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STA/USA 2006 아침 성경 강해를 진행해 주셨던 김철수 선교사는 앞으로 eKOSTA를 통해 코스탄을 만날 것이다. 그 준비를 위해, KOSTA 집회 기간에 행했던 김철수 선교사의 성경 강해를 2회에 걸쳐 요약하려고 한다.




들어가는 말


히브리서는 예수가 역사 속의 다른 어떤 영적인 인물들이나 혹은 우주의 그 어떤 영적 존재들보다도 왜, 어떻게, 얼마나 더 우월하신지에 대한 논의로 서신을 시작합니다. 결국 히브리서 기자의 논점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진정한 제사장으로 오셨다는 것인데, 그의 제사장 되심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율법의 계열을 뛰어넘어, 마치 율법이 미처 주어지기 전인 아브라함 시대의 멜기세덱과도 같은, 율법 위의 신적인(divine) 계열로 오셨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7장은 이 점을 아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그 요점은 모세의 율법에 지정된 제사의 법으로는 영원한 구원이 불가능하며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찌라” 7:19) 오직 예수의 제사장 역할만이 율법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히브리서 8장에서부터 10장까지는 예수의 오심이 구약(옛언약)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어떻게 하여 예수께서 구원을 완성하시고 우리에게는 확실한 보증이 되신 것인지에 대해서 논증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를 공부하게 되면 다음의 중요한 성경의 (신학적) 개념들을 심도있게 파악하게 됩니다. (히브리서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특별히 구약의 모세의 오경(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의 내용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신약의 로마서 역시 매우 중요한 참고서가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다음의 개념들을 명확히 밝힘으로써 복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1. 율법(모세의 율법, torah)은 무엇인가? 2. 율법에 의하면 제사장 및 대제사장의 역할은 무엇인가? 3. 옛언약(구약)과 새언약(신약)의 상관관계는 무엇인가? 4. 예수 그리스도는 이 언약들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인가? 5. 결국 복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6. 결과적으로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러한 연구의 질문들(research questions)을 염두에 두고, 히브리서 8, 9, 10장을 탐구하고 묵상하며 가슴에 복음진리의 말씀들을 새겨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8장 – 구약(옛언약)/율법의 기능과 구원


(1) 구약에 있어서의 제사장의 역할을 먼저 생각하여 보십시다. 제사장의 위치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왜 제사장이 필요하였습니까?


-  제사장의 위치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입니다. 즉, 중재의 역할이 제사장의 가장 큰 임무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 스스로 설 수 없는 “죄인”입니다. 자신을 창조하시고 주인되신 그 하나님과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선택된 백성의 특권을 갖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 조차도 반드시 누군가의 중재를 통하여서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12지파 외의 특별한 지파/부족을 하나님은 따로 세우셨는데 그것이 바로 레위 지파이며, 이 가문은 남성 전부가 제사장의 직무만을 수행하여야만 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모세의 5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참조해주셔야 합니다)


-  제사장의 임무는 히브리서 7, 8, 9, 10장에서 거듭 설명하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신분을 유지하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 매일같이 짐승의 희생의 피를 뿌림으로써 “대속 (대신 속죄)”의 은혜를 경험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죄의 사함은 오직 피뿌림의 희생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히 9:22).


-  제사장들 가운데 최고 대표자로서 대제사장이 있었는데 그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일년에 한번 “대속죄일 (Day of Atonement)”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여 그들의 죄와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성소의 맨 뒤에 있는 “지성소 (Holy of holies, 또는 Most Holy Place)”에 홀로 들어가 그동안 제사제도가 다 망라하지 못한 남은 죄들의 사죄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레 16:29-34; 히 9:1-10)


-  결국, 히브리서 7-8장이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속죄를 위한 언약인 율법의 제사제도는 모든 인간의 구원을 보증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은 오히려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2) 그럼 Torah 혹은 율법(Law)은 무엇입니까? 그 기능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구원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  율법은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다음의 구절들은 이를 명확히 해줍니다. (행 15:10; 롬 3:20, 28; 롬 4:15; 롬 7:6; 롬 8:3; 롬 10:4; 갈 2:16; 갈 3:5, 10-14, 21, 24; 갈 5:3-4; 딛 3:5; 히 7:11-12, 18-19, 28; 히 8:7; 히 10:1)


-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부터 “구출/구원”된 이후에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구원을 위한 방편이 아니라 구원하신 분과 구원 받은 백성들 사이에 맺어진 언약(covenant)입니다.


-   율법은 다음과 같은 목적으로 주어졌습니다.


  1. 하나님의 성품, 혹은 하나님의 의를 계시해줍니다. 모세오경, 특히 레위기 서가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입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신적 본질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완벽하게 깨끗하며, 흠이나 죄가 없으며, 영원토록 변함없는 사랑의 본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피조물과 온전히 구별된 신이심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의 죄와 불의에 대해서는 의로우심으로 나타나십니다. 다시 말하면 불의와 죄에 대해서는 진노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세의 오경을 비롯해서 오경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받은 모든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말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었기 때문입니다.

  2.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야 될 삶의 기준은 하나님의 거룩성과 의입니다. 율법은 끊임없이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성에 기초하여 모든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인간이 그렇게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정반대로 그렇게 살 수 없음을 가르쳐주기 위하여 끊임없이 율법의 의를 요구합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인간은 “하나님 수준의 의로움”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마태복음서에서 예수님 자신이 강력하게 설파하신 주제입니다.



    -  마 5:17-20 – 당시의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과 같은 종교성이 강한 자신들의 지도자들을 숭상하였고, 예수님이 그들의 유대전승을 따라서 율법을 “종교적”으로 지키지 않음을 보면서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율법을 주신 당사자로서 율법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날카롭게 지적해주시고 있습니다.

    -  마 5:21-47 – 신학적으로 antithesis라고 부르는 예수님의 예가 6가지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이 구약의 율법의 말씀의 원래 의도를 왜곡하여 가르쳤음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율법의 의도는 “신적 요구”입니다. 즉, 인간이 신의 요구 앞에서 불의함을 적나라하게 봄으로써 (심지어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구원을 이루게 해주는 것이 율법의 역할입니다. 그러한 의도를 가진 율법의 요구를 유대 지도자들은 종교적 도덕 수준으로 그야말로 “종교적 율법”으로 타락시켜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래 율법을 주신 분으로서 “저자 직강”을 통하여 이 점들을 신랄하게 지적하신 것입니다.


    -  마 5:48 – 예수님의 결론은 유대인들이 (나아가서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20절) 결국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 즉 “완벽하심 (perfect)”과 같이 완벽해야 한다고,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만큼 의로와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메시지입니다.

  3. 그렇다면 누가 과연 이러한 신적 의를 가질 수 있습니까? 아무도 그러한 의를 가질 수 없다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롬 3:10; cf. cf. 14:1). 율법은 오히려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지독한가를 보여줍니다. 인간의 성질은 죄성이라,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에 결코 순종할 수 없다는 것을 율법은 보여줍니다. (롬 8:3, 7-8절의 “육신”은 바울의 용법에 의하면 바로 이러한 인간의 본성/죄성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또한 율법 내의 내용에서도 이미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명기 28장 이하 31장까지를 자세히 보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주셨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신 31:16, 20, 27, 29).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전체 문맥에서 읽지 않고 “복받고 싶은 심리”에서 엉뚱하게 읽는 것을 잘 보여주는 성경부분이 또한 신명기 28장 1-14절입니다. 그러나 신명기 전체와 특히 28장 본문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맺는 “계약” 부분입니다. 이것은 조건적인 계약입니다. 즉, 율법은 조건 계약입니다. 오직 “만일 . . . . 하면” 기록된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축복의 계약부분은 저주 부분에 비하면 지극히 적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언약을 가리켜 모세의 율법 혹은 옛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cf. 출 19:5).

  4. 그러므로 율법, 즉 옛언약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항상 죄인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율법/옛언약은 인간의 죄를 드러내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 위해서는, 혹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의 문제를 “대속”을 통하여 해결하여 함을 율법은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 자체가 처음부터 한계를 전제하고 주어진 것입니다. 이제 히브리서는 이러한 율법/제사장의 역할이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5. 율법은 따라서 인간의 종교적 의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가르쳐줍니다.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인간이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대신하여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대신 “신적 의”를 가져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이 신적 의를 대신 가져다 줌으로써 우리를 죄인의 낙인에서 벗겨주어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즉,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을 알고 싶으시다면 고린도 후서 5장 2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cf.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3:21-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3) 결론
결국 율법으로서는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그것은 율법이 흠이 있거나 문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성때문입니다. 종교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인간의 죄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종교적인 노력도 인간을 죽음의 문제에서 구원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율법을 지킴으로써 인간은 또다시 자신의 의를 세우는 교만의 죄에 빠집니다 (롬 10:1-3). 그래서 바울은 율법이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이루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롬 4:15). 죄(죄성)가 기회를 타서 율법의 계명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속이고 그것으로 자신을 죽였다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롬 7:10). 그것은 인간의 죄(죄성)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율법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죽을 지경으로 만든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롬 7:13). 다시 말하면 인간의 본성으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즉, 구원이 불가능합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그 앞에 우리는 지극히 겸손히 하나님의 자비를 구할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위하여 율법 외에 그 구원의 길을 예비해 놓고 계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