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예수님을 잘 믿던 학생들이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이제는 더 이상 기독교를 믿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성경의 이적 기사들은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역사 속에 꾸준히 제기되었던 종교와 과학, 신비와 지성, 그리고 계시와 철학이라는 두 개념 사이의 갈등과 의심입니다. 이것을 보통 ‘신앙과 이성의 문제’ 혹은 ‘믿음과 지성의 문제’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기독 지성인들과 구도자들에게 중요한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기독교에 지성을 무시하자니 신앙이 맹신으로 전락할 것 같고, 신비를 무시하자니 사색이 신앙으로 둔갑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둘 사이의 관계와 긴장은 진리를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테마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는 지성이 왜 신앙에 중요한지 그 이유를 몇 가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지성은 성도의 성화에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로마서 12:2)고 부탁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은 예수님을 믿으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개혁해야, 즉 기존의 세계관을 뒤집고 새로운 세계관을 가져야 가능합니다. 기존의 신념과 의식의 변화가 없이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신념과 의식의 변화는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며 성령 안에서 의지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교인들에게 단회적인 혁명이 아니라 지속적인 변화를 촉구 했습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4:23-24)


그리고 ‘성도(聖徒)’가 된다거나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은 지난날의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지식’으로 거룩한 생활을 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말하기 때문에 지성의 변화는 매우 중요합니다.(골로새서 3:10) ‘회개 한다’는 것은 단지 죄를 몇 마디 뉘우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하여 생각한바 실재의 본질, 인간의 본질과 그의 반역 그리고 역사 속의 하나님의 목적 등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는 것입니다. 머레이(J. Murrey)가 이점에 대해 잘 지적했습니다. “성화(그리스도인의 삶)는 인간 의식의 중심, 즉 사고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혁명적인 변화의 과정이다. 왜냐하면 의식과 사고가 바뀌지 않고는 성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우리는 종종 예수를 오래 믿어도 사람이 변화되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는데, 혹시 사고와 신념 그리고 의식의 변화는 하나도 없는 거짓 성화를 좇고 있는 것 때문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둘째, 신앙과 지성이 통합되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노력하지 않으면 신앙과 지성이 따로 놀기 쉽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앞의 학생과 같은 지적 의심에 노출된 에베소 교회 교인들을 생각하고, “믿는 것과 아는 것을 하나 되게 하라”(에베소서 4:13)고 부탁했는데, 여기의 ‘하나 되게(unifying)’란 말은 1)부부가 한 몸이 되듯이 2)그리스도와 성도가 하나로 연합하듯이 우리의 신앙과 지성도 주님의 말씀 위에서 통합하라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 된 사람을 두고, 비록 그 사람이 예수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더라도, “장성한 사람” 즉 성숙한 신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세상 풍조에 흔들리지 않고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 믿은 지가 오래 되었다고 하더라도 믿는 것과 아는 것이 따로 노는 사람을 “어린아이 같은 사람”, 즉 미성숙 신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세상 풍조에 이리저리 요동하고 흔들거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신앙과 지성이 하나가 안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지성은 의심의 파도를 이기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의심의 파도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주로 기독교의 신비성(神秘性)이 합리성(合理性)과 대립된다거나, 기독교의 초월성이 과학적 사고와 충돌한다고 생각하거나, 신앙에는 완벽한 합리적 증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내적인 영적 전쟁에 휘말린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꼬인 문제를 지적으로 이해하고 납득하기 전에는 파도타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런 의심의 파도를 타는 사람들이나 그런 사람들을 돕는 지도자들은 제일 먼저 합리성의 반대 개념은 비합리성이지 신비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기독교의 신비성은 이성을 뛰어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성에 반대되거나 거스르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기독교는 합리성과 신비성이 공존하는 진리인데 그것은 기독교 복음 자체가 지성적이며 동시에 체험적인 진리이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17; 사도행전 26:15) 바울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단지 표적이나 능력 때문도 아니요 지혜나 지식 때문도 아니라 표적과 지혜, 능력과 지식 그 둘이 다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하되,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 전합니다. 이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고린도전서 1:22-25, 표준새번역)


물론 여기에는 신앙과 지성 사이의 선행(先行) 문제, 즉 어느 것이 앞서느냐 하는 것은 토론의 여지로 남아 있습니다. 아마 어떤 사람은 “믿음이 지식에 선행한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고(요한복음 6:69), 또 어떤 사람은 “지식이 믿음에 선행한다.”고 말할 것입니다.(요한복음 16:30; 18:8) 프란시스 쉐퍼는 “구원론적으로 볼 때 지식이 신앙에 선행한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없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비약’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