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세상 읽기


외모 지상주의 (Lookism) (2)


우리 안에 이 ‘외모 지상주의'(lookism)- 모든 평가의 기준을 외모에 두는 것 -처럼 가장 널리 퍼져 있으면서도 쉽게 인식되지 못하는 사회적 우상이 또 있을까? 사실 한국사회의 물질만능주의나 지역이기주의, 학력/학벌 중심적인 사회구도에 대해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문제의식을 갖고 성토하는가? 이에 비해 외모 지상주의는 많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 어찌할 수 없는 인간사의 한 본능적 차별형태로 자리잡아 버린 것 같다. 얼마 전 타계한 한국 코메디계의 대부 이주일씨도 그 옛날 80년대 초에 이미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는 말로 많은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지 않았던가? 못생긴 것이 죄송하고 웃길 정도로 우리사회는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풍토로 인해, 외모를 노골적으로 중시하는 한국사회의 경향을 그 어떤 ‘지상주의’보다 더 경계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세상의 흐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우리의 사회 안에 은근히, 그러나 당연하게 침투해 있는 이 외모 지상주의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떠한 삶을 요구하시는가?


먼저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인 나에게 외모란 과연 어떤 것인가? 혹 나는 획일화된 외모로 내 스스로와 이웃을 평가하는데 익숙지는 않은가? 나는 외모에 대해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가? 그리고 내가 신경을 쓰는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런 질문들에 대해 진지한 평가를 내린 후,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관점과 성경적 세계관을 비교하면서 나의 사고를 반성하고, 개혁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은 우리에게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행동강령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경에 변함없이 흐르고 있는 가치관과 세계관을 찾아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고자 고민하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몫이 아닐까?


1. 성경이 이야기하는 외모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새번역성경 야고보서 2:1)


성경은 우리가 ‘외모(appearance)’로 사람들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데에 아주 익숙한 존재라고 증거 한다. 심지어는 하나님과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구별되는 이유 중의 하나로,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시는 분’이라고까지 표현한다.(신 10:17, 삼하 16:7, 벧전 1:17) 그만큼 우리는 외모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려는 연약함을 가진 존재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말씀들이 곧 우리 사회의 외모 지상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외모로 사람 평가하기를 좋아하는 우리에게 성경이 강력하게 경고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외모(appearance)로 사람을 차별(favoritism or partiality)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외모 지상주의의 대한 성경의 명확한 배척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바로 외모에 대한 각 사람의 반응과 평가, 그리고 이로 인한 의식적, 무의식적 차별대우로 인해 외모 지상주의가 우리 안에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에서 말하는 외모(appearance)가,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미적(美的)인 외모만을 항상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신·구약에서 사용된 외모는 주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서 외적으로만 그럴듯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이는 자들이나, 아니면 가진 자나 권력 있는 자들을 그렇지 못한 자들과 차별대우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욥 34:19, 요 7:24, 벧전 1:17, 골 3:25, 약 2:1-10 등등).


성경에서 외모가 순수한 미적 의미로 우리를 교훈 하는데 사용된 경우는, 사무엘상 16장 6절에서 13절의 ‘선지자 사무엘 이야기’와 베드로전서 3장 1절에서 6절의 ‘베드로의 권면’ 등에서 볼 수 있다(이 외에도 미적인 의미로 외모가 사용된 경우가 있긴 하나, 이는 주로 사물이나 성경인물의 외관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성서 해석학에 충실하게 이 두 구절의 말씀에만 집중해서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성경의 입장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제시함에 있어 앞서 주장한 외모 지상주의 형성의 직접적 원인이 되는 우리의 ‘보아주고’, ‘보여주는’ 자세의 변혁을 촉구한다. 곧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람들을 보아주고, 또한 자신을 보여주는 삶을 통해 외모 지상주의에 역류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주장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이 글이 단순하게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추상적인 넋두리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삶의 실천으로 옮겨지기를 소망하는 필자의 바램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나의 제안들이 독자들에게 그리 특별하거나 신선하게 다가가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별 특별한 이야기 없이 당연한 말들을 늘어놓는 넋두리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실 언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남을 어떻게 보아주고 또한 스스로를 어떻게 보여주어야 할지 몰라서 문제였던가? 세상의 흐름에 생각 없이 파묻히는 우리의 무심한 자세가 문제이지.…


2. 하나님의 백성답게 보아주고, 보여주는 삶


(1)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보아주라’고 말씀하신다. (사무엘상 16:6-13)



그러나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셨다. “너는 그의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세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 (새번역성경, 사무엘상 16:7)


하나님의 마음이 이미 떠난 사울 왕의 후계자를 위해 베들레헴의 이새를 찾아온 선지자 사무엘은, 그의 아들 중 유난히 키가 크고 용모가 준수한 엘리압을 보고, 그가 바로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시기를 원하는 자로 판단한다. 사실 우리는 여기서 왜 선지자 사무엘이 그렇게 중요한 일을 분별하는데 있어 외모를 그 기준으로 삼았는지 사뭇 이해가 안 된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무엘이 나름대로는 하나님의 뜻을 고려하여 이런 판단을 내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베냐민 지파의 사울을 처음으로 만나게 했던 때를 기억했을 것이다.(삼상 9, 10장) 용모가 매우 준수하며 또한 큰 키의 소유자였던 사울을 기름 부으며, 그는 마치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왕으로 세우고자 하는 자들은 다들 그 용모와 키에 있어 어떤 “수준”의 사람들이여야 한다는 고정화(conventional)된 생각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고정화된 생각으로 인해 그는 엘리압을 보자마자 그가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외모를 소유했다는 생각에 그만 하나님의 뜻을 그릇되게 판단한 것이다.


사실 우리 또한 성경을 읽다 보면, 성경인물들의 외모에 있어 비교적 고정된 성경의 관점을 보게 된다. 그것은 바로 성경의 인물 중에 웬만해서는 못생긴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물론 가끔씩 엘리사나 사도 바울처럼 썩 출중하지 못한 외모를 소유한 사람들도 등장하지만, 전반적으로 성경의 인물들은 거의 다 잘 생겼다. 사라를 필두로 해서 리브가, 라헬에 이르기까지 웬만한 창세기의 여성들은 다 한 미모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거기다가 다윗의 부인 중 한 명이었던 아비가일, 페르시아 제국의 왕비 에스더 등, 꽤나 많은 성경의 여인들이 미모를 갖춘 자들이었다. 남자들은 또 어떠한가? 자신의 멋있는 ‘외모’로 인해 유혹까지 받아야 했던 요셉으로부터 갓 태어났을 때 꽤나 준수했다던 모세, 키가 크고 용모가 출중했던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 부자(父子)지간이 다 한 외모 했다던 다윗과 압살롬에 이르기까지, 남성들 또한 멋있는 자들이 꽤나 등장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고정화된 성경의 인물론을 뒤집어엎으시는 권면을 사무엘에게 하시는 것이다.


그럼, 그분 말씀의 요지는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해 사람을 볼 때, 외모에 집중하지 말고 중심을 보아주라는 것이다. 사무엘은 엘리압의 큰 키와 준수한 용모만을 보고 그를 평가했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서도 이러한 시각을 가지라고 권고하신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말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실생활 속에서 사람의 외모에 지나치게 연연하고, 또한 끌려 다닌다. 한마디로 외모로 인해 우리의 판단이 흐려질 때가 많다. 그래서 ‘외모가 능력이다’ ‘예쁘고, 잘 생기기만 하면 된다’ ‘딴 건 몰라도 못 생긴 것은 용납이 안 된다’는 등의 우스운 말들이 우리의 생각을 은연중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왜 하나님의 이 말씀에 쉽게 순종하지 못하는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무슨 이유로 인해 우리는 마땅히 보아주어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세월이 지나면 사라질 허탄한 것에 큰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이에 연연해하는 것일까?


첫째, 나는 그 이유가 미적 외모에 눈이 어두워 사람의 ‘중심’을 봐줄 줄 모르는 우리의 조급한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나름대로 사람의 중심을 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중심은 어떤 존재의 ‘진심’이나 ‘참된 실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를 밝히 보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아닌 이상, 우리는 사람의 중심을 보는데 있어 신중하고 차분해야 한다. 단순히 외모만 보고 그의 실체(중심)를 온전히 알 수는 없다. 외모가 사람의 실체를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외모만을 가지고 사람을 제대로 ‘보아준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의 중심을 보려면 그 사람의 삶을 바라봐야 한다. 마치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보시며 우리의 중심을 판단하시듯, 우리 또한 미적 외모에 바탕을 둔 값싼 평가와 차별은 던져버리고, 서로의 삶을 지켜보며 중심을 알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개중에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성을 처음 소개 받은 자리에서, 사귀자 거나 결혼하자는 말을 한다는데,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이것 또한 상당히 자의적인 해석일 수 있지만)가 아니고서야, 이는 상당히 즉흥적이고 사람을 인내하며 바라볼 줄 모르는 조급한 자세라 생각한다. 이는 마치 TV나 영화, 아니면 여러 사람들과 마주치는 길가에서, 멋진 얼굴과 몸매를 자랑하는 남녀들을 은근슬쩍 바라보며 그들의 중심까지 순식간에 과대포장해 버리는, 우리의 미련하고 가벼운(shallow) 모습과 무엇이 다른가?


두 번째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습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을 바라볼 때 항상 얼굴, 몸매, 화장법, 옷맵시 등을 보고 평가하는데 익숙해진 나의 눈이 막상 이런 말씀 한 구절 읽고 묵상한다고 해서 그리 쉽게 바뀔 리가 없다. 이미 우리 안에 익숙해진 시선은 성경에서 아무리 이러쿵저러쿵 말한다 치더라도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절제되고 훈련되지 않는 한 쉽사리 습관화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선지자 사무엘이 사울 왕 때의 경험으로 인해 하나님의 계획을 잘못 분별한 경우를 보았다. 이처럼 일단 우리 안에 습관화되고 고정화된 시선은 쉽게 우리를 떠나지 않고,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사고를 주장하는 것이다.


2)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보여주라”고 말씀하신다. (베드로전서 3:1-6)



“Don’t be concerned about the outward beauty that depends on fancy hairstyles, expensive jewelry, or beautiful clothes. You should be known for the beauty that comes from within, the unfading beauty of a gentle and quiet spirit, which is so precious to God” (NLT, 베드로전서 3:4, 5)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에 의하면, 패션의류나 명품시장을 제외한 ‘순수 미용’ 분야의 연간 시장규모가 미용성형 5천억원, 다이어트 1조원, 화장품 5조 5천억원 등 무려 7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이제는 외모가 자본이 되는 세상을 넘어 자본이 외모를 만드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보여주느냐는 문제에 매우 민감하다. 단순히 이왕 자신을 보여줄 거 깨끗하고 단정하게 보여주자는 선을 뛰어넘어, 이제는 자신의 존재가치와 성공을 위해 필사적으로 외모를 가꾸고 꾸미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근데 이러한 세상물정도 모르고 사도 베드로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권면(벧전 3:4, 5)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지고 있다.


우리가 베드로전서 3장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본 서신서의 전체적인 배경과 그 주제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위의 말씀은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경고의 목적으로 쓰여진 말씀이기 이전에, 타지에서 핍박과 환난을 당하고 있었던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을 격려하기 위해 쓰여진 사도 베드로의 편지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꿋꿋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어떻게 자신의 신앙을 지키며, 그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지에 대한 실제적 권면을 그 핵심주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 믿는 자들의 삶이 나그네 인생이라는 점을 강조하며(1:1, 17, 2:11), 그리스도인 노예로서(2:18-25), 그리스도인 아내로서(3:1-6), 또 그리스도인 남편(3:7)으로서 각자 자신의 처소에서 어떻게 믿는 성도답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예수 믿기가 어렵고 힘든 시대이니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자는 논조가 아니라, 오히려 핍박과 고난의 시대일 수록 자신의 그리스도인 됨을 온전히 드러내자는 존재론적(ontological)인 가르침을 편지에 담고 있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위의 말씀(3:1-6)을 통해, 결혼한 여성 그리스도인이 불신자 남편에게 자신의 그리스도인 됨(정체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방법은, ‘외면의 미'(outward beauty)를 통해서가 아닌, 순종을 바탕으로 하는 ‘내면의 미'(inward beauty)를 통해서라고 말한다. 한 마디로 여성 그리스도인이 가장 지혜롭게 자신의 존재가치를 보여주는 방법은 이 시대와 같은 외모 지상주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귀하고 값진(precious) ‘내면의 영성'(inner spirituality)을 통해서라는 말이다. 영적인 시련과 핍박이 많은 세상에서 아름다운 헤어스타일과 옷, 액세서리를 통해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포장하지 말고, 오히려 믿는 성도답게 경건하고 순결한 그리스도인의 행실을 말없이 보여주자는 것이다.(3:1, 2)


사도 베드로가 결혼한 여성 그리스도인들에게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행동하는 신앙을 보여주라고 촉구하면서, 가꾸고 꾸미는 미적 외모를 이에 반대하는 예(counterexample)로 삼은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마치 베드로는 현 시대의 외모 지상주의를 빗대어 말하듯 우리에게 이렇게 도전하는 것 같다. 참된 능력이 없는 허탄한 것에 집중하지 말고, 먼저 그리스도인으로서 보여줄 것을 보여주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행동하는 경건하고 순결한 속 사람을 통해, 세월이 지나면 사라질 외모와는 수준이 다른, 신앙인의 ‘불변하는 미'(unfading beauty)를 보여주라고 말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부스스한 머리모양과 꾀죄죄한 옷차림을 보여줄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7조원에 이르는 ‘순수 미용’ 분야에는 빠짐없이 소비자의 한 몫을 감당하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참되고 값진 내면의 훈련을 소홀히 여기는 것은 분명 그리스도인의 우선순위상 문제가 있는 처사다. 스스로를 아름답고 멋있게 가꾸기 위해서는 철저한 다이어트와 피부관리, 세련된 헤어스타일과 옷, 액세서리, 화장품 등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 정작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그리스도인의 멋과 빛깔을 내지 않는다면 이거야말로 외모 지상주의가 아닌가?


우리가 우선적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은 외모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확고한 정체성이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예쁘고 멋진 얼굴과 늘씬하고 우람한 몸매, 세련된 옷과 액세서리를 통해 자신의 가치와 존재를 드러낼지 몰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변치 않는 내면의 미(inner beauty)를 통해, 자신이 누구의 백성인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글을 마치며…


앞에서도 주장했지만, 우리는 많은 경우에 외모 지상주의가 자신과는 별 상관이 없는, 다른 사람들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는 외모를 가지고 사람들을 평가하는 면에 있어서는 자신도 남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어도, 최소한 외모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누이 이야기 하지만 외모 지상주의는 보아주는 사람과 보여주는 사람들의 상호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우리의 습관화된 외모 중심적인 시선과 평가가 -의도를 했든 안 했든- 다른 사람들이 외모 지상주의에 집착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단순하게 친구들끼리 모여 앉아 타인의 외모에 대해 평하고, 외모에 자신감이 없는 지체나 장애우들을 어색한 눈빛이나 행동으로 대하는 우리의 모습 그 자체가, 곧 변형된 외모 지상주의인 것이다. 거기다가 그리스도인다운 정체성은 보여주지 않으면서 지나치게 자신의 외모만을 가꾸는 것 또한 외모 지상주의에 동참하는 행동일 수 있다. 나의 무분별한 과시(showing off)와 드러냄을 통해 외모 지상주의의 여파가 이 땅에서 계속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바라볼 때, 그들의 외모보다 먼저 중심을 바라보고자 노력해야한다. 은연중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고 차별하고자 하는 유혹을 뿌리치고자 지속적인 세안(洗眼)작업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외면의 미를 통해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받기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속마음의 참 주인 되심을 지속적으로 가꿈으로 행동하는 신앙인의 정체성을 보여주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미적인 외모, 그 자체를 아름다움 안에 가두는(?) 훈련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아름다운 외모가 사람의 중심과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지 않게, 나의 존재가치를 흐리게 하는 우상이 되지 않게, 아름다운 외모는 그냥 ‘아름답다’는 표현 그 자체에 머물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