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배낭 한 개만 달랑 매고 심산유곡을 헤매거나 유명하다고 하는 사찰이나 공동체를 순례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자유(LIBERTAS)’와 ‘진리(VERITAS)’를 찾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길을 떠난 사람은 많으나 자유와 진리를 찾은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 대부분은 길을 잘못 접어들었거나 가던 길을 멈추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저는 오늘, 구도의 길에 오른 모든 순례자들을 위해 남겨놓으신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것은“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는 말씀이며, 저는 이 말씀의 함축적 의미를 세 가지만 풀어보겠습니다.


첫째, 사람은 누구나 진리를 알기 전에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마음껏 추상적 세계를 날아다니지만 자기 논리와 이데올로기에 얽매여 있습니다. 유명하다는 종교인들은 과거의 짐은 훌훌 벗어 던졌는지 모르지만 아직도 관습과 전통의 쇠사슬에 꽁꽁 얽매여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진리가 없어도 자유롭다.”고 자신만만하게 외치지만 진리없는 자유가 얼마나 참혹한가를 아직 깨닫?못하고 있습니다. 탈 현대주의湄湧?“진리는 일종의 장난이야.”라고 냉소를 보내지만 게임이나 장난 같은 세상에서는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맛볼 수 없어 어둠 속에서 절규하고 있습니다.


그 만큼 자유라는 것은 인간에게 필수적입니다.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이라는 의미에서는 매일 먹어야 하는 밥만큼이나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도스토에프스키는 그의 [카라마조프 형제]에서 “우리를 마음대로 일 시켜도 좋소. 그러나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오.”라고 호소한 적이 있습니다.


철학적, 정치적 부자유(不自由)는 논외로 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모든 인간은 세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인간은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에 매몰되어 시류대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온갖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도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도 올가미와 같은 법의 멍에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법이 있는 한 불법과 형벌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또한 육체로부터의 자유도 없습니다. 아무도 육신의 정욕과 질병,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유를 찾다가 종종 깊은 함정에 빠지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유를 찾아 세상을 정처 없이 유랑해 보기도 하고, 자유를 찾아 결혼을 안 하거나 늦게 해 보기도 하며, 자유를 찾아 세상을 멀리하고 염세적으로 살아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유를 찾아 “될 대로 되라.”며 세상의 법을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보거나 제멋대로 신나게 초법적으로 살아봅니다. 어떤 사람은 자유를 찾아 엄동설한에 거죽 떼기 하나만 걸치고 움막 속에서 몸을 학대하며 금욕적으로 살아봅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자유를 향한 다양한 몸부림들입니다.


오늘날 영성이 뛰어나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유가 수도사적인 고행에 있다고 생각하고 모든 쾌락을 단절하고 자기 몸을 학대해 보기도 합니다. 그것은 마치 옛 영지주의자들처럼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Do not handle! Do not taste! Do not touch!).”는 모토를 외치며 사는 것과 같은 금욕주의입니다. 요즘 이런 자유를 향한 몸부림은 불교의 수행 방법이나 요가, 단학 등과 맞아 떨어져서 신비주의로 통하는 첩경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그런 방법으로는 죄를 어느 정도 억누를 수는 있을지 몰라도 죄를 이기지는 못하며, 오히려 자기숭배의 교만에 빠져 자학적이고 비인간적인 삶으로 떨어지기 쉽습니다.(골로새서 2:16-22) 잘못된 자유, 가짜 자유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참된 자유는 ‘진리’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자유의 출처는 진리이며, 자유의 독특한 성격이 있다면 그것은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토록 찾아 헤매는 자유는 수행이나 일탈이나 금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서 오는 것이며, 그것은 공짜로 그저 주어지는 선물이지 노력이나 수행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크테투스(Epictetus, 스토아철학자)가 “제우스가 나를 자유케 했다.”라고 한 말을 인용했거나 변형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셨다고 치더라도 그가 말한 ‘진리’라는 것은 ‘관념적인 진리’를 의미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지나친 상상이고 억설입니다.


여기의 “진리(αληθεια, veritas)”는 문자적으로는 ‘믿을만함’, ‘신뢰할 수 있음’, ‘진실’, ‘참됨’ 등을 의미하지만, 본문이 있는 요한복음에서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그리스인들이 그토록 찾고 찾던 “로고스(λογο??, 말씀)”로서의 예수님입니다. 그 분은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신 은혜와 진리가 되신 분입니다.(“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14:6) 2)그 분의 계시, 즉 예수님을 통해 나타내 보이신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기도 합니다.(“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7:17)


어느 것을 의미하던, 예수님 자신이 참 진리이시며 그 분의 계시 말씀이 진리입니다. 참 진리는 관념적인데 머물지 않습니다. 참 진리는 상대적이지도 않습니다. 참 진리는 인격적이며 절대적입니다. 그러므로 참 자유를 얻는 길은 육체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고, 진리와 권력을 해체하거나 진리를 일종의 게임으로 치부하는 일탈 행위도 결코 아닙니다. 참 자유의 출처는 오직 성경 계시의 핵심이시고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주시는 그 자유는 투쟁의 산물이 아니라 거저 주시는 일방적인 선물이며,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며,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이런 진리는 세상을 다 뒤져도 찾을 수 없는 참 진리요 자유요 생명입니다. 자유와 진리를 찾아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구도자들이 발을 멈추어 서야 하는 곳이 바로 예수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셋째, 진리를 “안다.”고 하는 것은 인격적으로 진리를 깨닫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의 “안다(Υνωσεσθε)”는 것은 경험적이고 인격적으로 친밀하게 아는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서로 사랑하는 처녀 총각이 아무리 서로를 잘 안다고 하더라도 결혼해서 성생활도 하고 자식을 키우면서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에 “안다”는 것은 부부간에 서로를 전인격적으로 깊이 아는 그런 앎을 말합니다.


이런 앎은 그리스 철학에서 말하는 이성에 의한 궁극적 실체에 대한 관념적 발견 정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앎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의 경지 혹은 대각(大覺)이나 신유학에서 말하는 마음을 비우므로 깨닫는 것과도 다릅니다. 그리고 이런 앎은 느낌과 감정에 사로잡히거나 경험적으로만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앎은 합리적으로 진리의 내용과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 이해한 것을 바탕으로 인격적으로 믿고 감정적인 결단과 행동이 동반되는 앎을 의미합니다. 즉 진리를 안다는 것은 예수님의 계시의 말씀을 지성적으로 이해하고 그 분과 그 분의 말씀을 전 인격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진리는 비몽사몽(非夢似夢)간에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 진리는 지적 자살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참 진리는 대부분 듣고 배우고 생각하고 하는 중에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때로는 토론과 논쟁 중에 깨달아지기도 합니다. 혹은 직장이나 부엌에서 일상생활을 하는 중에도 진리는 깨달아집니다.


그러나 한 번 진리가 깨달아질 때는 마치 엉킨 실타래가 풀리듯이 꼬였던 모든 문제들이 술술 풀리는 전 인격적인 변화의 경험이 있습니다. 이런 앎은, 부처님이 열반 한 후에 도를 깨닫고 오도송(悟道頌)으로 불렀던 [마하박가]에서 “나는 모든 것을 이겼고 모든 것을 알았다.”고 외친 것과 다릅니다. 이런 앎은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부력’을 발견하고는 “휴레카((ευρηκα, 찾았다, 이거다)”라고 함성을 질렀던 것보다 더 감격적이고 가슴에 사무치는 변화입니다.


이런 앎은 옛날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가에서 빛 가운데서 들려오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인생을 바꾼 바울과 예수님의 전인격적인 만남이며, 빌립보 성의 루디아가 전도자 바울의 말을 듣고 “마음이 열려”, 즉 세계관이 바뀌어 인생의 참 주인을 만난 참된 앎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 안팎에서 진리를 아는 것보다 느끼는 것을 더 중시하는 실존주의적이고 탈현대적인 경향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데 그 위험이 우려할 만한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이 “내가 느끼는 것이 곧 진리이다.”고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물론 신앙은 지성이면서도 동시에 체험적이기 때문에 실존적인 느낌을 도외시해서는 곤란합니다. 기독교는 지성적이며 동시에 체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어느 날 우연히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에 대한 신앙이 진리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무엇인지 찾고 두드리다가 그것이 진리의 기준에 맞고 사실이라고 판단되면 인격적으로 믿고 맡겨야 합니다. 믿되 단지 지식적으로나 감정적으로만 신뢰할 것이 아니라 전 인격적으로 수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고통을 다 아시는 인격적인 분이시므로 당신이 전 인격적으로 반응하시기를 지금도 기다리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