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고 있는 분들을 관찰하여 보면 나이나 지위에 상관없이 끊임없이 배우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배움의 자세는 자신의 현재 상태에 안주하거나 과거의 것을 가지고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연구하는 자세이다. 우리 월드미션대학교의 임동선 총장님도 연세가 많으시고 그 동안의 연륜이 풍부하셔서 그저 옛날에 공부하신 것과 본인께서 경험하신 것을 나누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지금도 한번 설교를 위하여 또 한번 세미나를 위하여 늘 연구하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또 내가 존경하는 어느 목사님은 늘 메모하시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일상의 대화 중에서도 배움의 가치가 있는 것은 곧 메모지를 꺼내어 적으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한 두번은 이렇게 하기가 쉽지만 꾸준히 배우는 자세로 메모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효과적인 지도자는 늘 배우는 자세를 갖는다.

 

우리는 배움이라고 하면 꼭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과 학위를 위하여 공부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배움의 전당인 학교에서 학위를 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최선의 배움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학교에 가지 않더라도 독서를 통하여, 주위에 여러 선배들과 동료들을 통하여, 혹은 후배와 제자들을 통하여, 또 우리의 삶을 관찰하고 살펴봄을 통하여 늘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 어떤 의미로는 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중요한 것들을 많이 배울 수가 있다. 중요한 것은 학교를 다니고 있는가 보다는 배우고 성장하고자 하는 열정과 열려진 마음이 있는가이다.

 

최근에 한 목사님의 온유함에 대한 설교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 목사님은 온유함을 여러 가지로 설명하면서 배움에 열려 있는 자세가 온유함의 중요한 측면이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대화를 할 때에 Selective Listening을 한다.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는 다르게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을 듣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에 많은 문제가 생긴다. 부부간에 대화를 할 때나 설교나 강의를 들을 때 우리가 듣고 싶은 것을 걸러 듣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온유한 사람은 열려진 자세로 남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온유해야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게 되는데, 첫째로는 나도 모르는 것이 있다는 의식을 갖고, 둘째로는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열려진 자세를 가져야 진정으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Selective Listening의 반대는 Teachability이다. 배움에 열려 있는 자세인 것이다.

 

최근에 다산 정약용에 관한 책을 읽다가 좋은 도전을 받았다. 신유한이 사신을 수행해 일본에 갔다가 견문한 일을 적은 해사견문록 이라는 책을 읽고 다산 정약용은 매우 안타까워 했다. 일본에 사신으로 갔으면 일본인들이 원나라 세조의 10만대군을 물리칠 있었던 군사 제도나 한옥보다 밝고 따뜻한 주거제도 등을 살펴서 것이지 그러지는 않고 일본 사람의 복식이 얼마나 야만스럽고 그들의 문화가 어찌나 해괴하며 조선 사신의 행차에 굽신대며 그림과 글씨를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극성스러운지에 대한 것이나 적어와서 무슨 가치가 있는가 하는 안타까움이었다. 정약용은 그의 글에서 공연히 일본 사람을 얕잡아 보고 그들을 야만이라 헐뜯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자랑이 되고 보탬이 되겠는가? 하고 질문하였다. 그는 또한 말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이 표류하여 일본에 이르면 저들은 모두 새 배를 건조하여 돌려 보내 주었다. 그 배의 제도가 절묘하였는데 배가 이 곳에 도착하면 우리는 왜놈이 만든 배는 재수없다고 모두 부쉬버려 그 방법을 옮겨 오려하지 않았다.”고 안타까워 하였다. 기회를 갖고도 배움의 자세를 갖지 못하여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지적한 것이다. 한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도 개인의 발전을 위해서도 배움의 자세는 중요하다. 배움의 자세에 대하여 몇가지 생각을 정리해 보면,

 

첫째, 우리는 주위에 탁월한 사람이 있으면 겸손하게 훌륭한 점을 인정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남의 장점을 보고 그것을 배우기 보다는 남의 단점에 집중하여 그를 무시하고 우리 자신은 그저 나태하게 있으려 한다. 장점보다는 단점에 집중하여 무시함으로써 우리가 배우고 성장해야 하는 의무를 태만히 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게으름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스스로 속이고 있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어떤 사람을 극복하고 보다 앞서 나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으면 사람을 진정으로 존경하고 훌륭한 점을 따라서 배울 때에 진정한 의미로 극복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겸손히 배우려기보다는 일단 비평을 먼저함으로써 배워도 이유를 먼저 찾는 같다. 사람의 훌룽한 점을 깍아내림으로써 혹은 사람의 훌륭하지 못한 점에 집중함으로써 사람을 이기고 극복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을 무시하고 깎아내림으로써는 피해갈 있을 절대로 사람을 진정한 의미로 극복할 수가 없다. 우리가 누구를 극복하고 보다 앞서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사람의 좋은 점과 훌륭한 점을 찾아서 인정해주고 겸손하게 배워야 하는 것이다. 오직 배움을 통해서 성장을 통해서만 남을 극복할수 있다.

 

세째, 우리는 과거의 학업적 성취와 능력에 집착하고 현재에 새로운 배움에 대하여 열려있지 않는 경우가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의 나이와 지위와 성취가 아니라 배움에 대한 열려진 자세이다. 우리의 쓸데없는 자존심, 비교 의식, 그래서 배움의 자세를 갖지 않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현재 자신의 위치에 대하여 진정한 의미의 만족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에 대한 진정한 감사가 있을 때에 다른 사람에 대한 건강한 존중을 있다. 내가 오늘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배우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생각하고 그들에게서 훌륭한 점을 찾아 존경하고 배움의 자세를 가져하겠다.

 

풀러 신학교의 Robert Clinton교수는 성공적인 삶을 산 지도자들을 연구하여 일곱 가지 특징을 발견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효과적인 지도자들은 전 삶을 통하여 배우는 자세를 견지한다 (Effective leaders maintain a learning attitude throughout life)”는 것이다. 70노인이라도 배움에 온유하게 열려있는 사람은 30대 청년이고 30대 청년이라도 배움에 열려있지 않고 귀를 막아버리는 사람은 70노인이다. 우리가 일생을 늘 살면서 배움에 열려진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