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과 인간이해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기초 (3)


1. 문화와 세계관
2. 세계관이란?
3. “문화화(enculturation)” 과정과 세계관의 형성


4. 세계관의 역학적 기능


이번 호에서는 이제 “문화화”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세계관이 구체적으로 사람들의 사고 속에서 어떻게 역학적으로 기능을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용어들과 개념들이 중요한 것은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분석하는 데에 필요한 도구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기본적인 용어들을 독자들이 잘 익혀 두었으면 한다.


세계관은 문화의 심층 구조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다분히 무의식적인 정신 세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철학적이나 역사학적 세계관과 달리,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세계관은 어느 사회든지 나름대로 공유하고 있는 “집단 지식”이라 말할 수 있다. 이미 앞에서 말한 대로 이러한 지식들은 구태여 증명할 필요 없이 당연히 믿고 있는 지식들이며, 모든 종류의 사회적 삶은 이러한 지식이 전제된 상태에서 영위되는 것이다. 곧, 지난 호에서 언급한 바 있는 세 가지 주요 내용들, 즉 믿음/전제(前提)들(beliefs/assumptions), 가치들(values), 그리고 충성/헌신(allegiance /commitment) 등이 세계관의 내용이 된다. 이 구분은 Fuller 대학의 Kraft 교수의 것인데 이러한 세 가지의 구분은 인간 “지, 정, 의”의 인격 부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제들이 주로 문화적인 지식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가치들의 부분은 사람의 감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충성 내지 헌신은 인간의 의지를 필요로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 가지 세계관의 요소들은 따로 독립적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인간의 한 인격 속에서 서로 섞여서 동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을 좀 더 설명해 보자.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배운 대로, 즉 “문화화”된 대로 믿는데, 이러한 믿음들을 우리는 “전제(assumption)”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전제들을 기초로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전제들에는 이성적인 앎과 감성적인 느낌이 함께 포함된다. 문화화 과정을 통하여 사람들이 얻게 되는 지식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뿐만 아니라 어떻게 느낄 것인가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어떤 것이 바람직하고 어떤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가를 배우게 되는데, 이때 바람직한 것들에 대하여서는 좋은 감정을 갖게 되고 바람직하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서는 좋지 않은 감정들을 갖게 되는 것까지도 배움, 즉 문화화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물들 혹은 사건들에 대한 이해는 그 인식의 대상에 대한 감정을 동시에 수반하게 된다. 이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그들의 가치 기준에 근거하여 그 나름대로 선과 악을 분류하고 대부분 선이라고 믿는 바들을 추구한다. 이렇게 자신들이 믿는 중요한 가치들 혹은 선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를 동원하게 되어 있는데, 이러한 인간의 사고 역시 세계관 전제의 한 부분이다. 이것을 Kraft 교수는 “충성” 혹은 “헌신”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즉, 충성의 대상이 무엇인지 역시 문화화 과정을 통하여 배우게 되며, 그 대상들을 사람들은 은연 중에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인간의 내면 속에서 함께 가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동안 우리는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분리하여 생각해 온 경향이 크다. 특별히 지성과 감성은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여겨졌는데, 이러한 경향은 지난 약 이 백년 동안 서구 사회에 편만하였던 서구의 세계관의 영향에 기인한다. 18세기 말부터 시작하여 19세기에 한창 꽃을 피우고 20세기의 서구 정신의 기초가 되었던 실증주의 내지 과학 지상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지나치게 우상화시켜 버렸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도 인간의 이성을 절대화시키는 듯한 경향을 보였는데,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감성과 직관의 부분들을 소홀히 하고 인간의 이성을 현실 검증의 유일한 도구처럼 여기게 되었다. 그 결과 서구, 특별히 유럽의 여러 교회 전통들은 성경을 인간의 이성이라는 권위 아래로 전락시키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19-20세기 서구인들의 생각을 지배하였던 “이성주의”의 세계관은 사람들로 하여금 은근히 감정을 무시하거나 감성을 외면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감정의 영역은 무시하거나 외면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감정은 지식의 동반자라고 나는 주장한다. 이성으로 판단한 지식 곁에는 그 지식에 대한 느낌이, 자신이 알든지 모르든지 간에 함께 있는 것을 우리는 눈치채야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갑돌이라는 사람이 어떤 개를 바라보면서 이 짐승이 개라는 사실만을 알거나 그 개에 대한 실존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갑돌이는 개를 바라보면서 어떤 애정을 갖게 되는데, 그 특정한 개를 기억함과 동시에 그 개에 대한 감정도 갖게 되고, 그 개에 대한 객체 인식과 함께 감정도 기억하게 된다. 반면, 무슬림들이나 아프리카의 유목인들에게 개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어 보라. 그들에게 개란 동물은 그리 애정을 줄 만한 존재가 아니다. 개는 매우 천한 존재이다. 그래서 이방인이나 다른 사람들을 욕할 때에 그들은 개를 들먹인다. 이것은 개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다른 것을 보여 준다. 똑같은 대상이지만 갑돌이라는 사람의 문화권과 무슬림들의 문화권의 해석이 전혀 다른 것이다. 이러한 사물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다름으로 해서 그 사물에 대한 감정도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사회의 세계관을 이야기할 때에 그 사회 구성원들이 주변 환경(자연 환경, 사회적 환경, 영적 환경)들에 대하여 어떤 감정을 갖는가하는 것을 조사하는 것 역시 그 사회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이러한 감정은 문화화 과정을 통하여 후세에게 전수된다. 즉, 어떻게 감정을 가져야 하는가 까지도 배우게 되며, 이것은 습관이 되어 자신의 감정의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면, 각 문화권의 유머를 말할 수 있다. 아무리 미국에서 오래 살고 영어를 잘 하는 한국인이라 하더라도, 미국의 백인들과 같이 어려서부터 성장하지 (즉 문화화되지) 않았다면, 미국 백인들이 박장대소하는 그들의 유머의 감정을 느낄 수 없다. 무슨 뜻인지 알기는 알지만, 느낌은 전달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관이라고 하는 것은 한 공동체가 – 이 공동체는 거의 항상 혈연 공동체가 기본인데 – 공유하는 지식들과 느낌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회에서 좋다고 믿어지는 것들,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것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헌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획득하였을 때에 사람들은 기뻐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지식들과 가치들, 그리고 헌신의 대상들을 늘 전제하며 살아 가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전제들의 내용에 도전이 오게 되면, 사람들은 혼돈에 빠지거나 화를 내게 된다. 만일 외부인이 들어와서 그 동안 전통적으로 믿어온 전제들과 가치들과 충성의 대상들이 틀렸다고 한다면, 그 외부인은 그 지역에서 추방 당하거나 형벌을 받을 지도 모른다. 다른 이들의 세계관을 무시하거나 도전하는 것은 결국 그들의 “감정”을 건드리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타문화권에 들어갔을 때에 외부인들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문화권의 사람들의 세계관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문화관 중심으로 행하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좀더 다른 차원이므로 “세계관의 변화”를 다룰 때에 자세히 언급하려 한다.)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이슬람 급진주의자들과 서구 세계와의 충돌은 전혀 다른 세계관들의 충돌이며 이것은 굉장히 복잡한 인간 관계의 충돌로 나타나고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상대방의 세계관을 이해하거나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 없이 상대방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서로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선한 입장을 주입시키려는 행위는 평화를 가져오기가 매우 어렵다. 오늘날 일어나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과 테러리스트들(사실은 이슬람 급진주의자들)과의 싸움은 그 동안 누적된 세계관의 충돌이다. 이에 대하여 다음 호에서 좀더 다루어 보고자 한다. 다음 호에서는 이슬람의 세계관과 서구의 세계관이 얼마나 다른지, 그리고 이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입장을 갖는 것이 바람직한 지에 대하여, 이번 호에서 언급한 내용들을 기초로 하여 살펴 보고자 한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