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종 교수의 문화 탐구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고

언어의 의미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명시적이고 표피적인 외형적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함축적이고 개인적인 내포적 의미이다. 가령 ‘개’라고 말할 때 사전적인 의미에서의 개는 네 다리가 달린 짐승을 말하지만 개인에게 새겨지는 의미는 ‘냠냠’에서부터 ‘자식’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경험이나 이해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그리하여 앞의 의미를 객관적인 의미, 뒤의 것을 주관적인 의미라고 한다. 뉴스나 영화를 보면서도 여러 사람이 각자의 생각이나 가치관에 비추어 의미를 달리 새기게 되는 것은 바로 언어가 지닌 이중성을 말하는 것이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언어의 의미를 따져보게 되는 까닭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눈에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는데 있다. 신문에 난 기사도 믿을 수 없고, 사람들이 하는 말도 다시 한 번 새기게 되다 보니 정말로 나의 사고나 판단조차도 사실에 기반한 것인지 헤아려 보게 된다. 언론사 세무조사 발표가 있고 난 뒤, 조선일보 같은 신문은 아예 정부에 대한 저항을 선언하고, 언론탄압 음모에 맞서 의연히 싸울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정부가 얼마나 계획적으로 이번 일을 저질렀으며 조선일보는 얼마나 억울한 지를 여러 기사를 통해 말하고 있다. 반면 언론개혁에 초지일관 앞장 서 온 한겨레신문은 이러한 조선의 행위를 부끄러움도 잊은 후안무치적 행위라고 비난한다. 한 사건을 두고도 이토록 세상이 달리 보이는 것은 언론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식 대로 편집하고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언론이 자기 식으로 세상을 조립하는 방법은 대개 뉴스 거리의 선택, 축소 또는 확대, 그리고 재구성을 통해서이다. 즉 자기에게 유리한 정보만을 선택하거나, 확대하고, 불리한 정보는 축소함으로써 사건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보도하는 것이다.

조선과 한겨레 두 개 신문을 보고 있으면 세상에 어느 것이 진실인지, 어느 것이 왜곡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 지루한 싸움이 언제 어떻게 끝을 맺을지도 궁금해진다. 언론사 세무조사에 정부의 의도와 계획이 없었을 리 없고, 반대로 언론사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제멋대로 행사한 것도 사실이고 보면 언론개혁이 필요한 것은 사실인데 정부의 조처가 합당했느냐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다. 하지만 요즘 언론의 자사 이기주의는 해도 너무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어찌 국민을 담보로 신문을 사유화하고 지면을 제 멋대로 자사의 이해를 위해서 함부로 도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언론이 보여주는 폭력적 행태를 보면 권력의 전횡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새삼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 글에서의 주제는 언론의 전횡이 아니다. 요점은 이러한 전쟁이 어떻게 결론을 내릴 것인가 이다. 내년이면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고, 정부는 언론의 영향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어쨌든 여론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고 유포되는 길목에서 언론의 역할은 생각보다 크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기적인 이유로 나는 언론개혁이 정말 순수하게 언론개혁으로 마무리될 것이냐는 의문을 갖고 있다. 우리의 역사에 정말로 순수한 개혁이 있었으며 그것이 성실하게 매듭 지어졌는지, 이에 대한 기억 조차 없다는 것도 나의 생각을 뒷받침 한다. 짐작컨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언론과 정부는 어떤 식으로든 손을 잡게 될 지 모른다. 서로의 이해를 위해서 지금도 어는 곳에선가 물밑 회동이 이루어지고 있을 지도 모르겠고. 화가 나는 것은 내가 이러한 기만 행위에 속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신문기사 한 토막에 흥분하고 분노하며 안위하는 내 스스로가 웃긴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그 동안 모르면서 흥분하고 모르면서 분노하고 모르면서 절규한 일이 얼마나 되었을까. 정치도, 사회도, 학교도, 교회도 고개 들어 어느 곳 하나 기댈 데가 없다는 사실이 나를 절망케 한다. 이번 언론사 세무조사도 언론이 궁극적으로 개혁되는 데까지 이르지 못 할 것이라는 점에 더 답답함이 있고 절망이 있다.

돌아보면 지금도 우리의 눈을 가린 채 권력의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야합과 담합과 은밀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을까. 언론은 민중의 편이며 검찰은 과연 중립이며, 판사는 과연 법의 공정한 심판자일까. 의사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답게 아픈 자를 돌보고 죽어가는 자의 곁을 지키는 인류의 선행자일까. 교수는 정말로 학생을 가르치는 일에 평생을 바치며 헌신할까.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 대로 바로 서 있으며 목사는 과연 그 삶이 우리의 생각 만큼 투명하고 맑을까. 혹 교회에도 내가 모르는 일이 목사님들이나, 교회 간이나, 총회 간에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을까. 담합이 판을 만들고, 자신의 이해를 위해 모든 것이 조작되는 한, 오늘 세상을 사는 일은 정신 차린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눈을 부라려도 알 수 있게 되어있지 않다. 정보는 흐르는 길이 따로 있고, 그것에 소외되면 끝 없이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 어떤 일에도 수 많은 루머와 가십과 뒷 이야기가 많은 걸 보면 우리가 보고 있는 사실이 사실이 아닐 수 있고 우리가 믿고 있는 믿음이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떤 근거로 그토록 용감하며 그토록 자신이 있을까.

불신이 싹트는 사회에서는 말을 믿을 수 없게 된다. 교사의 말에 신빙성이 없으면 교육이 불가능하다. 목사님이 불신을 받으면 말씀에도 신뢰성이 떨어진다. 신뢰를 잃으면 결국은 인간 관계도 깨어지게 되어있다. 이 사회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말의 번지르르 함에 하나를 보태는 일이 아니라 적어도 내가 하는 말이라도 상대방이 믿을 수 있게 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작은 말부터 행동하고 믿게 하는 연습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바라건대 나는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들을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남의 말을 다시 한 번 곰씹어 보고 뒤집어 보고 상상력을 동원하고 그래도 믿을 수 없다고 고개를 흔들어 버리고 싶지 않다. 분명한 건 사람은 각자가 영민해서 누군가 자기를 속이려 하면 자신도 머리를 쓰게 된다는 점이다. 머리 쓰지 말고 말하고 머리 쓰지 말고 믿어 보자. 지금 우리가 이 사회를, 이러한 인간 관계를 치유하지 못 한다면 어떻게 이 세상을 아름답다고 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