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때부터 대학원에 졸업하기까지 수많은 선생님들을 거쳤다. 교회에서도 많은 목사님 그리고 전도사님을 거치면서 신앙 생활을 해왔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생각나는 선생님이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다. 학교 선생님 중에서 특히 생각나는 분은 중학교 일학년 때 선생님이 하시는 일을 무엇인가 도와 드리고 우리 학생 두 서너명에게 선생님이 빵 집에 가셔서 수고 했다고 빵을 사주셨던 생각이 난다. 중학교 2학년때 선생님 사모님이 돌아가셔서 우리 학생들을 대표하여 집에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 대학교 때에도 많은 교수님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 기억에 남는 분은 년초에 세배하고 집에 가서 밤을 새우고 놀고 온 우리 학교 선배 교수님이 생각난다. 미국에 와서도 한국에 다니러 가면 그 교수님 댁을 찾아 뵙고는 하였다. 미국에 와서 신학교에서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많은 교수님을 만났지만 집에 초대해주시고 개인적으로 식사를 함께 하고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져주신 클린톤 교수님이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다. 클린톤 교수님은 많은 지도자들을 연구하시고 내린 결론 중에 하나가 효과적인 지도자들은 사람들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사역의 수단이자 목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가르침에 있어서 비공식적인 관계와 만남이 교육의 중요한 통로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그러하였고 사도바울의 가르침도 그러하였고 오늘날에도 많은 훌륭한 교사들이 그러하다.

내가 학교에서 학교의 사역을 평가하는 연구를 담당하면서 학생들에게 질문하는 것 중에 하나가 학생들이 교수님들에 대하여 얼마나 가깝게 느끼는가 얼마나 개인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고 느끼는가를 연구한다. 그리고 학생들이 교수님들과 친밀하게 느끼게 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 교수와 학생간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을 때에 교육의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수님들에게 학생들의 기도 제목을 받아서 기도해주도록 권면하기도 하고 식대를 대주어서 학생들과 만남의 시간을 갖도록 권장하기도 한다. 개인적인 관계는 효과적인 사역의 수단이기도 하고 그 자체가 아주 중요한 사역이기 때문이다.

그 전에 학생부 전도사로 사역할 때에 나는 작은 교회에서 사역을 하였기 때문에 늘상 아이들에게 라이드를 주고는 하였다. 토요 성경 공부 시간이던 주일 예배 시간이던 아이들에게 전화를 하고 집으로 데리러 가는 것이다. 그러면 차 안에서 교회를 오 가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신학적이거나 신앙적인 중요한 애기들만 한 것은 아니지만 그 시간을 통하여 아이들과 친밀하여 지고 아마도 아이들에게는 주일날 내가 열심히 준비하였던 설교들보다 차안에서 나와 함께 한 시간들이 더욱 기억에 남을 지도 모른다. 지금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하면서 어떻게 우리 학생들과 비공식적인 개인적인 관계들을 맺어 갈 수가 있을까를 다시 한번 고민하면서 어쩌면 나의 가르침의 사역이 교실 안에서의 강의보다도 그런 관계들을 통하여 더욱 지속적인 영향을 남기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러면 어떻게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것인가 몇 가지만 살펴본다.

 

첫째, 학생들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한번은 클린톤 교수님의 강의를 통역하고 일부는 내가 직접 강의를 하였다. 85 가량의 학생들이 수강하였고 학생들을 다섯 그룹으로 나누어 나는 중에 구룹 (박사과정학생들 18 가량) 지도하였다. 강의 마지막날 그룹 지도자들과 식사하는 도중에 갑자기 클린톤 교수님께서 자기 그룹 학생들의 이름을 다섯명씩 대보라고 도전하셨다. 어떤 사람은 다섯명의 이름을 대고 어떤 사람은 대지 못하였는데 나도 4명까지 밖에 대지 못하였다. 여러가지 핑계가 있지만 결국 많큼 학생 한사람 사람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는 이야기다. 한편으로 부끄럽고 교수생활에 익숙해 지면서 초심을 잃어가는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

 

둘째로, 학생들의 숙제에 정성이 들어있는 피드백을 주어야 한다. 학교에서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페이퍼를 자주 내도록 숙제를 내고 있다. 숙제를 내면 받아서 피드백을 주어야하는데 시간에 쫒겨서 일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마음에 깊은 부담감이 늘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학생들의 입장에서 숙제를 정성껏 내면 피드백을 기대하기 마련인데 알면서도 많은 일들에 쫒겨서 일을 감당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요사이 우리 아들 정민이가 학원에 다니면서 매일 일기를 적어서 내는 숙제를 해야한다. 매일 저녁에 일기를 쓰도록 도와주는 일도 쉽지않다. 그런데 학교 선생님이 어떤 분은 정민이의 일기 숙제를 정성껏 고쳐주는 분이 있는가 하면 어떤 선생님은 그냥 했다고 스마일만 표시해주는 선생님이 있다. 정민이 엄마가 선생님의 반응을 보면서 정성껏 해주는 분을 좋아하는 같다. 나도 물론 그렇고 교사가 사람으로써 반드시 가져야할 태도라고 생각된다. 말로만 학생들을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는다고 것이 아니라 숙제 하나하나를 정성껏 읽어주는 실제적인 도움의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세째, 학생들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교사는 여러명의 학생들을 대하기때문에 일률적으로 대하기가 쉽지만 학생 한사람 한사람은 다르다. 학생들의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교육을 해야한다. 오늘날 교육학계에서 배움의 스타일 이론이 많이 부각되고있다. 사람마다 배우는 스타일이 다르다는 것이다. 정민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에 교생실습을 하던 대학생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하나씩 맏아서 한학기동안 관찰하고 학생의 배움의 스타일에 관하여 리퍼트를 하였다. 그래서 정민이에 대한 리포트를 받아보았는데 나의 아들이지만 객관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학생듸 독특성을 고려한 교육이 되어야하지 일률적인 방법과 기준에 따른 교육은 때로 학생들을 발전시키기 보다는 좌절시킬 있기때문이다.

 

네째, 학생들을 사랑해야 한다. 특별히 기독교 교육에서는 학생이 교회의 성도님이건 학교에서 학생이건 하나님께서 우리 사역자에게 맡겨주신 양들인 것이다. 우리 사역자의 첫번째 그리고 마지막 궁극적인 의무는 그들을 주님께서 사랑하셨듯이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의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들 한사람 한사람이 목적으로 대해지고 사랑해야 한다. 그 학생들을 사랑하는 것이 궁극적인 교육사역인 것이다. 최근에 이중표 목사님의 책을 읽었는데 말씀하시기를 영적 지도자는 무엇보다도 성도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성도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마치 부모가 자녀에게 젖을 먹일 때에 자신을 먹이는 것이 듯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부가 골방에서 사랑을 나누고 유방으로 아이들을 먹이듯이 영적 지도자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속에서 사랑으로 충만하여 영적 자녀들인 성도들에게 자신을 주는 사랑으로 양육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적 지도자가 성도들을 정말로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그가 지적하기를 목회자들이 성도들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정말로 사랑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는 이 문제를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목사의 행복이란 교인들에게 자기 존재 전부를 내어줄 때 맛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목사는 목회를 하면서 끊임없이 자기가 양들에게 지금 무엇을 주고 있는가에 대해 스스로 진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 목회 현장에 가보면 진짜 어머니의 심정으로 목양하는 곳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자신이 나름대로 교인들을 충분히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양무리를 맏은 자에게 주어지는 진지한 도전이 아닐수없다.

 

다섯째, 학생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사랑의 시작이자 궁극적인 표현이다. 우리의 사랑이 부족하기에 우리는 그들을 온전히 사랑하시고 또 그들에게 최선을 허락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 나아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할 때에 또한 우리는 학생들의 이름도 기억할수있게되고 학생들을 이해하게 되고 관심을 가지게 되고 학생들을 사랑하게 될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무엘은 맏겨진 양무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않게 해달라고 간구하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