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그리스도인의 능력” (로마서를 중심으로 본 복음의 능력)


지 난 2006년 7월 시카고 휘튼 대학에서 모였던 코스타에서 우리는 히브리서 8, 9, 10장을 중심으로 복음을 공부하였습니다. 이제 약간 더 충분한 시간을 갖고 지면을 통하여 이 동일한 복음을 로마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로 마서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거룩한 무리들, 혹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그의 복음 설명 및 적용 서신입니다. 본 지면에서는 로마서 본문의 모든 내용을 다 다루지는 못하지만, 로마서 전체의 흐름을 파악하고 또 복음 이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삶에 도움을 주는 것이 본 글의 가장 큰 목표가 됩니다. 저와 함께 로마서를 공부하기 위해서 독자들이 꼭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한글과 영어 성경 본문을 면밀하게 잘 읽는 것입니다.
  2. 먼 저 로마서 1장 1절에서 17절까지를 보겠습니다.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면 바울이 왜 이 서신을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들을 방문하고 싶었지만 길이 여러 번 가로막혔습니다. 그 동안 바울도 복음 안에서 성장하면서 처음 이해했던 복음보다는 훨씬 더 성숙한 이해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복음을 (또는 복음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을) 로마 제국 이방 사회에서 핍박 받고 있던 믿음의 형제자매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어서 로마로의 여행을 여러 번 시도했었습니다. (11절의 “신령한 은사”라고 번역된 말의 뜻은 “영적인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직역할 수 있는 바울의 언어입니다. 원문을 보아도 그렇게 번역해야 정확합니다. “신령한”과 “은사”라는 말들에 대한 오해들이 많아서 정확한 원의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길들이 막히자 그는 결국 서신을 보내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길이 막힌 것 역시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로써 오늘 우리도 동일한 하나님의 “신령한 은사”를 공급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3. 그 러므로 본 서신의 목적은 그가 경험한 “신령한 은사” 즉, 하나님의 “영적인 선물”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본 서신 전체의 문맥상 물론 이 하나님의 영적 선물은 “복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본 서신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1:1), “그의 아들의 복음” (1:9), 혹은 심지어 “내 복음” (2:16) 등으로 표현한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 복음은 성경을 통하여 역사 속에서 실현된 하나님의 객관적인 약속(고전 15:1-8)일 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밖에 없는 실존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갈 2:20).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dunamis)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복음에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 “능력”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바울의 의도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로마서 전체의 문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신구약 성경 전체 문맥(context)의 도움도 필요합니다. 꽤 많은 경우에 성경의 용어들이 독자의 선입견으로 부정확하게 해석되는 것을 봅니다. 여기서 “능력”이란 말도 그런 듯싶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외적인 표적 (sign 또는 performance) 혹은 은사에서 찾는 경향이 많은 사람들은 16절을 읽으면서 “복음”을 외적 은사나 통속적인 의미에서의 “능력”과 동일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16절 문장의 문맥이 보여주듯이 여기서 능력은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그러한 종류의 능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은 “구원”이라고 하는 내용에 비추어서 이해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이 왜 하나님의 능력이 될 수밖에 없는가를 바울은 말하고자 하겠지요. 그렇습니다. 로마서 1장 이하를 차근히 읽게 되면, 구원이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잘 계시된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은 “믿음”이라는 개념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제 이 내용들을 1장 17절 이하에서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4. 그러면 로마서 본 서의 핵심 구절이라고 할 수 있는 1장 17절의 말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16절까지 인사 및 본 서 기록의 의도 등을 언급한 뒤, 17절에서 바로 복음의 핵심을 말해줍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본 절에서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내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믿음”의 뜻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의인”의 정의입니다. 이제 첫 번째 개념부터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5. 첫 번째 내용을 롬 3:21에 비추어 본다면, 복음 외에도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적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라는 말씀에 의할 때에 하나님의 의는 율법에도 나타났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과 신약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의”가 분명합니다. 이제 우리가 바울이 말하는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이해한 “의”의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기독교에서 흔히 이해하고 있는 죄와 구원의 개념들도 이 의의 개념을 이해할 때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6. 그 러면 롬 1:17에서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우선 먼저 간단히 결론적인 답부터 내리고 차후에 더욱 차근히 살펴보겠습니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하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가 만족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의라는 헬라어 말은 dikaiosune인데 바울에게 있어서 이 말은 구약의 개념을 전하는 헬라어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구약의 히브리 말인 Tzedeq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의” 혹은 “공의”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시편 31:1에서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혹은 시편 35:24에서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 . . “ 등에서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시 31:1은 Martin Luther로 하여금 자신의 구원이 자기의 의에 있는 것이 아님을 확신시켜 준, 즉, 그의 종교적 패러다임을 신앙의 패러다임으로 전환시켜 준 계기가 된 구절이기도 합니다. 루터가 깨달은 것은 자신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에 달려 있다는 진리였습니다. 이제 이 말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해보겠습니다.
  7. 하 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신학자들 간에는 이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자비/은혜(hesed)라는 말과 동의어인 것으로 보는 이들도 상당히 있습니다. 그 이유는 위의 시편 31:1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의 의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3:6에서 사랑이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한 데에서도 나타나 보입니다. 즉,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으로 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곧 의로우심과 항상 함께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속성을 하나님의 자비/사랑이라고 하는 본질적 속성(요일 4:8, 16 참조)과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비록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이 분리되어 나타나지는 않지만, 복음을 우리 수준에서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의 속성을 먼저 구약의 빛에 비추어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적 속성인 사랑이 어떻게 당신의 의로우심과 함께 나타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논의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바울이 사용한 법적인 용어로서의 “의”의 개념을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