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3년 11월호

첫 학기



처음 미국에 유학 와서 짧은 여름방학동안 랭귀지 코스를 듣고 토플을 본뒤 가을학기에 파트타임으로 대학 강의를 듣게 되었습니다. 첫 학기 첫 수업…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영어를 많이 안써도 되는 물리와 수학을 신청했는데 물리 첫 수업을 듣고 나오면서 근심에 쌓였습니다. 교수의 강의가 거의 안 들렸기 때문입니다.  더운 여름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어렵게 대학에 들어왔는데 첫 수업을 받고 나오면서 드는 생각이 “F 받게 생겼군… 첫 학기부터 쫒겨날 것 같은데… 만약 내가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다면 정말 그건 하나님이 내게 기적을 베푸신 때문일거야” 였습니다.



그 때 저보다 유학 2년 먼저 온 선배와 우연히 같은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저 선배는 2년 먼저 왔으니까 수업이 잘 들렸겠지… 저 선배랑 그룹스터디라도 해야지 안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선배에게 찾아가 학생회관에서 만나 함께 공부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저녁에 학생회관에 온 선배는 책가방을 열더니 교과서가 아닌 성경책을 꺼냈습니다. 그 때까지 성경은 교회에서만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저에겐 책가방에서 나오는 성경책이 참 생소하게 느껴졌습니다.  ‘오늘 교회에서 예배가 있었나보지?’ 라고 생각하면서 “왠 성경책이에요?” 라고 묻는 제게 선배는 “같이 보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라면서 갈라디아서 2장을 폈습니다. 18절 부터 20절까지 한 절씩 돌아가면서 읽자고 하는 선배의 말에 어색해 하면서 한절 한절 읽어 내려갔습니다. 



마지막 구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를 읽고 나서 선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지난 2년 동안 유학생활을 해보니까 참 힘들고 특히 주위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이 사는 사람들은 많이 방탕한 길로 빠지더라. 너는 이제 처음 유학생활을 시작하고 아직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 말씀처럼 믿음 안에서 유학생활 잘 시작하라고 이 말씀을 주고 싶었어”



산 앞에서



그렇게 시작한 저의 유학생활은 선배의 말처럼 한 학기도 맘 편히 시작한 적이 없던 힘든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매 학기 시작할 때마다 시편 121편을 떠올리며 “산처럼 느껴지는 이번 학기지만 또 그 산을 향해 눈을 듭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라고 금식기도로 시작했던 기억이 납니다.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갈까’ 라는 생각도 많이 했었습니다.



공부의 어려움도 그랬지만 한창 청년의 때에 한국 사람이 별로 없는 곳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느끼는 외로움도 컸던 것 같습니다. 대학에 들어간 고등학교 동창들이 ‘미팅했다, 엠티갔다, 축제 기간이었다, 동아리 활동이 재밌다, 남자친구 생겼다, 남자친구 군대갔다, 남자친구랑 헤어졌다’ 는 평범한 한국 대학생의 삶을 전해올 때면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곤 했습니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은 말 그대로 벽처럼 느껴졌습니다. 한국에선 하고 싶은 말 다하고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살았는데 언어의 벽 앞에 처절히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구나” 느낀 적도 많았습니다. 김치 냄새가 나니까 주 중에는 김치 먹으면 안된다는 것도 처음엔 “왜 남의 나라 음식을 가지고 뭐라고 그러지” 라며 기분이 나빴지만 어느 날 부턴인가 수업을 받으러 갈 때 향수를 뿌리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왜 내가 이 곳 남의 나라까지 와서 공부해야 하는가… 왜 단지 영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이렇게 주눅들어야 하는가.” 어쩌다 제가 이 곳에서 이방인이라는 것이 피부로 느껴질 때면 수없이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입니다.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스스로에게 물어도 답이 안나오면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귀에 들리게 음성으로 말씀해 주시면 좋은데 아무리 때를 쓰고 졸라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성경공부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성경을 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는 습관도 제대로 안되어 있어서 막상 말씀을 보고 싶어도 어디를 봐야할 지 몰라 대강 중간을 폈습니다. 그러면 늘 이사야나 시편이 나왔습니다. 처음엔 한 두 절 읽다가 전혀 이해가 되지 않고 하나님이 나에게 뭐라고 하시는지 느껴지지 않아 그냥 덮었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제게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말씀인데도 그 말씀을 또 보고 싶고, 더 알고 싶은 갈급함을 주셨습니다. 얼마 후에는 아무렇게나 편 말씀이 별 감동이 없으면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나올 때까지 계속 읽게 되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 42:5>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1:10>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이사야 12:2>



그렇게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생길 때 마다 손으로 직접 적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영어단어를 외우는데 쓰려고 구입했던 3×5 인덱스 카드에 한절 한절 적어나갔습니다.  처음엔 한 두장 되던 것이 시간이 갈 수록 고무줄로 묶어야 할 정도로 많이 쌓여갔습니다. 말씀이 조금씩 달게 느껴졌고 나중엔 성경을 더 알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절 또는 한 장씩만 보던 말씀이 성경 한권 한권 보게 되고 나중엔 성경 전체를 읽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보며 제가 왜 이 곳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며 공부를 해야 하는 지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원했던 “목소리”가 아니라 성경의 인물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말씀들을 통해, 예수님이 문둥병자와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시는 말씀들을 통해, 바울이 교회들에게 쓴 편지들을 통해, 그리고 요한이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들을 쓴 것을 통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믿음의 여정을 시작한 것처럼, 그래서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었던 것처럼 저도 본토 친척 아비의 집, 너무나 익숙하고 편해서 하나님 없이 살아도 별 불편을 모르던 곳을 떠나 이 먼 미국까지 와서야 이 세상은 믿음으로 사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미국 사람들 속에서 공부하고 생활하다 문득 문득 느끼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저는 나그네요, 이방인이었습니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 앞에서 느낀 것처럼 제가 할 줄 알고 익숙하다고 여기던 것들이 모두 아무것도 아니었고 저는 아무에게 아무 것도 내놓을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을 통해 발견한 저의 정체성은 은혜 없이는 못사는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연약한 자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지명하여 부르시고 “너는 내 것이라” 인치신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였습니다.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였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지 않으면 끊임없이 나를 짓누르는 외로움과 열등감과 무기력함을 다른 것으로 채우기 위해 공허만이 가득한 세상의 것을 향해 허덕이며 달려갈 수 밖에 없는 불쌍한 자였습니다.



빨리 돌아가고 싶어요



시간이 흘러 하나님의 은혜로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고 이제는 제가 선배가 되었습니다. 이제 막 유학생활을 시작한 교회 후배가 어느 날 전화를 했습니다. 평소에 별로 말이 없던 후배가 전화해서 얼마 전에 있었던 청년회 월례회에 못가서 죄송하다고 합니다. ‘내가 그렇게 무섭게 보였나?’ 싶어서 “뭐가 죄송하다는 거야? 괜찮아, 사정이 있으면 못 올 수도 있지” 라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의외로 부드럽게 받아줘서 마음이 놓였는지 “언니, 고마워요” 라면서 조금 마음을 열고 고민을 얘기합니다.



“언니, 저는 사실요, 빨리 마치고 빨리 돌아가고 싶어요. 그래서 이번학기에 19학점 듣거든요. 3년 만에 마칠려고요. 저는 여기가 너무 싫어요. 교회봉사는 해도 청년회 활동 같은 것 하기 싫고요. 시간 낭비 같아서요.”



솔직하게 말을 해주니 고마웠지만 한편으론 안타까웠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기회를 그저 통과해야 할 관문, 필요악으로 여기는 것이… 빨리 해치우려는 그 3년이라는 시간은 한 사람의 영혼의 변화되고 훈련 받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랬기 때문에…



후배에게 참 안타까운 마음으로 유학생활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지, 또한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복된 시간인지 얘기했습니다.



마치 첫 학기에 어떻게 하면 성적을 잘 받을까 생각하며 그룹스터디를 제안한 제게 성경책을 들고 나타나 “그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유학생활을 하라고 했던 그 선배의 그런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 통화 이후 제 말 때문이 아니라 그 후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후배가 조금씩 마음을 열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감사했었습니다.



복 있는 자



복 있는 사람, 성경에서 말하는 복된 자는 출세가도를 달리는 자도 아니요, 외모가 출중한 자도 아니요, 재주가 뛰어난 자도 아니요, 머리가 좋은 자도 아니요, 부유한 자도 아니었습니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송이 꿀보다 말씀이 더 달다고 고백할 수 있는 자,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며 혼자서는 세상을 살 수 없다고 부르짖는 자,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니라 나에게는 돌아갈 본향이 있다고 나그네의 삶을 고백하는 자,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주의 은혜라”며 내가 아무 것도 아님을 아는 자였습니다.



그러기에 유학생활은 내 삶의 성공을 위해, 남들도 다하니까,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치뤄야 할 관문이 아니라 그 과정 자체가 복되고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영어가 안 되서 열등감에 쌓인다 해도, 견딜 수 없는 외로움으로 눈물이 난다 해도, 보이지 않는 미래로 인해 불안에 휩싸여 있다 해도, 물 위에 기름처럼 겉도는 이방인의 삶이 서럽게 느껴진다 해도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그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31-39). 우리는 그 분의 것이기 때문에…



조금 무시당하고, 아파하고, 좌절하고, 실패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나는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위해 또 왜 살아야 하는지 깨달을 수 있다면 내가 처한 고난의 자리는 사실 놀라운 복이 넘치는 감사의 자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학생활은 복된 것이고 힘들게 유학생활을 하며 하나님을 알아가는 나는 복된 자입니다.



젊음을 주께 바치라



힘들고 지치는 유학생활



언어도 생활방식도 다른 낯선 환경 속에 적응하는 것만도 벅찬데 학업이라는 무거운 짐과 외로움과 고독이라는 큰 벽이 우리 앞에서 우리를 짓누르며 힘들게 합니다



때로는 너무 힘들고 지쳐서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고, 삶의 목적조차 불투명해져 방향을 잃고 헤메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힘겨워 하며 아파할 때 우리 마음 한 켠에서 애타게 우릴 부르시는 분이 계십니다.



당신과 저를 사랑한다고 애타게 외치시는 예수님



이제 귀를 열어 그 분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이제 눈을 들어 그 분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 분과의 만남을 통해 당신의 삶의 목적과 소망이 어디에 있는지 재 확인해 보십시오.



당신을 이 분과의 만남에 초대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대학 3학년 때 섬기는 교회에서 유학생을 위한 집회 “젊음을 주께 바치라”를 준비할 때 쓴 초대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