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 인간이해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기초 (4)


1. 문화와 세계관
2. 세계관이란?
3. “문화화(enculturation)” 과정과 세계관의 형성
4. 세계관의 역학적 기능


5. 세계관의 충돌: A Case Study — Islamic Worldview


세계관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보는 관점 혹은 그 세계에 대한 이해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이러한 세계관은 어느 한 공동체가 주위의 환경에 적응하며 혹은 싸워나가면서 형성된 세계 이해이다. 따라서 세계관은 단번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거쳐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사회든지 그 사회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가 처해진 환경을 이해해야 하며 또 그 환경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 사회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 장에서는 오늘날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이슬람의 세계관을 예로 들어보고자 한다.


이슬람의 세계는 지난 2세기 동안 무함마드의 이슬람 정신, 즉 이슬람의 원리로 돌아가자는 부흥운동이 한창 일어나고 있다. 이 운동은 이슬람의 가장 원형적인 세계관으로 복귀하자고 하는 신앙운동이자 세계관 정립의 운동이다. 이러한 운동은 자연히 이슬람 선교(jihad)의 성격으로 나타나게 되며, 그 결과 선교적인 기독교와 기독교의 세계관에 기초하여 발전한 서구 사회의 사상과의 또 한번의 대결이 예상된다. (이미 역사 속에서 기독교적인 서구 사회와 무슬림들과의 갈등은 십자군 전쟁에서 보여주듯이 항상 계속되어 왔다.) 이렇게 이슬람 사상이 현대주의를 이룩한 서구 사회에 큰 도전과 위협으로 부상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이슬람을 세계관의 이론에 입각하여 이해하여 보지 않을 수 없다. 본고에서는 이슬람의 역사적 발전이나 교리의 세부적인 내용은 다루지 않고, 모든 무슬림들이 고수하고 있는 이슬람의 보편적인 세계관 전제들(worldview assumptions)만을 소개하고자 한다.


5.1. 이슬람의 기본 믿음에 반영된 세계관의 내용들


이슬람에는 기본적인 6가지 믿음의 내용이 있다. 무슬림은 알라를 믿으며, 알라의 천사들과, 알라의 책들과, 알라의 선지자들을 믿는다. 그리고 알라의 절대 작정을 믿으며 마지막 날에 심판이 있을 것을 믿는다. 본고에서는 이 가운데 이슬람의 세계관의 가장 기본이 되는 신관과 알라의 작정, 그리고 선지자 무함마드에 대한 그들의 신앙만을 다루기로 한다.


(1) 알라


이슬람의 가장 기본은 신앙고백이다. “알라 외에는 다른 신이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마지막) 선지자이다(la ilaha illa allah, muhammad rasul allah)”라는 그들의 신앙을 모든 무슬림들은 거의 모든 삶의 상황 속에서 반복하여 고백한다.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무슬림들이 교육받는(enculturation) 내용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바로 이 알라의 유일성(tauHid)과 무함마드의 마지막 선지자됨(risalah)이다.


알라는 전지전능한 신이며 만물의 창조주로서 그 어떤 존재도 알라에게 비견할 수 없다. 무슬림들의 신관(view of God)은 매우 엄격한 유일신관이다. 알라는 숫자적으로도 한 하나님이다. 고로 삼위일체의 교리는 이슬람의 신관에 위배된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슬람의 신관은 인간의 매우 합리적인 사고에 근거하고 있다. 무슬림들은 알라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신의 유일성을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의 틀에 가장 잘 맞게 설명하고 있다. 즉 알라는 숫자적으로 단일신이라는 신 개념 이상을 생각하지 못한다. 성경의 오묘한 삼위 하나님의 개념은 이슬람에서는 가장 큰 신성모독의 죄(shirk)가 된다.


또 알라는 인간이 이해할 수도 없으며 알 수도 없다. 단지 꾸란을 통하여 그의 뜻이 계시될 뿐이다. 그러므로 알라를 인격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신이 아들이 있으며 자신을 인격적으로 계시하기 위하여 그 아들을 인간으로 보냈다고 하는 기독교의 신 이해는 무슬림들에게는 오직 신성모독일 뿐이다. 꾸란 112번째 수라(章)는 이슬람의 신관을 잘 요약하여 준다.


1절: 알라는 오직 유일하고 하나뿐인 신이시다. 2절: 알라는 영원하시며 절대자이시다.
3절: 그는 자녀를 낳지도 않으시며 자녀로 태어나지도 않으신다.
4절: 그와 같은 이가 없다.


이슬람이 무함마드에 의하여 아라비아 반도에서 처음 형성될 때에 이 유일신 사상(tauHid)은 가장 중요한 무함마드의 메시지였고 오늘날도 이 사상은 이슬람의 모든 문화의 기저에서 가장 중요한 세계관으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슬람의 메시지의 근본은 바로 이 알라의 유일성과 절대성의 선포에 있는 것이다. 무함마드의 초기 메시지 역시 우상을 타파하고 유일하신 신 앞으로 사람들이 돌아올 것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무함마드의 메시지는 새로운 종교의 창시를 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당시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한 아랍 사회가 그들의 육적 조상인 아브라함의 종교로 돌아가자고 하는 종교 개혁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따라서 “알라에게 순복”이라는 의미에서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이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무슬림들의 종교와 세계관은 거의 일치하는 것 같이 보인다. 편의상 우리는 이슬람의 세계관은 무슬림들의 종교, 즉 이슬람의 기저에 있는 믿음의 내용들이라고 구별하면 될 것이다.)


(2) 알라의 절대 주권과 작정(qadr)


무슬림들의 문화는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바로 이 신관에 기초한다. 그러므로, 이슬람이 전래되기 전의 토속적인 세계관의 다름으로 인한 차이들이 각 이슬람 사회마다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슬람권 내의 사회들이 대체적으로 비슷한 사상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 신관에 대한 투철한 그들의 충성 혹은 헌신(allegiance) 때문이다. 따라서 이슬람의 신관은 자연히 그 사회의 정신 세계(혹은 문화의 정신적 측면)에 영향을 주었고, 역으로 이슬람권 사회의 보편적 성격을 알기 위하여서는 이슬람의 신관을 먼저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무슬림들이 어려서부터 배우고 이해하게 되는 알라의 속성은 어떠한가 알아보자. 꾸란과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쓰의 전통에 의할 때에 알라는 엄격하고 장차 모든 죄를 다 심판할 신이시다. 비록 알라의 이름이 꾸란에는 항상 자비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이(ar-rahmani, ar-rahim)로 등장하지만 이슬람의 신관은 알라의 엄중함과 그의 두려움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는 절대주관자이다. 중세기 수피 신학의 초석을 놓은 가잘리(al-Ghazzali)에 의하면 알라에게는 사랑이라고 하는 개념이 필요 없다. 사랑은 사람이 필요를 느낄 때에 생기는 감정 중 하나이다. 그러나 알라는 어떠한 필요를 느낄 필요가 없는 완전한 신이시다. 그러므로 신을 사랑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알라를 자비하신 분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름뿐이지 알라가 자비하신지에 대하여 무슬림들조차도 확신하지 못한다. 자비의 개념은 알라가 용서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근거한 것이지, 기독교에서처럼 이미 자기 아들을 희생시켜 용서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알라의 용서와 자비는 조건적이지 무조건적인 용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슬람에서 강조하는 신의 속성은 그의 절대적인 주권이다. 어느 정도 주권적인가 하면, 그는 모든 선과 악을 다 작정하였다. 가잘리와 같은 학자들의 신 개념에 의하면, 알라는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또 어떤 사람들로는 죄를 짓도록 하는 것이다. (꾸란 5:20, 7:178-179, 14:4, 11:118-119, 32:13 참조) 결국 죄도 알라의 피조물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알라의 작정에 반론을 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절대 주권자이며 인간은 오직 순종을 요하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비록 수라 50:16에 의하면 알라는 인간의 대정맥보다도 더 가까이 계신 신으로 묘사되지만, 이 구절은 알라가 창조자로서 그만큼 인간의 모든 깊은 곳을 다 안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 구절이 알라가 인간에게 친밀하다는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이러한 이슬람의 신 개념은 인격적인 계시이기보다는 어떤 힘(Power)의 계시인 듯하다. 그는 자비한 신이라기보다는 자비할 수도 있는 전능의 신이다. 꾸란에 나타난 알라의 계시는 결국 그의 힘의 계시이다. 인간의 고뇌 속에서 만나지는 그러한 신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드러내고 인간의 불순종을 심판하며 거역하는 자들에게 승리자로 다가오는 그러한 능력의 계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슬람에서 중요한 이슈는 어떻게 하면 이러한 전능자에게 순복할 것인가 하는 내용이 된다. 그 결과 정통 이슬람에서는 율법학이 발달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슬람의 역사를 보면 이슬람이 추구하는 것은 승리이다. 알라는 근본적으로 승리의 신이시다. 그에게 실패나 패배는 있을 수가 없다. 설사 하나님의 아들이 있어서 인간 세상에 왔었다고 하더라도, 죄인들에게 어이없이 당하고 십자가에서 치욕적으로 죽었다는 것은 이슬람의 세계관에서는 용납되기 어려운 내용이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기본적인 가치관은 승리이다. 그리고 이 승리는 매우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승리이며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의 말은 매우 교묘하고 기만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합리적이고도 현실적인 이슬람은 기실 그 처음 발흥 때부터 매우 현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이러한 현실성은 이슬람이 지금까지 실제로 역사 속에서 정치와 분리될 수 없는 특징으로 항상 나타났던 것이다.


이러한 이슬람의 기본 세계관이 절대 주권자의 개념, 힘, 불가지론적인 신관이라는 아이러니 등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이슬람의 사회 역시 이러한 개념들이 사회의 구조 속에 곳곳에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이슬람 국가들이 왕국의 전통을 고수하거나 독재를 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신관에 어려서부터 익숙해져 있는 무슬림들의 심리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제 무함마드에 대한 무슬림들의 이해와 사랑과 존경을 알아보도록 하자. 무함마드 선지자에 대한 그들의 충성은 오늘날까지 이슬람 사회의 세계관의 중요한 중추 역할을 해 왔다. 다음 호에 계속하여 이 부분을 다루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