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세상 읽기


외모 지상주의 (Lookism)


돌아가는 세상 이야기


1. “외모가 얼마나 중요한데요!”


한국교회나 이민교회나 7, 8월은 교회의 여름행사들로 정신이 없는 것 같다. 군대가려고 온 모국에서도 하나님의 그 어떤 섭리가 있으셨는지 계획했던 군 입대는 연기되고, 현재 나는 모(母)교회의 중·고등부 전도사로 섬기고 있다. 그리고 이런 연유로 인해 지난 7, 8월은 여러 수련회들로 정신이 없었다. 특히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하자마자 갖게 된 중·고등부 여름 수련회는 정말이지 신경이 많이 쓰였다. 모든 사역이 그렇겠지만, 아이들과의 친밀감이 너무나 중요한 것이 바로 중·고등부 사역이 아닌가? 그래서 이번 중·고등부 수련회는 나에게 학생들의 신앙수련 못지 않게 아이들과 잘 놀아야(?) 하는 중대한 사명을 지닌 수련회였다.


수련회 기간 중, 시간이 날 때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아이들과의 거리감을 서서히 좁혀 가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중·고등부 안에 끼리끼리 뭉치는 소그룹들이 있음을 감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히 다른 아이들과 잘 섞이지 못하는 중학교 2학년 여자아이들은 자연스레 나의 주 목표대상이 되었다. 쫄래쫄래 중2 여자아이들을 따라 다니며, 이런 저런 추파(?)를 던지기도 하며 접근을 시도해 보았지만, 아이들의 멋쩍어 하는 분위기에 나는 차일피일 다음 기회를 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그들과 나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좋은 이야기 거리를 찾게 되었으니 이는 바로 ‘외모’였다.


중2 여자아이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영주라는 아이는 자칭 ‘폭탄파’라고 불리는 중2 조직의 보스(?)다. 별명이 ‘핵폭탄’인 영주의 왼팔과 오른팔은 ‘다이너마이트’와 ‘지뢰’라 불리는 혜수와 정원이. 그리고 이 세 아이들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는 중2 여자아이들은 쉽게 말해 이 ‘폭탄파’의 조직원들인 셈이다. 여하튼 이러한 중2 아이들의 재미있는(?) 조직 분위기를 힐끔힐끔 관찰하고 있던 나는, 아이들과 일단 친해지고 봐야겠다는 간절한 소명의식 속에, 결국 이렇게 접근하게 되었다.


“야 내가 이 폭탄파 고문을 맡으면 안 되겠냐?” ^^;


충격스럽게도 아이들은 그 흔한 오디션이나 인터뷰도 생략한 채 너무나 당연한 듯이 나의 고문직을 수락해 주었다. 뭐, 나이에 안 어울리는 나의 여드름과 촘촘하지 못한 머리카락 분위기를 볼 때, 고문할 자격이 충분히 있다나? 여하튼 고문이 된 기념(?)으로 나는 7명의 자칭 폭탄파 멤버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나 던졌다.


“나중에 돈 생기면 성형수술하고 싶은 사람?”


“저요~~~!”
“저요~”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다들 손을 들었다.


“야 이유가 뭐냐? 내가 보기에는 너희들 다 이뻐 보이는데…” ^^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다양한 제스처 – 멀쩡한 머릿결을 한번 쓰다듬거나, 예쁜 표정을 지으며 -와 함께 모두 공주가 되었다.


“저도 알아요~”
“당연하죠~”
“전도사님이 사람 볼 줄 아시네요. 제가 한 미모 하죠!” ^^;


그리고 나서 몇몇 아이들은 14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의 답변들을 늘어놓았다.


“전도사님이 뭘 모르시네. 외모가 얼마나 중요한데요!”
“여자는 얼굴이 예뻐야 능력이 있는 거예요~”
“나중에 취직할 때도 미모가 돼야 취직이 된다니까요~”
“일단 수술을 해서라도 이쁜게 중요해요”


글쎄… 그날 아이들과의 즐거운 대화를 마친 후, 아이들과 손쉽게 친해졌다는 성취감 뒤에 왠지 모를 허(?)한 기분과 찜찜함이 느껴진 것은 왜일까? 과연 외모가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나도 얼굴 예쁜 여자를 보면 솔직히 눈길이 가고 보기 좋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성형수술까지 해야되나? 과연 14살의 어린 중학생들이 벌써부터 이렇게 난리를 칠 정도로 ‘외모’란 대단한 것인가?


2. 외모가 인생의 성패를 좌우한다???


광고대행사 제일기획은 지난 8월 11일, 13-40세의 우리나라 여성 2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심층 전화면접 결과를 언론에 공개했다.


간단하게 조사결과부터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 사회의 13-43세 여성 68%가 외모가 인생의 성패에 크게 영향을 끼치며, 78%는 외모 가꾸기가 멋이 아니라 생활의 필수 요소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외모 가꾸기에 하루 평균 53분을 투자하며, 거울은 평균 8.3회를 본다고 한다.


조사자 중 69%는 외모에 신경을 쓰고 외출하면 타인이 더 친절하게 대한다고 생각했으며, 56%는 또래의 여성을 보면 외모부터 비교하게 된다고 답해 외모에 대한 타인의 평가에 중압감을 느끼는 것으로 분석됐다.


그럼에도 일반 국민정서에 반하는 이러한 시티은행의 대출정책은 학력, 학벌 중심적인 한국사회의 병폐를 더욱 노골적으로 가시화 함으로써 오히려 잘못된 흐름을 부채질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논란이, 네티즌 사이에서 일어났다. 실제로 이번 대출 관련기사(하나리포터)에 실린 네티즌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연령층별로는 13-18세의 경우 친구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외모에 신경을 쓰며 용모보다는 운동화, 가방, 장신구 등에 치중하는 것으로 조사됐고, 19-24세는 다른 세대에 비해 자신에게 맞는 스타일을 추구하며 정체성에 관심을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


25-34세의 여성들은 외모가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수단이라고 여겨 헬스, 피부관리, 성형수술, 다이어트 등을 통한 외모 관리에 가장 적극적이었고, 35-43세의 중년여성들은 외모를 부의 상징, 사회적 지위를 평가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제일기획은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의 외모에 대한 높은 관심이 미국사회의 ‘루키즘'(Lookism:외모 지상주의)을 능가하는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출처: 연합뉴스 8월 11일자 기사 )


고독의 세상 바라보기


먼저 ‘외모 지상주의'(lookism)에 대한 나의 넋두리를 시작하면서 몇 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첫째, 나는 외모가 갖는 개인적 가치와 아름다움, 그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는 사람이다. 아니 심지어는 아름다움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끼리 서로 특정한 이해관계에 의해 자본을 창출하는 것까지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넉넉함(?)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논하고자 하는 것은 외모 지상주의다. 마치 외모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하고 절대적인 가치기준인 것처럼 은근히 우리 안에 권력화 – 성공과 차별의 수단으로 – 되고 보편화되는 작금의 현실을 그리스도인의 관점으로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싶다.


외모가 출중한 남녀를 바라보며 왠지 모르게 가슴 설레고, 또 그들의 그 아름다움에 ‘멋있다’ ‘야~ 예쁘다!’ 라고 평하는 그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으랴? 그리고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자신의 내면을 가꾸려고 노력하듯, 나름대로 자신의 외모를 멋있게 가꾸고 챙기는 일 또한 문제 될 것은 없다. 그러나 외모 지상주의는 하나님이 아닌 외모를 우상화하고 숭배하며, 또한 획일화된 외모로 하나님이 창조한 다양한 사람들을 일괄적으로 평가하고 차별하는 사회현상이다. 이는 분명 잘못된 것이 아닌가? 성형수술을 패키지(package)로 하거나, 친구들을 3명 이상 소개해서 데려오면 수술비를 싸게 해 주는 곳이 바로 한국이다. 외모가 안 따라온다고 직장면접에서 노골적인 거부를 당했다는 가까운 친구의 이야기도 들었다. (그것도 외모와 전혀 상관이 없는 영어학원 면접에서 말이다) 요즘에는 외모를 비관해서 자살하는 경우는 뉴스거리도 안 된다는 기가 막힌 이야기를 한 방송작가 선생님을 통해 들은 적도 있다. 이건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다.


어쩌면 더 가슴아픈 일은 바로 이러한 사회, 문화적 흐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염된 사람들이, 결국에는 자신 스스로와 남들까지도 이런 기준에 의해 평가하며, 차별하게 되는 현실이다. 외모로 인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더 당당하다고 생각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부족하다고 믿게 하는 것. 내면의 아름다움과 그 깊이를 알고자 노력하기보다는 그냥 자신의 눈에 비춰지는 상대방의 아름다운 외모에 마음이 끌린 나머지, 눈에 불똥을 튀기며 ‘외모의 우상’을 쫓아다니는 남자, 여자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외모 지상주의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병폐가 아닐까? 나는 바로 이러한 사회현상에 관해서,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서 고민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둘째, 현대사회의 외모 지상주의는 결코 여성이라는 어느 한 특정한 성이나, 아니면 특별한 소수의 사람들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비록 위에 소개된 ‘세상 돌아가기’의 이야기들이 다 여성들을 그 주체로 삼고 있고, 또 일반적으로 외모는 남성들보다 여성들의 주된 관심거리라는 편견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결국 외모 지상주의라는 것은 ‘보아주는 사람’들과 ‘보여주는 사람’들 사이의 상호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닌가? 어떤 한 남성의 외모에 같은 남성이나 여성이 호감이나 반감을 표하고, 또 반대로 어떤 한 여성의 외모에 동성이나 이성이 반응을 보이면서, 평가되고 가치화하는 것이 바로 외모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아무리 외모라는 것에 별다른 관심과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내가 주변사람들의 외모를 평상시 어떤 자세와 관점으로 보는지, 또 스스로의 외모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present)데 있어 어떠한 자세를 취하는지가 모여져서 현시대의 ‘외모관’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모 지상주의는 단순히 여성들이라는 특정한 성의 문제이거나, 아니면 외모에 아주 관심이 많다고 여기는 소수 사람들만의 문제일 수 없다. 이는 사회를 구성하는 우리 모두의 외모에 대한 획일화된 반응과 평가 속에서 형성된 우리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손쉽게 한국의 길거리에서 엿볼 수 있다. 아리따운 용모와 늘씬한 몸매를 가진 여성들이 지나갈 때 이들을 뚫어지게(사람에 따라 그 정도는 다르겠지만) 쳐다보는 것이 단순히 우리네 중년 아저씨들과 젊은 청년들뿐이던가? 여성들도 남성들 못지 않게 지나가는 미모의 여성들을 쳐다보며 그들의 화장법, 옷차림 등을 살펴본다. 한마디로 ‘보아주고’, ‘보여주는’ 역할에 있어 성별이나 사람에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보아주는’ 쪽과 ‘보여주는’ 쪽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 바로 외모 지상주의이다. 그러므로 성별이나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외모 지상주의의 문제나 책임을 일방적으로 전가하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자세이다. 게다가 이제는 여성들 못지 않게 적지 않은 수의 남성들이 자신들의 외모를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있지 않는가?


마지막 셋째, 다른 많은 사회, 문화적 현상들과 마찬가지로 외모 지상주의 또한 우리가 속한 지역, 사회, 문화권에 따라 각각 다른 경향과 입장을 보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외모 지상주의는 철저히 자본주의적이면서도, 더불어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상당히 경계하는 사회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한국의 외모 지상주의는 이에 비해 ‘상호비교’에 의한 차별적 양상을 지나치게 띠고 있는 것 같다.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보여주기 위한 ‘과시적 경향’과 이를 통한 ‘평가’에 지나치게 민감한 것 같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들로 인해 외모에 대한 관점이 미국보다 더 공개적(or 노골적)이고, 또 차별의 기준으로 오용되기가 쉬운 사회구조라 보여진다.


필자는 유학생활 중에서도 방학을 맞아 한국만 방문하면 외모와 관련된 수많은 평가를 들어야 했다. ‘살이 많이 빠졌다’, ‘피부가 안 좋아졌다’는 등의 평을 들으면서 확실히 한국과 미국사회가 외모에 대해 상당히 다른 관점을 갖고 있음을 경험하게 되었다. 적절한 예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매 해 여름방학을 맞아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동료 유학생들의 옷차림과 외모를 통해서도 이러한 인식의 차이(difference)를 확인하게 된다. 학기 중에는 간편한 옷차림에 헤어스타일이고 뭐고 외모에 별 관심 없이 공부에 찌들려(?) 살아가던 사람들이, 새 학기를 맞아 오랜만에 학교에서 보게 되면 왜 이리 다른 사람들로 변신해서 나타나는지… 이는 아마도 미국사회의 실제적(practical) 생활관의 영향으로 외모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던 사람들이 한국사회의 공개적이고 상호 비교적인 외모관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고 돌아온 탓이리라. 하긴 때때로 방학을 마치고 돌아온 자매들이 ‘왜 이리 한국 여자 애들은 날씬한지 모르겠다’라고 투덜(?)대던 대학 때의 기억을 되새겨 보아도 한국에 있는 동안 그들이 받았을 ‘상호비교’의 스트레스를 이해할 수 있으리…


아무튼 이러한 지정학적, 세계관적 차이로 인해 이번 ‘고독의 세상 읽기’는 미국사회보다는 한국사회의 외모 지상주의를 주 논의대상으로 삼고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행여나 이 글을 읽으며 내가 사는 미국동네는 안 그런데 하는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어차피 현재 한국에 머물고 있는 고·독·의 ‘세상 읽기’가 아니던가? ^^;


자, 그럼 이 정도로 ‘세상 바라보기’는 이만 필하고, 그리스도인 고독의 ‘세상 읽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