의 모임(마18:20), 개교회, 교단, 교파, 그리고 모든 교회를 지칭하는 보편교회 등이 공동적으로 책임을 추궁당하게 될 일이다.
교회는 교회를 위해서 존재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디트리히 본 훼퍼는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교회를 정의하였다 – “교회는 남을 위해서 존재할 때만 참 교회가 된다.”(The church is only the church when it is for others)
나는 개교회를 섬기는 목회자이다. 많은 회개를 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목회를 하는 순간 마다, 수 없이도 많이 “내 교회”, “내 교회” 하면서 지내왔다. 이웃교회의 성장이나 부흥, 혹은 침체에 남 몰래 이기적인 생각, 냉소적인 마음을 가져온 적이 수 없이 많았음을 고백한다.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가진 것은 “교회의 목표가 교회의 성장”이라는 잘못된 교회관을 가졌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웃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할 때 내가 섬기는 교회가 같이 기뻐할 수 없다면 그곳에 무슨 하나님의 통치가 있고, 무슨 하나님께 영광이 있다는 말인가? 교회의 목표가 분명히 하나님 나라 건설이라면 개교회는 교회 안의 성도 간에, 개교회 간에, 보편교회의 한 부분으로, 그리고 그 개교회가 속한 지역사회에 하나님 나라 건설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2001년 연말에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는 기도를 계속하는 가운데 마태복음 6장 33절의 말씀이 계속 내 영혼을 울렸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8년 정도의 부교역자 생활과 7년 정도의 담임 목회자 생활을 하면서 내 눈으로 생생하게 체험한 것이 있다. 자신의 나라와 자신의 의를 구하는 사람은 어느 일정 기간 성공하게 보이고, 외적으로 훌륭하고 인기도 얻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사람들에는 물론 자기 자신에게조차 결코 진정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을 경험하였다.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아무리 훌륭해도 평범한 사람에 불과한 평가를 받는 것을 보았다 –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가장 평범한 상급을 받게 될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손해가 있을 듯이 보이더라도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놀라운 영적인 복을 주시는 것을 너무나도 많이 보아왔다. 그들의 내면은 영적 성숙과 평강, 기쁨으로 넘쳐 흐르고, 그들이 섬김는 삶의 영역에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는 다른 많은 영혼들에게 진정한 삶의 의미와 능력을 소개해 주고는 하였다.
마태복음 16장 27절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한다 –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진정으로 우리가 인생의 성적표를 받는 날이다. 그 날에 인생에 대한 진정한 평가가 나는 날이다. 그 평가는 결코 세상적 기준으로 되지 않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라는 기준으로만 평가될 것이다. 교회 사이즈가 문제가 아니라, 학력, 재력, 지위 등의 높고 낮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 어떤 상황에서건, 어떤 영역에서건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했느냐 안 했느냐에 하나님은 평가의 기준을 삼으실 것이다.
그 때 받을 상급을 신약성경에서는 면류관으로 자주 표현하였다. 신약에 모두 몇 개의 면류관이 등장하는지 아는가? 그리고 그 면류관은 어떤 자들에게 주는 것인지 아는가? 예수님께서 쓰신 가시 면류관까지 포함하면 모두 6개의 면류관이 나온다. 생명의 면류관(약1:12), 썩지 아니할 면류관(고전9:25), 자랑의 면류관(살전2:19), 영광의 면류관(벧전5:2-4), 의의 면류관(딤후4:8), 그리고 가시 면류관(요19:2). 이 면류관들은 모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한 자에게 주시는 것이다. 처음 두 개의 면류관은 “인내”와 “절제”로 “자신”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한 자에게 주시는 것이고, 나머지 네 개는 “전도”와 “양육”으로 통해서 “다른 사람”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한 자에게 주시는 것이다.
미국 전역에 목회자와 개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모임이 있다. “Prayer Summit”이라고 한다. 내가 속한 Washtenaw County에도 이 Prayer Summit 모임이 있고,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기도하며, 일 년에 한 번씩 3박 4일 동안 기도만 하는(?) 이상한 수련회를 한다. 이 때는 목회자들이 모여서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지역사회를 위해서 기도한다. 올해 이 모임을 참석하면서 한 번 더 하나님 나라 건설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각 교회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물론 서로 뜨겁게 기도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 목회자가 이 Prayer Summit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coordinate한 한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하자고 제안했다. 그 목사님은 자신의 교회 사역이 바쁜 와중에도 불구하고 지역사회의 연합(unity)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열성적으로 뛰신 분이시다. 정말로 열심히 헌신한 분이셨기에 누구나 다 그 분의 마음,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그 분의 열정을 알고 있었다. 참석한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나와서 그 분의 머리에, 어깨에 손을 얹고 기도하였다. 가장 뜨겁고, 가장 열정적인 중보기도, 감사기도의 순간이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 나라 건설은 누구에게나 감사한 일, 감격적인 일이다. 반면 내 나라 건설은 나와 나와 가까운 사람에게만 좋은 일이다. 교회가 그 본질적 사명인 하나님 나라 건설에 최선을 다할 때 세상은 그런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가 하나님을 세상에 보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개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개인의 삶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각자가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삶의 영역에 하나님의 통치권이 형성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유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 진로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그 진로의 결정마저도 하나님의 통치권에 맡긴다면 그는 참다운 의미의 방주를 이룩한 것이다. 학사에서 석사, 석사에서 박사과정에로의 진급을 학문과 지위에 대한 욕심 때문에 계속하려고 한다면 그의 삶을 통해서는 결코 하나님 나라는 세워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공부하는 것에 하나님 나라 건설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상급학교로 진급하려고 하는 나의 동기 속에는 내 인생 나라 건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건설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 확신은 평강과 기쁨 속에 오는 것이다. 그런 확신이 있다면 학비 때문에 진로결정에 고민할 수는 있어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 그런 확신이 있다면 성적 때문에 고민할 수는 있어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 하나님 나라 건설에는 어느 정도 고난에 대한 인내가 따른다. 왜냐하면 세상 나라 속에 세워야 하는 하나님 나라이므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믿음 가운데 세워져야 한다. 성도 간의 관계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져야 한다. 내가 못하는 일을 다른 성도가 잘 할 때 그 성도와 함께 기뻐할 수 있다면 그 성도 간의 관계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룩된 것이다. 이웃 교회를 위하여 늘 관심을 갖고, 기도하고, 섬기려는 노력을 할 때 교회는 참다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다.
교회의 하나님 나라 건설 목표는 단지 지역교회, 한인교회 등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미국에는 4-5천여개의 한인교회가 있다고 한다. 수많은 이 한인교회에는 미국교회는 없는 커다란 영적 장점이 있다. 곧, 기도의 열정, 봉사의 열정, 그리고 교회를 섬기고 사랑하는 열정 등은 여느 미국교회가 따라오기 힘든 큰 장점이 된다. 물론 미국 교회가 갖고 있는 장점도 많다. 그들은 좀 더 오랜 역사 속에서 정립된 성숙함, 합리성, 경험 등을 갖고 있다. 문제는 한인교회들이 좀 더 거시적 관점에서의 하나님 나라 건설에 동참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인교회들은 보편교회의 관점에서 보면 아시안 교회를 대표할 수 있다. 현재 미국에서는 백인들이 중심이 되는 교회와 흑인들이 중심이 되는 교회 간에 그리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 전통과 문화가 서로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쉽게 융화되어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 속에 아시안 교회가 들어가면 달라진다. 왜냐하면 아시안 교인들은 백인들과도 관계를 가질 수 있고, 흑인들과도 동감의 면을 쉽게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가장 큰 문제는 경제문제도 아니고, 정치 문제도 아니다. 그 깊은 내면 속에는 날로 다양하게 되어가는 인종들을 어떻게 융화로 이끌어 갈 것인가하는 문제가 숨어있다. 진정한 의미의 “United States”는 같은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만이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이코스타(eKOSTA)에 게재하려고 쓰고 있다. 유학생이 주 대상인 코스탄들에게 내가 왜 이민교회, 미국교회를 이야기하는가?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코스탄들이 코스타를 잘 세우기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목표설정이다. 코스탄의 목표는 코스타 부흥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건설이다. 이 목표가 동감이 된다면 미국에서 유학생으로 공부하는 동안, 그리고 앞으로 세계 어느 곳으로 가든지 하나님 나라 건설 자체에 목표를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코스탄들은 이민교회, 이민성도, 2세, 영어권, 아시안 교회, 미국교회 등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한다.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곳은 내가 속한 Washtenaw County의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이 모여서 3박 4일동안 기도만(?)하는 Prayer Summit 수련회 장소이다. 오늘 아침 마지막 기도 모임을 가지면서 나는 이런 헌신의 기도를 하였다. “하나님, 제가 섬기고 있는 지역사회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구체적으로 이렇게 기도하기를 헌신합니다. 학교를 지날 때는 그 학교를 위해서, 교회를 지날 때는 그 교회를 위해서, 식당을 지날 때는 그 식당을 위해서, 병원을 지날 때는 그 병원의 직원들과 환자들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이 지역사회에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건설될 때까지 먼저 기도로 헌신하겠습니다. 기도할 때 구체적 지혜, 용기, 능력, 실천을 주실 줄 믿습니다.” 다음 해 Prayer Summit을 할 때까지, 일 년 동안 나는 이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기도를 계속, 간절히 드리고 싶다. 그리고 “없어지는” 한 줌의 소금, 한 개의 촛불이 되고 싶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된다면 이보다 더 귀한 생이 어디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