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의 숨은 그림 찾기


<라쇼몽>(羅生門, Rashomon)
승려와 나무꾼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감독 쿠로사와 아키라(黑澤 明, Akira Kurosawa)

개봉연도 1950년(일본)/1951년(미국)
등급 등급무(無) – 폭력, 성인용 주제
원작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각본 쿠로사와 아키라, 하시모토 시노부
촬영 미야카와 카주오

주요 등장 인물

산적 타조마루
무사 남편 타케히로
아내 마사고
나무꾼
승려
행인
무당




미후네 토시로
모시 마사유키
마치코 교
타카시 시무라
미노루 치아키
키치지로 우에다
후미코 혼마


사용자 삽입 이미지지난 1998년, 88세의 나이로 타계한 쿠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羅生門, Rashomon)은 1951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함으로써, 서구에 일본의 영화을 알리는 전기를 마련한 작품입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일본의 국가대표 감독, 쿠로사와의 절제된 영상과 언어는 관객으로 하여금 한 폭의 수묵화나 한 편의 시를 감상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합니다. 쓸데 없는 대사나 군더더기 장면이 없다는 말입니다. 나른한 오후, 나무 아래 산적 하나가 늘어져 낮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의 얼굴 위로 흔들리는 그림자 몇 조각. 한 줄기 바람이 나뭇잎을 흔듭니다. 산적의 얼굴 위에 살랑댑니다. 그 바람은, 지나가는 말 위의 신부가 쓰고 있던 베일 한 끝을 살짝 제칩니다. 순간 스쳐 지나는 신부의 얼굴. 아까까지 늘쩡거리던 사내의 눈에 반짝 기운이 돕니다. 그후, 남편이 산적과 사라진 후, 물가를 찾아 살포시 내려서는 여인의 발. 물과 희롱하는 여인의 조용한 흰 손. 서로 주고 받는 대사 몇 마디 없이, 이렇게 이야기는 그림을 따라 흐릅니다.

이처럼 아련한 여백의 미와 시적인 언어로 옷을 입힌 쿠로사와의 이야기가 서양 세계의 찬사를 받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독특하게 아름다운 영상도 영상이지만, 당대의 서양 지성들에게 “진리는 없다”며 진리의 상대성을 제기하는 동양의 ‘신선한'(?) 철학이 효과를 본 것입니다. 참고로 <라쇼몽>은 일본 내의 흥행에서 실패했을 뿐 아니라, 당시 일본의 비평가들은 이 영화의 베니스 그랑프리 수상에 대해서도 시큰둥한 반응이었다고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국내 흥행에 실패했지만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점에서, 작년 칸느 영화제 경쟁 부분에 초청된 임권택 감독의 <춘향>의 기록과 어쩐지 비슷합니다. 서로 다른 점이 두 가지 있다면, 하나는 수상을 했고, 다른 하나는 못 했다는 점. 상을 받은 후에도 <라쇼몽>은 자국 비평가들에게 여전히 찬밥 신세였지만, 초청을 받은 후 <춘향>은 국내 비평가들의 온갖 찬사를 한 몸에 받는 명작으로 갑자기 승격됐다는 점. 일본의 정서에 거의 무지하기 때문에 두 번째의 이유를 논한다는 것은 제 능력 밖의 일이지만, 쿠로사와가 수상한 이유는 알 것도 같습니다.

(지난 5월호 ‘사족’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국(異國)만의 전통성을 내세워 국제 무대에 선 영화는 일단 ‘독창적’이라는 점에서 유리할 수는 있으나, 그 내용에 있어 ‘보편성’을 결여한 주제를 강요한다면 그저 호기심 어린 시선을 모으는 것으로 그치기가 쉽습니다. ‘빈틈 없고 계산 빠른’ 쿠로사와는 시각적으로 일본의 전통을 수용한 그림에다 보편성을 담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선천적인 죄성, 자기 중심적 본성, 이기심 등, 인간 본연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는 한편으로, 동양 (불교)의 ‘자비’를 통해 휴머니티의 문제에 접근하는 시도를 했을 뿐 아니라, 2차 세계 대전 등 크고 작은 전쟁을 겪으며 자연스럽게 변모한 여성의 위상을 재조명하였던 것입니다. 즉, 일본 중세를 배경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쿠로사와가 그리고 있는 여성상은 전후 20세기의 여성입니다. 영화의 처음, 나약하고 순종적이던 ‘안개꽃’ 신부는 산적에게 육체를 유린 당한 후, (은장도를 꺼내 할복자살을 시도하리라는 관객의 예상을 뒤엎고) 결국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고 산적 뿐만 아니라 남편에게까지 복수를 할 만큼 당돌하고 능동적인 ‘억새풀’ 여성으로 변모합니다. 영화의 주제가 1950년대 당시의 시대 흐름과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난 1980년대 베니스 영화제에서 강수연씨가 임권택 감독의 영화 <씨받이>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것은 국제적으로 ‘대리모’ 논쟁이 한창이던 당시의 상황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할 것입니다.) 배경 음악에 있어서도 국제적인 감각에 일본의 고유한 맛을 곁들일 것을 이미 계산에 넣은 쿠로사와는, 라벨(Ravel)의 (그 유명한) <볼레로>(Bolero)를 일본풍으로 변주하여 중세 일본을 담은 그림을 따라 리듬감 있게 흐르게 함으로써, ‘친숙’하면서도 왠지 ‘낯선’듯한, 독특한 느낌의 스타일로 세계의 관객들을 찾아간 것입니다.

이 영화는 요절한 일본의 대표적 근대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1915년 문단 데뷔작 <라쇼몽>에서 영화의 제목과 소재, 그리고 배경을 따오고 그의 1921년작 <숲속>의 내용을 함께 엮어 쿠로사와 아키라와 하시모토 시노부가 각색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영화에 등장하는 나무꾼은 원래 류노스케의 <숲속>에는 없던 인물인데, 극적 효과를 위해 쿠로사와가 새로 만들어 넣었다고 합니다. 비록 나중에 첨가된 인물이긴 하지만 영화의 나무꾼은 ‘목격자’ 및 ‘문제 제기자’, 그리고 ‘제4의 진술자’로 ‘맹활약’을 하며, ‘자비’, ‘인간에 대한 신뢰’라는 영화의 결론을 이끌어 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비 내리는 라쇼몽에 쭈그리고 앉아 “모르겠어! 도무지 모르겠어!”를 되뇌는 나무꾼으로부터 영화는 시작됩니다. 그의 곁에는 똑같이 심각하고 혼란스런 표정의 승려가 앉아있고 지나가던 행인이 여기에 가세하는데, 나무꾼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느 화창한 오후, 한 무사와 그의 신부가 숲을 지나다 산적을 만나게 되고, 나무꾼이 무사의 시체를 발견합니다. 얼마 후 말에서 팽개쳐져 바닷가에 기절해 있던 산적이 잡혀 오게 되고, 절에 숨어 있던 신부가 끌려 나오고, 이어서 무당을 통해 죽은 무사 남편의 영혼까지 불려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산적이 무사의 아내를 강간했다는 것과 무사가 죽었다는 두 가지 명백한 사실만 빼놓고는, 이들 세 사람의 진술이 모두 엇갈립니다. 게다가,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알 수는 없지만, 서로 자기가 범인이라는 것입니다. 산적과 신부는 자기가 무사를 죽였다고 하고, 무사는 자살이라고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대부분 예상되는 살인 사건 용의자들의 증언이란 것이 “난 안 죽였다”일텐데, 서로 자기가 죽였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잡힌 이상, 어쨌든 곧 죽게 될 산적의 몸인데 사나이 기개나 세우고 죽자…. 어차피 이렇게 된 바에야, 여자로서의 자존심이나 지켜야지. 게다가 저 가증스런 남편을 한껏 욕되게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내가 명색이 무사인데 명예롭지 못한, 비굴한 내 죽음이 밝혀지면 이 무슨 망신인가…. 이 모든 진술들이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을 감추고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안 죽였다’고 하며 서로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것보다 더 수준 높은, 아니 아주 무서운 거짓말입니다. 그런 수준 있는 엇갈린 증언들을 놓고, 승려는 “더 이상 인간을 믿을 수 없단 말인가!”하며 또한 수준 있는 한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무꾼의 증언은 이와는 또 다릅니다. 법정에서는 이미 시체가 된 무사를 발견한 것 뿐이라고 진술했지만, 사실은 신부가 강간을 당한 직후부터의 사건을 전부 목격했다는 것입니다.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자를 ‘서로 안 갖겠다고’ 미루는 남편과 산적의 비굴함에 기가 막혀 하던 아내는, 남자의 허세를 교묘히 이용해 둘이 칼로 승부를 겨루도록 몰아 갑니다. 결국 산적의 칼에 남편이 죽고, 여자는 도망가고, 여자를 놓친 산적은 무사의 말을 타고 가다 말등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미스테리의 진상이라는 것을 알고 보니, 그다지 별 볼일이 없어 보입니다. 법정에서는 왜 그렇게 진술하지 않았느냐는 행인의 추궁에 나무꾼은 “괜히 사건에 말려들기 싫어서” 라며 말끝을 흐립니다. 그리고 처음 시작처럼 “모르겠어! 도무지 모르겠어!”를 다시 되뇌는 나무꾼. 인간성의 상실을 한탄하며 고뇌하는 승려. 둘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비가 그칠 때만 기다리고 있는 행인. 이 셋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비 내리는 라쇼몽에 갑자기 버려진 갓난아이의 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낼름 아이의 입은 것을 벗겨내고 지닌 것을 취하려는 행인의 파렴치한 행동에 나무꾼은 분노하지만, 행인은 ‘아이를 버린 부모나 또 나무꾼 너나, 다 나와 마찬가지로 파렴치한이 아닌가’라며 나무꾼을 조롱합니다. 약삭빠른 행인은 여인이 떨어뜨린 값진 은장도를 슬쩍한 것이 나무꾼이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입니다. 괜히 사건에 말려들기 싫어서가 아니라, 나무꾼은 그 은장도 때문에 시치미를 떼었던 것입니다. 이기주의는 인간의 타고난 죄성이라고 믿고 있던 쿠로사와는, 이처럼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4명의 인물들의 입으로 4번 반복해서 듣게 된 ‘서로 엇갈리는 강간과 살인의 진술’을 통해 진실의 상대성을 논하고 있습니다. 진실이란 인간들 각각의 이기적인 시각이나 소욕에 의해 왜곡될 수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낭패감과 수치심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무꾼을 한껏 조롱하고 행인이 유유히 사라진 후, 시간이 얼마나 됐을까. 어느새 빗줄기는 잦아 들고 나무꾼이 아이를 안으려고 하는데, 이제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 승려는 화들짝 놀라 그를 책망합니다. 애를 들어다 버리려는 줄로 안 것입니다. 하지만 승려는 아이를 데려다 자식처럼 키우겠다는 나무꾼의 말에 감격을 금치 못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고맙소. 당신 덕분에 인간에 대한 나의 믿음을 지킬 수 있게 됐소.” 이미 폐허가 된 라쇼몽이 상징하듯, 타고난 이기심에 의해 무너져 버린 인간의 도덕성이 아이에게 자비를 베푼 나무꾼을 통해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흔히들 말하기를 영화 <라쇼몽>의 이야기는 ‘해답이 없는 수수께끼’라고 합니다. 세상에 진실은 없다는 것입니다. 가해자인 산적의 말도, 피해자인 신부의 말도, 그 남편인 죽은 무사의 말도, 심지어는 나무꾼의 말도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이기심과 욕심에 의해 왜곡된 거짓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거짓 뿐인 세상에서도 각 개인의 의지(意志)만 꿋꿋하다면 인간의 존재는 가치있다고, 믿을 만하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한국에 있을 때는 명성을 직접 확인할 수 없었던 바로 그 <라쇼몽>을 미국에 유학 와서 드디어 볼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처음으로 영화를 보면서 내내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고 무릎을 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는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꽤 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터라, 그때까지만 해도 Humanism과 Christianity의 차이가 뭔지 분간 못할 만큼 제대로 알지도 못했었고, 그저 무조건 예수 믿고 (나름대로?) 착하게 살면 다 되는 줄 알았었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나서 개과천선을 했다는 생각에 내심 흐뭇하던 그때, 제가 감정이입을 했던 대상은 바로 한탄하던 ‘승려’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나무꾼’의 심정이 되어 이 영화를 봅니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지킬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맙다”는 승려의 말에 꿀먹은 벙어리처럼 아이를 받아 안고 서 있던.

적어도 나무꾼은 자기의 죄성을 절절히 깨달은 자입니다. 그랬기에 아무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인간성에 대한 신뢰나 휴머니즘을 운운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도 스스로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보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스스로는 의로운 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를 기준’으로 세상과 사람을 봅니다. 나도 이 정도로 쓸 만한데 설마 나만한 사람이 이 세상에 더 있겠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더 나아가 ‘자기 의’라는 것까지 갖추고 있다면 영화의 승려처럼 세상을 한탄하겠지요. “(나만 빼고) 이 세상은 왜 이런가?” 의아해 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교만한 죄성이나 이기적인 소욕에 따라 왜곡된다는 이 영화의 주제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해서 달라 보이는 세상이라면, 그 세상은 진실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죄인이구나!” 라는 절절한 깨달음으로 바라보는 세상. 각 개인의 의지(意志)가 아무리 꿋꿋하다고 해도 그리스도가 없는 인간의 존재는 무가치하다는, 인간이란 존재는 스스로는 믿을 수 없는 악한 존재라는 깨달음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바라보는 세상. 그것은 결코 거짓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므로 진리는 없다”가 아니라, “그럼에도 진리는 있으며 진리는 오직 하나”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8:21)
“우리는 다 양(羊)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53:6)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사2:22)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1:7)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1-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며칠 전 한겨레 신문에 실린 어떤 가수의 인터뷰 기사를 인터넷에서 읽고 웃음이 난 적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노래 잘하는 줄 알던 아마추어였는데, 지금은 노래 못하는 프로이다.” 나의 죄인됨을 철저히 회개하지 못하고 꽤나 괜찮은 사람으로 스스로를 착각하던, 그리고 여전히 (너무 자주) 그렇게 착각하는, 저를 가리키는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 가수도 크리스천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저는 승려보다는 나무꾼이 좋습니다. 어설픈 아마추어보다는 성실한 프로가 되고 싶습니다. 죄인된 내 모습에 날마다 절망하지만, 그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