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3년 12월호

그리스도의 몸은 2-3명의 지체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모일 때 형성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몸이 표현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구조와 질서를 필요로 합니다. 바로 지역교회나 캠퍼스 미니스트리와 같은 조직들을 그분의 몸의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구조나 사역의 접근방법을 취하든 그리스도의 몸은 성장해야 하고 성장은 제자를 삼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지역교회는 선교의 모든 분야와 모든 대상을 목적으로 지역적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에 표현된 예수님의 몸 중 가장 기본적 단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캠퍼스 선교에서 사역하는 지체들이 대부분 지역 교회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역교회는 肩?특수 선교에서 사역하고 있는 사역자들을 포용하고 더 나아가 돌볼 수 있는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각 사역들이 가진 특성들이 오랜 시간 지속되다 보면 서로의 장점에서 배울 수 있는 부분들이 오히려 서로의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지역교회는 갓 태어난 어린아이부터 나이 많은 노인분들까지 돌보며 또 교육과 지역봉사 등등을 감당하며 사회 각계 각층이 모이는 하나의 공동체로 자라가려면 많은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특히 이민 교회의 경우 한인들간의 친교를 도모하려는 경우가 많아 전도와 제자 삼는 사명에 대한 의식이 희미해져 있습니다. 미국주류사회에 진출하지 못하고 소외된 한인들에게는 교회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사회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이 중심이 되어 있는 교회는 행사위주이며 권위주의적 체제로 운영되기 쉽습니다.



반면에 캠퍼스에서 사역하는 자들은 특별한 사명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동참하지 않습니다. 또한 목적의식이 뚜렷하고 말씀에 붙들려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외로운 생활을 오래 해야하기 때문에 외곬수적인 성격을 가지게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전도의 대상도 젊은 사람들이고 지역교회에 비하면 훨씬 더 균일화되어 있어서 빠른 시일 내에 제자훈련도 가능합니다. 자신들의 시간을 쪼개가며 헌신하기 때문에 캠퍼스 사역 이외에 자신들과 같이 제자 삼는 일과 전도에 집중하지 않은 지역교회의 모습에서 회의를 많이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교회 행사들은 하나의 사치스러운 일들로 간주하기 쉽습니다.



이런 분위기 가운데서 지역교회는 캠퍼스 사역자들을 포용하고 돌보기보다는 하나의 얄미운 존재로 간주하기 쉽습니다. 지역교회 운영 자체에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는데 캠퍼스 사역자들은 이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기보다는 오히려 있는 노동력마저 무기력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코스타 참석 후 복음의 참된 의미를 깨달은 교회내의 청년들이 그럴 때가 많습니다. 캠퍼스 사역자들에게는 지역교회에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사역이 본질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는 일을 포기하며 도저히 동참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이 두 사역이 서로 협력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나갈 수 있는 것일까?



첫째, 목적의식의 공유이다. 만약 지역교회나 캠퍼스 사역의 목적이 전도와 제자 삼음에 있지 않으면 서로 협력할 필요가 없고 각각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담당하면 됩니다. 상호간의 협력은 목적 공유가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중심으로 제자 삼는 일이 교회의 가장 핵심 된 목적이 되어야 하고 모두가 이에 동참해야 합니다.



둘째, 서로에 대한 이해이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 한 서로의 접근방법과 대상이 다른 것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캠퍼스 사역자들은 교회가 단기선교나 특별 부흥집회등에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 대하여 그 나름대로의 유익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캠퍼스 사역자들이 일주일 내내 자신의 자유시간 없이 선교지에서 수고하고 땀을 흘리는 것을 위로까지는 못해주어도 알아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교회사역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마음이 없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사역의 가장 핵심적인 사역을 이미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서로의 사역에 대한 존중이다. 제자가 삼아지는 한 서로의 사역에 대하여 협력하되 필요이상으로 간섭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오히려 상호간 장점을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교회에서는 쎌 처치의 방법을 캠퍼스 사역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해 오던 소그룹중심의 사역의 경험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반면에 캠퍼스 사역자들은 교회 안에 있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의 신앙관과 생활도 용납하고 기다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미 나이 드신 분들은 혹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해도 이를 바꿀 수 없기 때문에 포용해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서로의 사역에 대하여 존중하게 될 때 자신의 사역에 동참시키기 위해 다른 사역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게 됩니다.



아쉽게도 현실적으로 셋째 단계에까지 이르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래서 지역교회와 캠퍼스 사역간에 많은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현재 미국에 있는 한인 기독인들의 현실입니다.



한가지 좋은 예



워싱턴 디씨에 있는 한 교회는 이런 갈등을 점진적으로 해결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교회는 그 지역 캠퍼스 사역의 근거지 역할로 사용되며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청년층을 포용하려고 노력합니다. 오늘 이런 발전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 교회 담임 목사님과 캠퍼스 간사들의 헌신과 신념입니다. 그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캠퍼스 간사들은 수년동안 조용하게 캠퍼스에서 헌신하며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고 그 담임목사님은 그들을 뒤에서 알게 모르게 도우시며 또 이런 그들의 열매를 보시며 그들이 교회에 들어올 수 있도록 포용하신 것입니다. 그 방법은 그들의 사역을 인정해주고 가끔씩 직접 캠퍼스에 오셔서 말씀도 전해 주시고 그들이 교회에 평안하게 예배드릴 수 있도록 반갑게 늘 맞이해 주신 것입니다.



가장 최근에는 교회에서 주일에 또 하나의 예배를 시작하시면서 그 예배의 모든 운영과 진행을 캠퍼스 간사들이 중심이 된 청년들에게 맡겼습니다. 그 담임 목사님의 신념은 청년들이 전도되어 제자로 자랄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캠퍼스 사역이 교회의 청년사역과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기 시작하고 교회에 청년층이 자랄 수 있는 좋은 바탕을 형성하였습니다. 캠퍼스 간사들은 자신들이 캠퍼스에서 하던 제자 삼는 일을 이제는 교회 안에서도 쎌 처치의 형태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에 오는 청년들은 (물론 캠퍼스 사역을 통하여 오는 경우가 대부분 이었지만) 캠퍼스에서든 교회 안의 쎌에서든지 훈련받을 수 있는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이 교회에는 오래 전부터 주일 저녁예배도 없애고 가능한 한 행사를 하지 않습니다. 가족끼리의 시간과 세상에서의 빛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비 본질적인 것은 제거한 것입니다.


이런 결정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담임목사님으로서는 자신의 영향력을 스스로 제한시키는 것이며 불확실성에 사역의 일부를 내어놓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내에 또 청년사역을 탐하는 많은 사역자들을 물리쳐야 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들을 설득시켜야 하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없거나 자신의 유익보다 그리스도의 유익이 앞서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자신 (혹은 우리)만이 할 수 있다는 교만이 없어지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성장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캠퍼스 사역자들이나 캠퍼스에서 훈련받은 자들이 40-50대까지 캠퍼스에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시간이 되면 그 누구보다도 더 잘 훈련된 교인의 한 명으로 그 교회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하나님의 일군들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