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조지아주에서 아내와 함께 살면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는 이인엽이라고 합니다. 2009년 코스타에 처음으로 참석했었는데, TM 코스타에서 강의를 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했었습니다. 그때 국가주의와 그리스도인: 평화를 위한 우리의 역할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었고, 강의안을 정리해서 올리기로 eKOSTA에 약속드렸었는데, 분량이 너무 길어져서 마무리를 못하던 중, 이번에 블로거로 초대해 주셔서, 앞으로 정기적으로 글을 올려보려고 합니다. 지난번 강의안으로 부터 시작해서, 성경을 읽으며 전공인 국제정치를 공부하면서 고민 했던 것을 정리해 올리는 글이 될것 같네요. 제가 신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전공분야에서도 아직 기초를 다지는 중이라, 이렇게 글을 올려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신앙과 세상을 함께 고민하는 하나의 시도로 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소 딱딱하거나, 정치적인 견해차이가 있을 수도 있는 점 또한, 다양성 차원에서 이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들어가며>  


 


    이런 류의 강의를 할때 제가 주로 시작하는 도입 질문중의 하나가, ‘이라크 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당신이 당시 대한민국의 정책 결정권자라면 (파병 여부에 대해)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입니다. 이 질문에는 국가의 이익과, 윤리라는 두 가지 변수가 중요할 텐데, 국가 이익이 있다고 가정할 경우, 크게 세가지 정도의 답변을 들을 수 있습니다. 1. 파병을 통한 국익도 있고 이라크 전쟁이 윤리적으로도 정당하기에 찬성한다. 2.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국익을 생각해서 찬성한다 3. 국익이 있더라도 윤리적으로 옳지 않기에 반대한다.


     이 질문을 할 때마다 놀라는 것은 비기독인은 물론이고, 상당히 많은 기독인들이 두번째, 즉 현실주의적 선택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더라도, 결국 국익이 최종 선택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보수나, 진보보다도 강력한 담론은, 현실주의 혹은 국익 우선주의가 아닌가 생각 해 봅니다. 실제로 노무현 정부하에서의 이라크 전쟁 파병 결정, 한미 FTA 체결과, ‘경제 살리기를 내세웠던 이명박 정부의 집권과 정책들 뒤에는, 공통적으로 이러한 국가이익(경제와 안보에 있어서의 물질적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현실주의적 논리가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쉽게 말해서, ‘올바로, 정의롭게, 평화롭게 살아보세보다는 잘먹고 잘 살아보세가 아직도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이는 국내적으로는 애국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그리고 국제적으로는 자국 중심주의, 일방주의, 패권주의와도도 연결된다고 봅니다. 크게 보자면, 미국의 일방주의 외교정책, 남북한과 중국, 일본 등에서 나타나는 민족주의적 경향, 그리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 등도 이러한 논리로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접하는 많은 사회문제의 기저에는, 그리스도인이 국가를 어떻게 볼 것인가, 국가이익이라는 강력한 이슈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자리잡고 있는데, 특히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안에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고민이나 논의가 별로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로 신앙을 개인의 차원으로 국한하는 이원론적 관점이나,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국가에 대한 충성이 언제나 일치한 다는 관점, 혹은 하나님 잘 믿으면 우리 나라가 잘 된다는 축복론적 입장 등이 암묵적으로 우리의 사고를 지배해 온것이 아닌가 싶은데, 과연 이런 관점이 성경적인가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살면서 미국 그리스도인들의 사고와 정치적 역할의 문제점들을 살펴봤을 때도, 역시 이 문제가 가장 근본적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앞으로 몇 회에 걸쳐, 이에 대한 논의와 고민들을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주제는 대략 아래와 같고, 인용한 성경은 표준새번역을 썼습니다.


 


(1) 가나안 정복과 이집트 심판에 대한 오해


(2) 혈연 공동체 vs. 언약 공동체


(3) 율법의 정신을 대표하는 희년 제도


(4)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약의 윤리와 선지자들의 비판 전통


(5) 신학의 문제: 이원론과 콘스탄틴 주의


(6) 국가의 기원과 그 속성. 권력의 악마성과 그 대안. 


(7) 정치적 권위에 대한 두 가지 왜곡된 생각 


(8) 국제관계에서의 정의: 제국의 정신과의 충돌


(9) 예수님의 삶, 십자가의 영적 의미와 정치적 의미


(10) 성령의 역사와 해방적 함의


(11) 뒤틀려진 기독교


(12)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요한계시록


 


(1) 가나안 정복과 이집트 심판에 대한 오해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는 구분되는 개념이지만 많은 경우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국가주의가 정치 조직과 구조에 기초한다면, 민족주의는 인종과 문화에 기반한다고 하겠죠. 한국처럼 비교적 인종적으로 단일한 국가라면(이 부분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고 최근에는 외국인 노동자 유입을 비롯해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만), 두 개념이 중첩되고 서로 강화하는 형태를 띌 것이고, 미국처럼 다인종 사회 같은 경우, 인종보다는 문화와 정치조직이 더 중요시 될 것입니다. 하지만, 두가지의 공통점은, 자기 집단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자기애와 자기 중심성의 확장이라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것이 왜 나쁘냐고 물을 수 있겠으나, 문제는 그것이 애국 애족을 넘어, 우리를 ‘선’으로 타자를 ‘악’으로 규정하는 차별과 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하고, 또한 내부적으로는, 전체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약자의 희생을 정당화하고, 내부의 비판세력을 억압하며, 집단의 비민주성을 합리화 하는데 악용될 소지가 언제나 있다는 점입니다.


     먼저, 이러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부분을 성경의 관점에서 한번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구약의 역사 중, 출애굽기와 여호수아서에서 나타난 이집트 심판과 가나안 정복은 많은 경우 이스라엘에 대한 민족주의적, 인종주의적 관점으로 읽혀져 왔습니다. 실제로 유럽의 기독교인들과, 흑인노예제 및 흑백차별제도하의 미국 남부 기독인들은, 노아의 세 아들 중 함이 저주받은 일화를 이용해 인종차별을 합리화 하기도 했고, 미국 역사 초기에 일어난 엄청난 숫자의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들의 학살에 대해서도, 당시 미국의 기독인들은 가나안 정복이야기를 통해 합리화 했습니다. 최근에도 미국의 보수적인 목사들 중에는, 이라크 전쟁이나 대 테러 전쟁을 ‘이스마엘의 후손 대 이삭의 후손’의 전쟁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것이 과연 위의 인종주의적 오류들과 얼마나 다른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민족, 혹은 국가의 수호신으로 왜곡하고, 이를 넘어서 폭력이나 학살을 합리화하는 데까지 성경의 가르침이 악용 될 수 있다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한편, 사랑의 하나님이 이집트의 모든 장자를 일순간에 쳐서 죽인이야기나, 어린아이와 가축까지 모조리 없애라고 하신 가나안 정복의 이야기는 현대를 사는 기독인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상당히 힘든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이유로 많은 기독인들은, 구약은 신약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자라고 하거나, 이를 영적인 싸움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하거나, 아니면 위에서 언급했던 역사적 오류들처럼, 이를 민족주의나 패권주의 적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이 부분에 대해 고민을 하면서 성경과 신앙서적들을 살펴보았는데, 나름대로 아래와 같이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먼저 위에서 열거한 민족주의적 성경해석의 오류를 풀어주는 성경구절들을 몇가지 소개해 보겠습니다.


 


[ 15: 13-16]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똑똑히 알고 있거라. 너의 자손이 다른 나라에서 나그네살이를 하다가, 마침내 종이 되어서, 사백 년 동안 괴로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의 자손을 종살이하게 한 그 나라를, 내가 반드시 벌할 것이며, 그 다음에, 너의 자손이 재물을 많이 가지고 나올 것이다. 그러나 너는 오래오래 살다가, 고이 잠들어 묻힐 것이다. 너의 자손은, 사 대째가 되어서야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아모리 사람들의 죄가 아직 벌을 받을 만큼 이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 18:24-29] 위에서 말한 것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저지르면, 이것은 너희가 스스로를 더럽히는 일이니, 그런 일이 없도록 하여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낼 민족들이, 바로 그런 짓들을 하다가 스스로 자신을 더럽혔다. 따라서 그들이 사는 땅까지 더럽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악한 땅을 벌하였고, 그 땅은 그 거주자들을 토해 내게 되었다너희는 모두 내가 세운 규례와 내가 명한 법도를 잘 지켜서, 온갖 역겨운 짓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범하지 않도록 하여라. 본토 사람이나 너희와 함께 사는 외국 사람이나 다 마찬가지이다. 너희보다 앞서 그 땅에서 살던 사람들은, 이 역겨운 모든 짓을 하여, 그 땅을 더럽히고 말았다. 너희가 그 땅을 더럽히면, 마치, 너희보다 앞서 그 땅에 살던 민족을 그 땅이 토해 냈듯이, 너희를 토해 낼 것이다. 누구든지 위에서 말한 역겨운 짓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범하면, 백성은 그런 짓을 한 그 사람과는 관계를 끊어야 한다.


 


    먼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창세기 말씀은, 하나님이 가나안 주민들에 대해 이스라엘의 수호자가 아니라, 공정한 열방의 심판자로서 접근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 하나님이 아브라함 때에 그 땅을 줄 수도 있었지만, 사대를 걸쳐 기다려야 했는데, 그것은, 가나안 원주민들의 죄가 그 땅에서 쫓겨나거나 멸망 당할 만큼 차고 넘치지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여호수아 정복 시기에는 그들의 죄가 관영했음을 알 수 있는데 심지어 수간이나 인신제사 같은 극악한 죄악이 만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8:1-23) 결국,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히 그들이 민족적으로 이방민족이거나, 하나님을 안믿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의 기준에서 그들의 악이 멸망과 땅에서 토함을 받을 정도에 이르렀기에 심판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군시기나 제국주의 시기에 주장된 것처럼, 단순히 원주민들이 이교도들이기 때문에 죽여도 된다는 논리는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지요. 만약 그런 논리가 맞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외에 모든 민족을 멸망시켜야 하셨어야 할텐데, 성경은 오히려 이스라엘을 통해 만민이 구원을 경험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선민사상에 어두워 그 소명을 감당하지 못한것 뿐이지요. 그러므로 가나안 주민들은 단지 이스라엘에게 땅을 내주기 위해 없어져야 했던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죄 때문에 멸망당한 것이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서 그 심판을 수행했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 하나님께서는 너희도 같은 죄를 범하면 멸망당한 가나안 원주민들과 동일하게 땅에서 토함을 당할 것이라고 이스라엘에게 경고하고 계시는 점입니다. 이 경고는,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루어져서, 가나안 못지않은 죄를 범한 이스라엘은 처절한 심판과 포로됨을 경험하게 됩니다. 결국 그 땅은 이스라엘에게 무조건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거주민이 하나님의 뜻과 언약에 따라 ‘살아갈 때’, 거주할 권리를 갖게 되는, ‘언약의 땅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민족적, 인종적으로 이스라엘만을 편애하시고, 가나안 족속을 무고하게 멸망시키시고, 이집트백성들을 죄 없이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거주하던 시기, 그는 가나안족속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었고(창23장), 야곱과 요셉 시기에도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우호적인 관계를 가졌습니다(창47:1-12). 그들이 인종적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고 볼 근거가 없다는 것이지요.
    
모세의 인도 하에 출애굽 할 때 일어난 이집트에 대한 심판을 살펴보면, 이집트에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서 그들이 당시 약자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강제노동과 영아살해와 같은 극악한 범죄를 저질렀고, 그들을 보내라는 하나님께 명령에 불순종했다는 점을 주목해 봐야 합니다. 전 이집트의 장자들이 하루아침에 죽임을 당하기 이전에, 이미 이스라엘의 남아들은 태어나는 족족 죽임을 당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은 ‘압박자와 피압박자’, ‘가해자와 피해자’, ‘강자와 약자’사이에서 일어난 것이지, 인종적 차이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이사야서 19장의 이집트에 대한 심판의 경고는 다음과 같은 회복과 구원의 예언으로 끝납니다.


 


[이사야 19:21-25] 주께서는 이렇게 자신을 이집트 사람에게 알리실 것이며, 그 날로 이집트 사람은 주님을 올바로 알고, 희생제물과 번제를 드려서, 주께 예배하고, 또 주께 서원하고 그대로 실천할 것이다. 주께서 이집트를 치시겠으나, 치시고 나서는 곧바로 어루만져, 낫게 하실 것이므로, 그들이 주께로 돌아오고, 주께서는 그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을 고쳐 주실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이집트에서 앗시리아로 통하는 큰길이 생겨, 앗시리아 사람은 이집트로 가고 이집트 사람은 앗시리아로 갈 것이며, 이집트 사람이 앗시리아 사람과 함께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이스라엘과 이집트와 앗시리아, 이 세 나라가 이 세상 모든 나라에 복을 주게 될 것이다. 만군의 주께서 이 세 나라에 복을 주며 이르시기를나의 백성 이집트야, 나의 손으로 지은 앗시리아야, 나의 소유 이스라엘아, 복을 받아라하실 것이다.


 


     결국,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의 역사는, 열방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정의의 차원으로 해석되어야 하지, 민족적, 인종적인 차원에서의 폭력과 학살을 합리화할 근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스라엘이 심판 받은 역사에서 나타나듯이 하나님은 말씀을 모르고 범죄하는 이방인과 싸우시지만, 말씀을 알고도 지키지 않는 이스라엘과도 처절하게 싸우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많은 신학자들이 말했듯이, 하나님의 칼은 양날의 칼이요, 하나님의 전쟁은 이방과 이스라엘 모두를 향한 정의의 전쟁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타락하고 나서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 점령당하고 포로되는 장면을 보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리도 잔인하실 수 있는가를 묻지만, 그 전까지 이스라엘 사회에서 나타난 총체적 타락상 성적타락과 부정직이 만연하고, 희년을 지키지 않고, 가난한 자를 압제하고 노예로 부리고 팔아버리며, 뇌물을 받고 불공정한 재판을 하고, 하나님이 아닌 군사력과 강대국을 의지하고, 이방종교와 우상을 섬기는 을 살펴보면, 심판받을 당시의 이집트나 가나안 원주민이 보여준 타락과 포악의 정도에 뒤지지 않음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심판이 공정할 뿐더러, 오히려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신 하나님의 오래참으심이 놀랍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결코 한 민족의 수호신이 될 수 없으며, 기독교의 사상은 왜곡된 민족주의, 인종주의, 파시즘, 제국주의, 패권주의, 일방주의와 근본적으로 충돌합니다. 과거 많은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와 이익을 위해 불의한 인종차별과 학살, 전쟁등을 합리화 하고자 했고, 이에 발맞춰 일부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는 악을 저질러 왔습니다. 자신들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관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장하고, 성경을 그에 맞춰 왜곡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과 그분의 정의를 더럽히는 심각한 죄일 뿐더러, 정의와 공평을 기대했던 많은 이들을 교회와 복음으로 부터 멀어지게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 다음 글에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보는 두가지 관점 (혈연적 공동체 vs. 언약적 공동체)을 소개하고 비교해 볼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