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4년 11월호

이 곳 워싱턴 디씨 지역에서 유학생 사역(Korean Bible Study(KBS))으로 섬긴지 약 2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항상 동행하신 예수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희 사역은 금요일에 모여 함께 말씀을 나누며, 모임에 참석하는 지체들을 말씀 위에 스스로 서서 참 제자로 살아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물론 말씀을 깊게 연구하는 것이 사역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찬양 사역 또한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말씀 사역과 병행되고 있습니다. 작은 규모로는 금요일 성경 공부 모임에서, 크게는 매 년 두 차례 모이는 지역별, 전체 수양회에서 찬양팀을 통해, 또는 각 모임의 재량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유학생 사역 안에서 바라보는 찬양 사역에 대해 짧게 다루고자 합니다. 시중에 이미 나와 있는 전문적인 서적들과 비길 수는 없겠지만, 말씀 연구 위주의 사역 안에서 찬양 사역을 꿈꾸는 지체들에게 작은 보탬이 되길 기도합니다.


가끔씩 함께 지내는 지체들 속에서 쉽게 쓰는 말로 ‘feel’이 꽂힐 때만 찬양을 하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 찬양드릴 마음이 생겨야만 찬양하는 것입니다. 몸이 피곤하거나 나의 마음이 깊은 고통으로 인해 괴로워할 때, 찬양은 생각하기 힘든 옵션이 되고 맙니다. 그럴 때는 차라리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다른 일들을 하고 싶습니다. 모임 전에 기타에 맞춰 부를 찬양들이 마음에 불평을 불러일으킵니다(한 번쯤 소그룹에서 찬양을 인도해보신 분이라면, 저 뒤에 모자를 푹 눌러 쓰고 팔짱을 낀 채 시무룩하게 앉아있는 친구가 어렵지 않게 떠오를 것입니다). 마음이 너무 편해도 찬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다른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런 사람은 언제 찬양을 하게 될까요? 뭔가 내 자신 안에 ‘쥐어짜는 듯한 마음’이 있어야만 진정한 찬양을 드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구할 것이 있거나, 마음으로 담아내기 힘든 어려움이 있을 때만 찬양다운 찬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찬양은 ‘곡조가 담긴 기도’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분들에게 박수 치면서 부르는 찬양은 정말 곤욕일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뻐 뛰노는 모습은 경박스럽기만 합니다. 이런 모습들을 잠시 떠올리면서 찬양은 우리에게 하나의 선택으로 전락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와 조금 다른 시각으로 찬양을 본 듯 합니다. 그는 시편 33:1통해 말합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찬양은 의인들의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신약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의인됨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됨을 의미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모든 사람들은 마땅히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땅히’라는 단어는 강제성을 내포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여기서 쓰인 ‘마땅히’라는 말은 ‘아름답다’는 뜻의 ‘나베’라는 히브리어가 쓰였습니다. New American Standard Bible에는 ‘becoming’이라는 단어가 쓰여있습니다. ‘어울린다’는 말입니다. 찬양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것, 어울리는 것이라면, 찬양은 정말 선택적인 것입니까? 개역한글의 번역이 잘못된 것일까요? 저는 의미상으로 바른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찬양을 하지 않을 경우를 한 번 생각해봅시다. 마치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것과 같습니다. 아름다움의 반대인 ‘추함’을 입게 됩니다. 추함이라는 강한 단어를 쓰지 않더라도, 썩 좋아보이지 않는 모습이라면 어떨까요? 어떤 분들은 썩 좋아보이지 않아도 편하게 있으면 그만이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충분히 동감할 수 있는 말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정장에 넥타이까지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경우에 따라 저의 개인적 성향을 잠시 무시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언제일까요? 정장이 꼭 필요한 시간입니다.


마태복음에 왕의 잔치에 초대 되었던 한 사람을 기억하십니까(마태복음 22:11 13)? 왕의 혼인 잔치에 오려는 사람이 없자 사거리 길에서까지 사람들을 불러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여기 이 사람도 불려 왔습니다. 추리닝 바지에 티셔츠를 걸친 아주 편한 차림으로…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불러올 때는 언제고 이제는 내어 쫓김을 당합니다. 불러드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잔칫상의 진수성찬을 뒤로 한 채 그대로 쫓겨났습니다. 이 사람은 쫓겨나서 아주 서럽게 울었다지요?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왕이 있었던 시대에는 왕의 행차에 절하지 않는 사람은 극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왕의 백성으로서 왕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 것은 ‘죄’인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시편 29:2)’ 왕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은 마땅히 행해야 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 앞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what’s becoming) 옷을 입고 나아가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바입니다. 우리가 찬양으로 하나님 앞에 서있지 않다고 해서 그분께서 우리를 바로 죽음으로 내모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위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천국의 백성이라면, 그리고 구원에 대한 깊은 감사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왕 되신 주님 앞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항상 서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찬양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분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드리워지는 것이 보이십니까?


학생의 때는 감정이 가장 민감한 때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상황과 사건에 따라서 바뀌는 감정. 그리고 그 감정 속에서 흔들리는 신앙, 그 안에서 찬양은 언제나 합당한 것이라는 개념을 받아드리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찬양은 사람의 감성과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상황에서 야기되는 감정을 뛰어넘는 찬양을 드리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 속에서 더 아름답게 찬양한 사람이 있습니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시편 63:3-7)


시편은 다윗의 찬양하는 삶을 잘 보여줍니다. 특별히 시편 63편은 다윗의 넘치는 기쁨과 감사가 ‘충만하게’ 표현된 시 중에 하나입니다. 입술로 찬양하고, 손을 들고 찬양하며, 또한 기뻐합니다. 잠을 청할 때도 하나님을 기억하며 묵상하고 찬양합니다. 다윗은 정말 찬양으로 가득찬 사람이었습니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가 주시해야 할 것은 이 시가 쓰여진 당시의 상황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아들이었던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해 광야로 도망치던 중에 이 시를 썼습니다. 왕으로서, 아버지로서의 체면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고백합니다. 주님의 인자하심… 골수와 기름진 음식…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을 인해 그는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억지로 하는 찬양이 아닙니다. ‘즐거이 부른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찬양했던 제목들이 그의 눈 앞에 있었습니까? 도망치는 자에게 어떤 인자하심과 도움이 있었겠습니까? 어떤 기름진 음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겠습니까? 다윗 왕의 행렬에 욕을 하고 돌을 던졌던 사람의 이야기를 보아도, 다윗의 행렬이 얼마나 급하고 초라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찬양합니다. 진실과 전심으로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다윗에게 ‘찬양은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의 인자하심, 하나님의 전능하심,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이라는 분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비록 다윗의 앞에 모든 것이 초라했지만, 다윗은 그것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진정으로 보았기에 그는 즐거이 부를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찬양은 이 실상을 고백으로 끌어내는 통로입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펼쳐있는 상황이 어떻든지 하나님께서는 선하시며, 모든 일에 주관자 되심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 가운데 있을 때, 언제나 합당한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됩니다. 감정의 기복을 뛰어 넘는 찬양을 드리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이 담긴 찬양을 하나님은 흡족하게 받으실 것입니다(히브리서 12:6).


이제 이런 아름다운 믿음의 고백을 어떻게 소그룹 안으로 가져 올 수 있을지 잠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소그룹 안에서는 대개 한 명이 기타나 다른 악기를 가지고 찬양을 인도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적게는 한 명, 많게는 10명 정도의 지체들이 함께 할지 모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찬양을 인도하는 스타일이나 가창력, 또는 악기 연주 실력에는 그렇게 비중을 두지 않습니다.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찬양의 내용이며, 찬양을 준비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우선, 찬양은 그 날 나눌 말씀을 반영할 수 있는 곡을 생각하며 선정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찬양의 본질적인 목적은 앞에서 나눈 것과 같이 왕 되신 주님께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 공부 전에 드려지는 찬양은 다른 부차적인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함께 있는 지체들의 마음으로 말씀을 향해 열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찬양을 통해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고, 이제 그 안에서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차적인 목적 때문에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찬양이 사람에게 맞춰져서는 안되겠습니다. 여기서 ‘맞춰진다’는 것은 찬양의 템포나 스타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찬양을 준비하는 인도자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하나님께 드릴 찬양을 준비하되, 찬양의 드려짐을 통해 사람 안에 역사하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너무 그날의 말씀과 찬양을 끼워 맞추려는 노력은 피해야 할 것입니다. 찬양곡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부분은 여기서 다루지 않겠습니다. 찬양의 흐름에 따라 찬양곡을 선별하는 것은 인도자에게 중요한 일입니다.


인도자로 세움을 받으시는 분들은 찬양 가운데 생활하시기를 권면합니다. 가급적이면 항상 찬양을 들으시고, 마음으로 깊이 배우시기 바랍니다. 찬양의 가사들이 자신의 고백이 되어야 하고, 또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대부분 말씀을 통해 당신의 뜻을 알리시지만, 이제 찬양으로도 그렇게 하시도록 하기 위해 찬양 속에 깊이 들어가 있으시길 권면합니다. 몇몇 소그룹이나 수양회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분들이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룹 멤버들이나 회중을 같은 열정으로 찬양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너무 어려운 일이라고 합니다. 사실입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소그룹이 큰 회중보다 어려울 것입니다. 소그룹 안에서 혼자 열심히 찬양하고 있는 그 어색함을 상상하고 계신가요? 궁극적으로 ‘찬양’이 여러분의 삶을 통해 지체들에게 드러나게 하십시오. 몇 번의 감성적 노래 부르기는 가능하지만, 진정한 찬양은 가시적인 요소만으로 드려질 수 없습니다. 인도자의 삶에 깊이 뿌리내린 찬양의 영성으로만 함께 찬양하는 이들을 권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먼저 깊은 영성의 찬양으로 하나님 앞에 설 때,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channel로 사용하셔서 잠들어 있는 지체들의 영혼을 깨우실 것입니다. 지체들이 변하는 시간이 오래 걸려서 인도자가 지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사람을 보지 말고, 찬양의 대상을 항상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도자로써 온전한 channel이 될 수 있도록… 그리고 함께 찬양하는 지체들을 항상 하나님께 기도로 올려드리십시오.


우리는 왕 되신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항상 그분께서 함께 있으리라 하셨기에 항상 왕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항상 찬양을 불러야 할까요? 네, 그렇습니다. 항상 불러야 합니다. 길을 걸을 때에도, 운전할 때에도, 잠이 들 때에도, 아침에 일어날 때에도 항상 부르십시오. 환란 가운데서도, 처절한 슬픔 가운데서도,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도 믿음으로 부르십시오. 그분의 선하심을 믿는 삶으로 부르십시오. 항상 아름답게 드려질 믿음으로 예배, 곧 예배의 삶으로 부르십시오. 삶의 모든 순간을 주님께 아름다운 제사로 드리십시오. 그것이 곧 찬양입니다. 그것이 영감 있는 찬양입니다. 하나님이 흡족히 여기시는 노래입니다.


교실 한 구석에서 모자를 눌러 쓰고 심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형제 혹 자매가 보이십니까? 그 지체에게 아름다운 믿음의 예복을 입혀줍시다. 이제 예수님께서 곧 행차하신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