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호하고 일방적인 한국교회


“옛날 고등학교 때 수학선생님이 그랬다. 이순신도 세종대왕도 또 조선시대에 그밖에 착하게 살았던 사람들도 다 지옥에 갔을 거라구. 왜냐면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말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에 안 믿은 거잖아요?” 그랬더니 그것과 상관없이 안 믿은 사람은 무조건 지옥이니 너희들도 어서 믿는 게 지옥에 안가는 길이라고 했다. 이때부터 난 무조건 기독교인이 무서웠다.” <언론사 홈페이지 독자 게시판에서 발췌한 글>


“‘예수님 믿으면 천국, 불신자는 지옥’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지난달 한 인터넷 사이트에 도장으로 보라색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진 1,000원 권 지폐 사진 두 장이 올려졌다. ‘犬독교의 만’이라는 제목으로 사진을 게시한 네티즌은 “화폐 관리법 위반으로 싹 다 잡아가라. 첫 번째 사진의 문구는 참으로 심오하다. ‘不信者’를 말하는 것인가? ‘佛信者’를 말하는 것인가?”라며 불쾌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빛과소금 4월호, 확산되는 반 기독교 정서 중, 최경배 기자>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국교회를 향한 현 사회의 무자비한 왕따에는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는 우리의 자세 못지 않게, 단호하고 일방적인 우리의 표현방식에 또 다른 원인이 있습니다. 곧 소통의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들어주는 것과 말하는 것(or 표현하는 것)에 있어 상호간에 심각한 괴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통상의 문제로 인해 우리는 당하지 않아도 되는 왕따를 당하는 면이 있습니다.


비 기독교인들의 시각에 우리 기독교인(여기서는 한국의 개신교 인만을 의미)들은 매우 무섭고(?) 거친(?)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와 관련된 주제에 있어 웬만해서는 유연하게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기보다, 단호하고 공격적으로 표현합니다. 다양한 사고가 존재하는 다원주의 사회의 현실을 무모할 정도로 부정하며, 우리 식의 신앙 관을 비 기독교인들에게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방식의 대표적인 일례를 우리는 지난 1999년도부터 심각하게 불거졌던 ‘단군상 철폐 운동’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 구내에 세워진 단군상의 머리를 전자 톱으로 자르는 식의 행동은 후기 현대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상당한 불쾌감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행동은 사회 내에 자신을 제외한 다른 관점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부정하는 일방적이고 공격적인 자세로 비춰진 것입니다.


언론사 홈페이지 등에서 벌어지는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 간의 논쟁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상호간의 노력으로 진지하고 발전적인 토론이 진행되는 듯 싶다가도 가끔씩 기독교인들의 선포적이고 단언적인 표현방식이 비 기독교인들을 자극해서 토론 자체가 난장판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물론 반대로 일부 비 기독교인들의 무례한 언행과 선입견으로 인해 토론이 엉망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엇이든 이원론적인 잣대로만 판단하려는 우리의 ‘대결구도적’ 자세가 상호간의 소통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대결구도적’ 자세가 지속될수록 그들은 우리를 더욱 배타적이고 반이성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되며, 결국에는 상대하기를 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단 이런 현상을 비 기독교인들이 주류를 형성하는 인터넷 사이트에서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주류를 이루는 사이트나 모임에서도 쉽게 목도할 수 있습니다. 간혹 누군가 교회나 성경에 대해 다소 불경한(?), 그러나 개인에게는 심각한 고민거리나 생각을 나누면, 곧 가차없이 선포적이고 단정적인 반응들이 나타납니다. “그런 생각은 사단이 주는 것이다”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다. 일단 믿어야 한다!” “형제님,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등등. 결국 이러한 단언적 표현들이 그 ‘다소 불경한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다시는 자신의 고민을 솔직히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와 같은 우리 귀에 낯익은 전도문구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의 고성방가식 찬양?전도집회, 그리고 일부 대학가 선교단체의 ‘물고 늘어지기식’ 일대일 전도 방식 등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비 기독교인들에게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한국교회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선포적이고 일방적인 표현방식에는 도대체 상호 교환되는 ‘소통의 미’가 고려되지 않습니다. 오직 일방통행 식의 선택강요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전하는 자의 입장이나 관점을 무조건적으로 듣고,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어찌 보면 강압적인 현실만이 존재할 뿐이지, 잘 들어보고 자신의 입장도 밝히면서 서로 소통하는 가운데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후기 현대주의 사회에 익숙한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권이 침해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혹 기독교 신앙을 믿고 받아들이게 되더라도, 후에 기독교적 관점에 자신이 동화된다 할지라도, 이 모든 과정이 스스로의 고민을 통한 자신의 실존적 선택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은 그냥 길거리에서 느닷없이 만난 어떤 낯선 사람과의 짧은 주입식 강의를 통해서가 아닌, 신앙 깊다는 기독교인들의 저돌적이고 확고한 신앙적 표현과 행위를 통해서가 아닌, 인격과 인격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형성된 대화와 만남을 통한 선택인 것입니다. 후기 현대주의를 연구하는 많은 기독교 학자들의 지적처럼, 후기 현대주의의 영향권 아래 있는 사람들은 근대주의 시대처럼 설득 당함으로 믿거나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직접 체험하는 가운데 손수 선택함으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기 원합니다.


선포적이고 단언적인 표현양식의 배경


“이에 다리오 왕이 온 땅에 있는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 하는 자들에게 조서를 내려 가로되 원컨대 많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 관할 아래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시며 그 나라는 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개역한글, 다니엘서 6:25-26)


한국교회의 이러한 공격적인 면모의 배경에는 기독교가 그동안 소유해 온 역사적, 교리적 특성과 연관이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는 그 구원관이나 신관, 타 종교관 등에 있어 교리적으로 매우 단호하고 명확한 입장을 고수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으로 인해 기독교는 더욱 선포적이고 단언적인 행동양식을 보일 수밖에 없었으며, 상대적으로 다른 종교에 비해 매우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종교로 비춰지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의 구원관은 죄인 된 우리 인간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그 근간으로 삼습니다. 성경은 예수님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을 우리에게 제시하지 않습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오직 예수로 시작해서 예수로만 귀결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관은 또한 철저한 유일신관을 주장합니다. 그러기에 결코 타종교를 용납해 줄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특히 신, 구약의 여러 이야기(narrative)들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세상의 허탄하고 거짓된 이방종교의 위협과 영향 속에서도 얼마나 굳건히 하나님 한 분만을 신앙해 왔는지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경 이야기에 익숙해진 우리들은 자연스레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 정도”의 단호하고 확고한 표현양식을 자랑스러운 교회의 전통으로 유지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인물들의 순교자적 삶을 뒤따르고자 하는 노력이 다 종교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선포적이고 단언적인 삶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을 성실하게 고수한다는 것이 곧 소통에 있어서 배타적이고 일방적이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의 인물들이 각자에게 부여된 시대와 환경 속에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진리를 변화하는 세상에 소통시키고자 계속해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을 해 왔음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항상 일방적이고 공격적인 표현양식만을 통해 그들의 신앙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다변화하는 역사와 사회 가운데서 성경인물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본질적인 진리의 변질을 통한 세력유지가 아닌,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진리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이를 세상에 드러내고자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노력하는 것이었습니다.


북 이스라엘, 남 유다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생활을 거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하나님’이 아니라 ‘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과감하게 바벨론의 문화와 양식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예루살렘 성전을 초토화시킨 원수 나라의 관원으로서 왕을 모시며 살아가길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니엘’,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라는 히브리식 이름까지 내려놓고 ‘벨드사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라는 바벨론식 이름을 가지고 삼 년 동안 배운 갈대아 언어와 문화를 통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 하는 자들의 하나님이심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곧 그들은 다변화하는 국제정세에서 이전 시대의 방식에 갇혀 하나님 전하기를 주저하기보다, 바벨론 사회와 문화를 재빠르게 소화함으로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는 효과적인 소통의 길을 모색했던 것입니다.


분명 우리의 선포적이고 단언적인 자세는 우리의 확고한 믿음과 신앙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통해 명확하게 확신되고 체험되었기에 우리는 단호한 언어와 행동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러한 가슴 터질 듯한 신앙적 확신과 영혼사랑의 열정이 변화하는 현 시대의 비 기독교인들에게 오히려 역효과로 작용하고 있다면 이러한 방법론은 진지하게 재고되어야 합니다. 신, 구약의 신앙의 선배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시대의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며 이를 세상에 드러냈듯이, 우리 또한 우리 시대에 알맞은 효과적인 소통의 길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의 의도가 우리 딴에는 거룩하고 진지하다 할지라도 후기 현대주의를 살아가는 다수의 비 기독교인들에게 이러한 표현양식이 배타적이고 일방적인 기독교의 횡포로 이해된다면, 우리의 마음을 잘 이해시킬 수 있는 새로운 소통의 언어와 행동양식을 모색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참된 기독교적 관용: ②일방적인 선포에서 정중한 소개로…


“여러분이 가진 희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답변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두십시오. 그러나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으로 답변하십시오.” (표준새번역 개정판, 베드로전서 3:15)


후기 현대주의 사회 속에서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믿는 바를 확고히 하고, 이 믿는 바를 비 기독교인들에게 전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그 누가 반이성적이라고 꼬집어도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창조주이시자 통치자이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성경의 계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를 세상에 알리는데 있어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존재로 인식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결국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리의 변화’가 아니라, 이 진리를 담아 전달하는 ‘소통의 변화’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통의 변화’는 우리가 비 기독교인들의 생각을 진지하게 잘 들어주는 것 못지 않게, 우리의 믿는 바를 그들에게 잘 전달함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소통의 변화’는 ‘선포(proclamation)하는 자세’에서 ‘소개(presentation)하는 자세’로의 전환입니다. 후기 현대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선포적인 표현양식보다 소개하는 표현양식이 더 효과적입니다. 단정적이고 일방적으로 비춰질 수 있는 명제적 언어로만 기독교의 진리를 선포하기보다, 자신의 삶과 경험을 명제적 설명에 덧붙여서 정중하게 소개하는 것이 더 지혜롭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그러나 저의 삶 속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다가오셨습니다.” “이것이 제가 믿고 이해하는 하나님입니다.”


후기 현대주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상대성(relativism)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러기에 선포보다는 소개가, 그리고 명제적인 표현보다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narrative) 함으로서 자신의 믿는 바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물론 우리의 삶을 통해 실제적으로 다가온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여러 종교 중의 하나로 치부해서 소개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종교 다원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자신이 믿는 진리만이 옳다고 목청 터지게 외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삶에 찾아와 자신을 변화시키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정중하게 소개하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분명 이러한 방법론은 대규모 전도집회나 주입식 노방전도하고는 거리가 먼 새로운 소통의 길입니다. 한꺼번에 수십, 수백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집회 중심의 소통이 아니라 영혼 개개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신뢰와 친밀함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소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항시 이 두 가지 양식 모두를 각 사람에 맞게 적절하게 사용해 왔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우물가의 여인과 뽕나무 위의 삭개오에게는 일대일의 관계로 친밀하게 다가가셨지만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의 역사 가운데서 삼천 명을 회심시켰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다원주의와 인간 개개인의 선택을 중시하는 후기 현대주의의 흐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명확하게 인식하는 가운데 각 사람의 기질과 경향에 맞춰서 다가가야 합니다. 비록 현 시대가 후기 현대주의의 영향권 안에 점점 진입하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 가운데는 근대적인 접근방법이 더 익숙한 비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비 기독교인들에게 접근하기 전에 먼저 상대방의 역사와 관점을 잘 이해하는(들어주는 것)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회적 이슈와 관련된 비 기독교인과의 소통에서도, 우리는 자신의 기독교적 관점을 정중하게 소개해야 합니다. 물론 단호하게 입장을 표명해야 되는 경우라면 신중하게 준비함으로 그렇게 해야겠지만, 무턱대고 감정적이고 대립적인 자세로 접근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간혹 일방적이고 선포적인 폭언을 쏟아 부으며 세상과 소통하시기도 했지만(예: 성전에서 매매하던 자들에게), 대다수의 문제에 있어서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의 진지한 대화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일방적으로 그들과 대화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헬라 문화권의 특징이었던 ‘명예와 수치’ 문화(‘Honor/Shame Culture’)를 통해 정중하게 그러나 날카롭게 소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종교 색이 강한 언어나 행동양식을 굳이 강조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사회, 문화에 아주 정통한 지식을 가지고 계셨기에, 오히려 이스라엘 사람들이 실생활 속에서 쉽게 접하는 것들을 비유로 삼아 소통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대화의 말미에는 그들 스스로가 생각해 보고 답변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곧 개개인의 실존적 선택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복음서의 저자는 이러한 예수님의 주장에 항상 권세가 실려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포적이고 단언적인 표현양식을 통한 세상과의 대립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사회, 문화적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고자 하는 열린 마음입니다. 무엇이 이 사회의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소통양식인지를 파악해서 이에 맞춰 우리의 입장을 정중하고 날카롭게 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우리는 비본질적인 사회문제에 힘을 소진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성경 적인 안목을 가지고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사회를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소모적이고 상대적일 수 있는 문제에 매달리기보다 예수님의 공생애처럼,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좀더 본질적인 사회문제에 집중해야 합니다.


결국 사도 베드로의 권면처럼 우리는 항시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소유한 소망(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비 기독교인들이 궁금해 할 때, 또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입장을 알고 싶어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 답변할 것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답변은 배타적이고 일방적인 자세가 아닌, 온유하고 두려운 자세로 소개되어야 합니다.


아쉽지만 우리 사회가 후기 현대주의의 영향권 아래 들어갈수록, 우리는 내가 믿고 신념하는 바를 선포하기보다는 소개하는 데에 의의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확신에 찬 목소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가운데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극적인 역사는 자주 일어나지 않더라도, 비 기독교인과 내가 믿는 진리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고, 또 내가 믿고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소개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잔잔히 역사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소통 가운데 형성된 친밀한 관계 속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온전히 드러낼 때, 하나님은 후기 현대주의 시대 속에서도 다니엘 때와 같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위대하심을 모든 사람들 가운데 드러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달 주제: 후기 현대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지혜 ③ 기다림 속에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