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고문을 당하면서까지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민주화 운동의 대부이자, 신념과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몇 안되는 정치인으로 일컬어지는 김근태 씨의 죽음이 많은 이들에게 추모열기를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한편, 김근태씨의 죽음앞에 눈물흘리면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 지금은 목사가 된 이근안 경감입니다. 많은 분들이 고문기술자로 이름을 날리던 이런 사람이 어떻게 기독교 목사가 되었냐고 황당해 하며 분노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동시에 저는, 기독교인이 되고 목사가 되면서 오히려 이근안이 자신의 과거에 대해 뻔뻔해진 부분도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이근안이라는 인물은 단순히 나쁜놈을 넘어서 상당히 상징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관련자료: 김근태 ‘예술고문’한 이근안, 지금은 목사?
http://blog.donga.com/sjdhksk/archives/10028





예를 들어 2005년 여주교도소에 면회를 온 김근태씨에게 그는 용서를 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김 상임고문은 당시 사죄하면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씨를 보고 진정성이 의심돼 차마 “용서한다”고 말하지는 못한 채 “당신을 용서하는 마음을 갖고 이 자리에 왔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2006년 11월 복역이 끝나고 출소하면서 이근안은 “사회에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며 “그 시대엔 애국인 줄 알고 했는데 지금 보니 역적이다. 세상사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분명한 회개나 진정성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적극적으로 자신을 합리화하지는 않았다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2008년 이근안은 목사안수를 받고 이후 간증집회를 다니면서 보다 뻔뻔하게 자신의 과거를 합리화 하는 발언들을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같은해 한 보수 단체가 주최한 외교 안보 포럼에서 그는 “내가 직접 조사해 간첩 혐의로 형을 받은 범죄자들이 버젓이 국가 기관에 의해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돼 한없는 좌절감을 느낀다”며 “나 자신이 한 사람의 피해자가 됐다”고 말했습니다.
2010년 한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는 “당시 시대 상황에선 고문이 애국이었다”고 밝히면서,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굳이 기술자라는 호칭을 붙여야 한다면 ‘심문 기술자’가 맞을 것 같다. 논리로 자신을 방어하려는 이와 이를 깨려는 수사관은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인다. […] 그런 의미에서 심문도 하나의 ‘예술’이다”라고 했고, 김근태씨에 대한 전기고문에 대해서도 “내가 취미삼아 만든 모형 비행기 모터에서 ‘AA 건전지 2개’를 가지고 겁을 준 것뿐”이라 하며 부인했는데, “두 시간 넘게 말로 겁을 주고 건전지로 찌릿찌릿한 감각만 느끼게 해서 실토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김 상임고문을) 신문해서 단 몇 시간 만에 노동계와 학원에 침투한 조직을 캐내 전원 검거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다시피, 김근태씨는 1985년 20여일간 8차례의 전기고문과 2차례의 가혹한 물고문을 당해 그 후유증으로 평생 비염과 축농증을 앓았고 2007년 파킨슨병 진단도 받았습니다. 이근안은 이미 재판을 통해 확인된 고문에 대한 사실마저도 왜곡하고 있는 것이지요.



사람의 윤리적 판단은 주변사람들이나 자신의 준거집단의 반응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 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과 세리 삭개오의 만남에서 그가 자신의 사회적 악행을 돌아보고 배상을 하겠다고 한 것은 사람들의 ‘수군거림’ 이후였죠. 저는 이근안이 이렇게 대담해 진 것에는, 그가 분명한 사회적 회개를 하지 않았는데도 그에게 목사안수를 준 교단의 책임이 있고, 또한 주변에서 그의 행위를 ‘간첩과 좌파를 때려잡은 애국 행동’으로 합리화 해준 기독교인들의 영향이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것이 무고한 민주인사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한 이근안의 죄 보다, 더 무서운 죄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한 언론보도에 따르면 신학대학원 졸업을 앞둔 이 씨에게 대학 총장은 목사 임직을 시켜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고, 신학교 내부적으로 토론을 벌여서 “목사 임직 허가였지만 정치 활동을 안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고 하며, 이 씨 스스로도 교정선교회 활동에만 충실할 것을 약속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근안 아니라 그보다 더한 죄인도 회개해서 새 사람이 될 수 있고, 목사도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혁명성이죠. 그러나 그 전에 분명히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자기로 인해 고통받은 사람에게는 사죄하고 할 수 있는대로 배상하도록 하는 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회개이며, 교회는 이것을 가르치고 점검해야 합니다.

신학교에서는 정치 활동을 안하는 조건을 달았다고 하는데, 문제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분명한 회개 – 개인적 회개 뿐 아니라 사회적 회개- 를 하지 않은 이근안에게 목사안수를 주는 것 자체가 엄청난 정치적 선언(즉, 기독교는 사회정의에 전혀 관심이 없고 독재정권하의 고문행위를 죄로 보지 않는다는)이라는 것이고, 이제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 하는 이근안의 발언들 자체가 엄청난 정치적 행위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종을 키워낸다는 신학교와 교단에서 이런 사회적 상식조차 없다는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근안은 예수교장로회 합동개혁측 총회신학교 통신신학부 4년 과정을 옥중에서 밟았고, 현재 예장 합동개혁(총회장 정서영 목사) 소속 목회자, 그리고 한국교정선교회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단순화된 복음의 문제와 사회적 차원의 결여, 그리고 그 결과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기독교의 회개와 복음을 개인의 윤리적 차원, 그리고 하나님과의 일대일 관계만으로 축소시킨 현재 보수기독교의 신학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원죄사건을 보면 죄의 결과는 아담과 하나님과의 관계 뿐 아니라 다른 인간과의 관계(아담과 하와),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아담과 땅) 모두를 파괴시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문제는 개인적인 차원, 하나님 과의 관계 차원 뿐 아니라, 인간관계,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관계 모두에서 회개와 회복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죠.
온전한 용서와 회개에 관해, 김영봉 목사(워싱턴한인교회)는 다음과 같이 설교한 바가 있습니다. “기독교가 성서를 바탕으로 가르쳐온 용서는 그렇게 값싼 것도 아니고, 무책임한 것도 아닙니다. 정통 기독교 신학에서는 온전한 용서가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회개의 3R(Three R’s of Repentance)이라고 부르는데, 첫째가 Repentance(회개), 둘째가 Restitution(보상), 그리고 셋째가 Reformation(개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repentance이며, 자신이 끼친 잘못에 대해 어떻게든 보상하는 것이 restitution이고, 다시는 그런 잘못을 하지 않도록 자신을 고치는 것이 reformation입니다. 이 세 가지가 갖추어져야 온전한 회개입니다.”

 
영화 ‘밀양’은 이 문제의 정곡을 찌르고 있습니다. 주인공 신애는 자신의 아이를 유괴해서 죽인 범인이 옥중에서 예수를 믿고 자신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며 환하게 웃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영화 밀양과 몰트만의 강의를 다룬 글을 하나 추천합니다. 특히 첨부된 가해자와 피해자의 문제에 대한 몰트만의 강연내용은 꼭 읽어볼 만 합니다.

박치현, 영화 <밀양>의 질문에 세계적 신학자는 뭐라고 대답할까?
http://blog.daum.net/ursangelus/8484652


중요한 것은 4영리식의 단순화된 복음은 개인적 차원의 영적 회개만으로 가해자에게 쉽게 면죄부를 주고,피해자에게 너도 똑같은 죄인이니 아무말 하지 말아라 하면서 정의의 회복을 무시한다는 것이죠.

한번은 미국 TV에서 살인죄로 복역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한 죄수의 인터뷰를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열심히 다른 죄수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그는, 성경이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한다 하면서, 살인을 저지른 자신의 죄나, 평소에 거짓말 하는 일반인들의 죄나 다르지 않다고, 아주 대담하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말이 일견 복음적인 것 같으면서도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든 것은, 만일 거짓말 한 사람이 회개하면서 내 죄가 살인죄나 다르지 않다고 하면 이해가 가지만, 살인한 사람이 내 죄가 거짓말한 사람의 죄와 다르지 않다고 한다면 이건 미친소리이기 때문이지요.
최근에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여성성희롱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킨 강용석 의원을 변호하면서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는 성경 말씀을 인용해 물의를 빚은 바 있습니다. 이 말이 감동을 주기는 커녕 코메디 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 시대 가장 낮은 성매매 여성을 불쌍히 여겨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힘과 권력을 가진 국회의원의 성희롱을 무마하자는데 사용되었기 때문이지요. “이 정도 일로 제명한다면 우리 중에 남아있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라는 말도 했다는데, 이는 마치, 우리 정치인들이 다 썩은걸 몰랐냐, 이정도 일로 왜 놀라고 그러냐라는 윤리의식의 실종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결국 단순화 된 왜곡된 복음은 죄에 대한 깊은 회개가 아닌, 오히려 뻔뻔함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단순화된 신학 뿐 아니라 역시 역사의 무게가 실려 있는데, 일제시대 신사참배의 죄와 군사독재를 직간접적으로 지지했던 보수교회의 죄를 감추고 합리화 하기 위해, 복음의 사회적 차원을 거세해 버린 교회의 역사가 그 뿌리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가르치는 회개나 구원은 예수님이 가르친 복음의 보다는, 중세시대 면죄부에 훨씬 가까운 것이죠.


중세시대 면죄부가 교회가 윤리적 경제적 권력을 갖기 위해 남발 된 것처럼, 이러한 값싼 용서가 보편화 된 것은, 권력에 밀착하려던 보수교회의 욕망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것처럼 교회 자체가 신사참배와 군사독재협력의 죄가 있어서 뒤가 구릴 뿐더러, 교회가 경제적 정치적 권력을 가진 이들을 흡수함으로서 영향력을 갖고 싶어 했던 것이죠. 동시에 권력을 잡고 있는 친일파와 군사독재세력은, 보수교회가 제공하는 종교적 장치를 통해 세상의 부귀영화 뿐 아니라, 양심의 가책으로부터의 자유, 집사 장로등으로 상징되는 종교적 권위, 그리고 내세의 구원까지 누리게 되어 양자의 필요가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약간 다른 이야기 이지만 한홍구 교수의 글에 따르면 이근안의 고문기술은 일제시대 악질 경찰로, 독립군을 고문했던 노덕술에게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다음 글 참고.          이근안과 박처원, 그리고 노덕술 http://h21.hani.co.kr/section-021075000/2001/05/021075000200105220360052.html )

결국 왜곡된 신학과 사회적 죄들은 상호작용하며, 정의를 배신한 자들이 교회안에 들어왔을 뿐 아니라 이제는 교회의 주류가 된 것이죠. 그리고 이들이 가진 ‘친미반공 자본주의 정신’이 예수의 복음을 대체해 보수 기독교의 핵심적 가치와 원리가 되어버립니다. 이른바 ‘고소영 강부자’의 종교가 되어 버린 ‘기득교’의 탄생입니다.
 
물론 ‘친미반공 자본주의’가 반드시 나쁘다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반미용공 반자본주의’가 좋다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세상의 다양한 현상들을 이 두가지로 재단할 수 있다고 보는 그 ‘단순무식성’, 그리고 친미반공자본주의로 판단되는 것은 무조건 옳다고 우기고, 반대로 반미용공반자본주의라고 낙인 찍은 것은 무조건 악으로 몰아세울 수 있는 ‘마녀사냥적 태도’가 엄청난 문제를 야기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전 미국에서 살고 있는 교포 몇분과 대화를 한 적 있습니다. 신앙생활 열심히 하시는 교회 장로, 집사님들이었고, 인품도 좋으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대뜸, ‘서울시장이 된 박원순은 빨갱이다’라는 무지막지한 말을 하셔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보시냐 했더니 복지예산을 펑펑 써서 나라가 망할 거라는 거였습니다. OECD 30개국가중 복지예산이 거의 최하위를 달리는 대한민국인데, 복지예산을 올려서 나라가 망한다는 얘기도 황당할 뿐더러, 서울시민 다수가 뽑은 시장을 너무나 쉽게 빨갱이라고 하는 발언도 정말 놀라웠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나라는 곧 망해아 맞겠죠. 한미FTA반대나 촛불시위도 무조건 빨갱이라고 해서, 여쭤보니, 반미, 반자본주의기 때문이랍니다. 많은 주류 경제학자들도 ISD 문제 등, 현재 진행되는 한미FTA는 문제가 많다고 하고, 국익 차원에서도 득보다 실이 많다는 비판이 있는데, 반대의견을 단순히 ‘빨갱이’라고 매도할 수 있다는 그 ‘사고 프레임’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친미반공 자본주의로 판단 되는 것은 무조건 선이요 아닌 것은 악이라는 단세포적 사고가 아무런 문제 없이 표출될 수 있는 것이 보수기독교인들의 논리라는 것이지요. 이런 얘기를 밖에서 하면 단순 무식하다는 얘기를 들을텐데, 보수 교회안에서 얘기하면 놀랍게도 ‘아멘’이 나온다는 겁니다.


이근안이 연결되는 지점도 이것입니다. 이근안의 행위는, 민주화 운동가들이나 간첩으로 지목된 무고한 사람들을 불법으로 고문한, 기본적 민주주의와 인권을 무시한 악행이라는 ‘상식’ 보다도, 간첩이나 좌파를 때려잡기 위해서는 그정도도 괜찮다는 친미반공 자본주의의 프레임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관점에서 그의 행위는 ‘애국’이 되며 국민들의 비난으로 가졌던 약간의 반성이나 수치심 마저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보수기독교의 프레임이 이근안에게 뻔뻔함과 용기를 주는 것이죠.


잘 아시다 시피, 이러한 프레임은 미국내 근본주의 보수 기독교에도 유사하게 작용합니다. 무식한 발언들로 웃음거리가 된 사라 페일린을 하나님이 이 시대의 에스더로 세웠다는 예언이나, 오바마는 이슬람교도 혹은 사회주의자이고 미국에서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근거나 상식이 무시된 주장들이 아주 잘 통하는 것이 미국의 근본주의 보수기독교이지요.

한국의 보수 정치세력이나 언론(한국으로 치면 한나라당과 조중동, 미국은 공화당이나 티파티, 폭스뉴스 등)도 이렇게 단순무식한 논리를 내세우지는 않습니다. 물론 생각은 다르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그럴듯한 논리를 만들어서 사용하지요. 하지만 보수 기독교가 보이는 이러한 단순무식한 입장은, 보수 정치세력과 보수 언론에 가장 큰 지지와 동력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근본주의 세력의 특징이 바로 인간의 삶과 사회적 현상의 복잡성을 인정하지 않는 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아주 조악한 신학적, 사회적 프레임을 가지고서 타인의 삶과 사회를 판단하려 들고, 나는 답과 진리를 알고 있다라는 태도로 접근하기에 세상의 조롱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역시 충격적이면서 상징적인 사건 하나가 2010년 한국에선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6월 22일 개최된 평화 기도회에 간증 강사로 미국의 전 대통령 ‘조지 부시’를 초청한 사건입니다. 이라크 전쟁은 그 명분이 되었던 대량살상무기와 테러조직과의 연계성은 끝까지 발견되지 않았고 사담 후세인이 제거된 것 외에는 그 결과가 너무나 참혹했습니다. 미군과 다른 연합군에서 사망자가 7500명 이상 발생했고, 최근 참전 미군들 중 전쟁후유증으로 많을 때는 하루에 18명씩 자살 한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이라크 측에서는 자그만치 백만명 이상의 희생자가 나왔다는 통계가 있고 180만명 이상이 난민이 되었다고 합니다. 충분한 증거도 없이 그러한 전쟁을 밀어붙여 이러한 참혹한 결과를 가져온 부시를 평화기도회에 주 강사로 초대한 것은, 개인적으로 마치 한편의 ‘거대한 부조리극’, 혹은 슬픈 코메디를 보는 듯 했습니다. 이에 항의하러 갔던 기독청년들은 “당신의 평화에는 너무 많은 피가 흘러”라는 팻말을 들고 갔는데, 일부 보수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평화라는 것이 내가 십자가를 져서 화해와 용서를 가져오는 예수의 평화가 아닌 힘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키고 희생자를 만들어 유지되는 로마의 평화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만듭니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어떤 삶을 살든 자기 스스로 거듭난 그리스도인(born-again Christian)이라고 하면 만사 오케이라는 우리의 회개에 대한 관점도 잘 보여주고, 또한 친미반공 자본주의의 틀로 얼마나 세상을 단순하게 보는지도 잘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박사과정생으로서, 그리고 미국에서 6년정도 체류하면서 느낀 것은, 정말 안타깝게도, 사회에서 가장 지적 수준이 떨어지고, 정치적 사회적 분별력이 가장 낮은 집단이, 바로 한국과 미국의 근본주의 보수기독교인들이라는 점입니다. 보수 기독교의 사회적 죄악을 합리화 하고, 또 교회 안에서 목사의 절대권위를 확립하기 위한 우민화 정책의 결과, 이것이 이제는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무지와 독단의 사회적 동력’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결국 상식을 가진 일반인들이 볼 때, 말도 안통하는 기괴한 집단, 즉 “괴독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선배는, 최근 페이스북에서 이근안과 관련해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인용한 바 있습니다. 그 책에서 아렌트는 2차 대전중 유태인 학살주범으로 1962년에 처형된 아돌프 아이히만이 알고 보니, 개인적으로 지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지적하며 ‘악의 일상성’을 설명하는데, 개인의 도덕만을 다루고 사회적 분별력이 없는 인물들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잘 지적해 주었습니다.


비슷한 인물로 박정희 시대에 ‘차지철’이라는 사람은 아시다시피 독재권력의 하수인으로 충성을 다했는데, 그는 개인적으로 교회 집사였고, 종교적인 이유로 술을 마시지 않아서 자신이 충성해 마지 않는 박정희가 주는 술도 거절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술 마시지 말라는 기독교의 개인윤리에 충실한 사람이 독재정권의 오른팔 노릇을 하다가 총맞아 죽었다는 것이지요. 또 다른 예로 전두환의 오른팔이었던 ‘장세동’이라는 인물은 청문회때 자신의 가방에 늘 성경을 가지고 다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고 교도소에 있을 때도 교도관이 감동할 정도로 매일 성경을 묵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광주 학살의 주범중 하나였고, 박종철 사망사건, 그리고 한 가족을 억울하게 파멸시킨 수지김 간첩 조작사건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목사가 된 이근안 경감이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교회 장로인 ‘그분’까지, 결국 이들은 권력과 결탁하고 복음을 왜곡시킨 보수교회가 낳은 ‘괴물’들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 예의, 그리고 기본적인 사회 정의에 대한 의식도 없는 집단으로 이해 받는 보수 기독교는 이제 ‘개독교’로 불리웁니다.



결국 오늘의 문제는 보수 교회가 사회참여에 관심이 없다는 수준이 아니라, 그리고, 빛과 소금으로서 사회의 어둠과 악을 정화하는 역할을 못한다는 문제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일부 근본주의 보수 교회들이 뿜어내는 오염이 사회를 심각하게 어지럽히는 수준이 된 것입니다. 저의 지적이 과하다고 생각하시거나 불편하신 분에게는 죄송하지만, 현실은 이런 제 표현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이 솔직한 생각입니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보수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프레임인 ‘단순화된 복음’과, ‘친미반공 자본주의’를 금과옥조로 하여 세상을 마녀사냥하는 정치적 프레임’을 깨고 나가지 않으면 기독교의 미래는 암울합니다. 한기총으로 대표되는 근본주의 보수기독교회의 행보가 언제나 언론에 크게 보도되기 때문에, 예수님을 길을 고민하고 사회의 개혁과 정의를 바라는 교회들 모두가 싸잡아서 “개독교, 괴독교, 기득교”로 치부되고 있고, 이러다가는 역사와 국민들로부터 버림 받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예전에는 기독교인들과 교회의 선한영향력을 소망했기에 우리가 잘하면 세상이 바뀐다고 믿었다면, 이제는 근본주의 보수 기독교가 사회에 끼치는 악영향이 너무 크기 때문에, 역시 동일하게 우리만 잘해도 세상이 바뀔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간적이었고 원칙을 지키려던 또 한명의 바보정치인 김근태의 죽음과, 그를 고문했던 이근안 경감의 뻔뻔함을 보면서, 오늘의 교회를 다시한번 고민해 봅니다.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고, 웬만한 분들은 한번 쯤 생각해 보았을 부분이지만, 답답한 마음에 2011년이 저물어가는 이시간에 긴 글을 남겨 봅니다.
2012년은 새로운 희망의 해, 예수님의 이름이 영광받으시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