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종 교수의 문화 탐구


사람분류법

고등학교 때부터 이과생에 대해서 이유없는 거리감이 있었다. 문과와 이과로 나뉘고 난 뒤 난 인문계와 자연계는 타고난 적성은 물론 인생의 목표도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이과생은 자기만 혼자 잘 살겠다고 편한 삶을 찾은 사람이고 문과생은 민족과 사회를 위해 큰길을 택한 사람이라는 말도 안되는 자부심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이과생은 어쩐지 쪼잔해 보이고 소심하다는 이미지도 만들어 냈다. 심지어는 수학과 물리는 이과 과목이고 국어, 영어는 문과 과목이라고 생각했다. 막연한 이유에서 비롯한 나의 편견과 오만은 결국 문과생과 이과생은 물과 기름, 또는 상이한 궤도를 달리는 기차처럼 영원히 다른 사람이라는 고정된 이미지로 자리잡아 버렸다.

문과 교수와 이과 교수가 한데 어울려 생활하면서 난 가끔 이 보이지 않는 벽이 아직도 내 안에 있음에 놀라곤 한다. 이과생을 만나면 우선 부수기 어려운 벽과 건너기 힘든 강이 있으리라 짐작을 해버린다. 어떤 문제를 두고 토론하고 해결을 도모하다가도 말이 통하지 않을 거란 결론을 전제하고 있어 길고 깊은 대화를 시도하기 보다는 쉽게 포기하고 체념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몇 년 전 일이다. 입시 면접 시험에 어떤 문제를 내는 게 좋을까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그 당시 세상을 한참 시끄럽게 하던 고교생들의 비디오 <빨간 마후라> 같은 시사문제를 내는 게 어떠냐는 이야기를 했었다. 어느 한 분이 대뜸 “장동휘, 박노식이 나오는 그런 영화를 요즘 아이들이 어떻게 아느냐”고 반문했고, 난 어이가 없어 신문도 안보느냐고 웃어 버린 기억이 있다. 다음 해에 다른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작년의 <빨간 마후라>를 예로 들면서 교수들이 시사에 민감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 자리의 분위기는 참으로 썰렁했고, 그 분들 중 누구도 두 <빨간 마후라>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다. 그때 나는 이들이 이과생이기 때문이라고 단정해 버렸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사실 이 문제는 문과와 이과의 차이라기보다 뉴스를 본 사람과 안 본 사람의 차이였을 뿐이다.

한번 길들여진 분류법은 좀체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정보조차도 선택적으로 받아들여 기존의 생각을 강화하는 것이 보통이다. 분명한 이유도 없이 자리잡은 사유체계는 그로부터 세상을 분류하고 사람을 구분하는 법이 되어 버린다. 하여 사람들은 의례 자기 식으로 생각하고 자기 시야만큼 보며 자기 그릇 크기만큼 세상을 퍼낸다.

세상과 사람을 구분하는 법 가운데서도 이분법은 가장 쉽고 편한 방법이다. 세상과 사람을 둘로 나누어서 간단히 정리해 버리기 때문이다. 어릴 적 영화를 볼 때면 나는 어느 나라가 좋은 나라고 어느 편이 나쁜 나라냐고 묻곤 했다. 하지만 이분법은 분류의 편이성은 있지만 무차별적으로 속성을 나누어버린다는 측면에서 문제점이 한둘이 아니다. 우리가 배운 학습체계가 이분법에 크게 의존하고 있음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학교는 물론 교회의 가르침도 이분법적인 체계를 따르는 경향이 많다. 선과 악, 남과 북, 하늘과 땅, 남자와 여자, 세상과 교회, 기독교인 비기독교인 등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와 완전히 속성이 구분되는 것처럼 나뉘어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그렇게 간단히 둘로 나눌 수 없는 것이 참으로 많다. 더군다나 그것이 사람을 대상으로 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문과와 이과의 경우에서처럼 물론 타고난 속성이 어느 한 성향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보다는 쉽게 무엇을 규정하고 오랜 시간동안 그것을 정당화하여 당연시한 우리의 안이함과 무감각이 더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요즘은 인간의 심성과 성격유형 등을 이리저리 나누는게 유행한다. 사주, 관상 등의 관심이 시들지 않는 한편으로 별점이니 혈액형이니 MBTI니 하는 것들이 사람을 규정한다. 그리하여 사람을 만나 그를 하나하나 경험하기 전에 그에게 붙여진 성격유형으로 그 사람을 규정해 버린다. 문제는 이러한 규정이 남에게 적용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규정해 버린다는데 있다. 성격 유형 검사를 끝내고 나면 학생들은 나의 직업은 무엇이고 내게 적합한 사람은 어떤 타입이라고 정한 해답을 들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 특히 어떤 운명론적 예감을 추종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그 정도는 더 심각하다. 이 방법을 따르게 될 때 가령 내성적인 사람은 결코 자신의 성격을 바꾸려 하지 않거나 타인과의 교류가 필수적인 사회생활조차 기피하는 경우까지 있다. 하지만 어떻게 사람을 성향별로 나누고 분류하고 그에 따라 인생을 설계할 수 있을까.

더구나 이러한 경향이 예언기도에 까지 이르면 그 정도는 매우 심각해진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태중에서 부터 정하셨다는 굳은 믿음이 때로는 우매한 자기 미신으로 빠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현실이 어렵다고 미래에 꿈을 두는 것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지나치게 추종하여 현실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자기 기만이다. 나의 인생을 결정하지 말자. 규정하지도 말고 한정하지도 말자. 나는 어떤 사람이니까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도 하지 말자. 지금 열심히 살고 그 결과는 주님께 맡기는 것 그것이 바른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