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4년 3월

2. 신약에서의 성전


이제부터 나는 “예수님과 초대 교회가 성전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 한다. 예수님의 사상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그분이 가장 높이 평가했던 세례 요한부터 생각해 보자.


1) “시온 산이 아니라 요단강으로!”–세례 요한


예수님에 대한 논의는 언제나 세례 요한으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이 네 복음서가 우리에게 남겨준 전통이다. 예수님의 공적 사역은 세례 요한을 찾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기독교 역사를 거쳐오면서 “죄 없으신 예수님이 왜 요한이 베푸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셔야 했는가?”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나도 신약학자로서 이 문제를 두고 이런 저런 가설을 세워 보았는데, 지금으로서는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요단강으로 들어가실 때 모든 인류의 문제를 끌어 안으셨다”는 대답을 가지고 있다. 요단 강 안에서 그분은 그분 개인이 아니었다. 그분은 죄에 물들어 죽어 가는 인류의 대변자로서 세례를 받으셨고, 인류 전체의 문제를 붙들고 사역을 시작하셨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도,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도 개인 예수의 사건이 아니라 인류의 대변자에게 일어난 사건이다. 이것은 말장난이 아니다. 나의 표현 능력의 한계 때문에 말장난으로 느껴질 뿐이다. 그분이 대변하셨던 인류 안에 ‘나’도 포함된다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믿음이다(롬 5장). 이것은 논리로 납득되지 않는다. 깨달은 사람은 논리로밖에 설명할 수 없지만, 그 논리로 깨달음에 이르지는 못한다. 그분의 삶을 묵상하는 가운데 성령의 밝혀주심을 받아 깨달아야 한다. 그 때에야 비로소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다!”(요 20:28)라고 고백할 수 있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이토록 중요한 사건이다. 예수께서 요한이 말하고 행동한 것을 다 인정하지야 않았겠지만, 그분이 볼 때 요한의 사상과 삶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 할만했다(마 21:25). 그분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 11:11)라든가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라”(마 11:14)는 말씀을 통해 그를 인정하셨다. 이런 연관성을 생각한다면, 성전에 대한 세례 요한의 태도가 어떠했는지를 먼저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세례 요한은 당시 유대교의 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던 에쎈파 공동체에서 자랐을 가능이 크다. 단편적이지만 그의 사상과 행동은 에쎈파의 일원이었다고 추정하기에 큰 무리가 없다. 앞에서 언급했듯, 광야에서 공동 생활을 하며 율법을 엄격하게 실천했던 에쎈파는 예루살렘 성전 제사가 더 이상 효력이 없다고 믿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가 진정한 성전이라고 주장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동물을 죽여 바치는 제사를 받으시지 않는다고 믿고 그들은 매일 매일 율법을 따라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삶 자체를 제사로 여겼다. 사실, 에쎈파의 성전 비판의 뿌리는 예언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주전 7백년 경에 살았던 아모스는 이미 성전 제사 제도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제기했다(암 5:21-27). 이 전통은 이사야를 비롯한 주요 선지자들에게로 이어진다.


성전에 대한 세례 요한의 태도를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그가 베푼 ‘회개의 세례’다. 이 의식을 통해 그가 요청한 것은 죄에 대한 회개다. 외면적으로 이루어지는 물세례는 내면에서 일어난 회개를 표현한 것이다. 물세례 자체가 어떤 마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요한이 요청한 것은 하나님께 마음을 돌리고(‘회개’를 뜻하는 히브리어 ‘슈브’는 U-Turn을 의미한다) 그 방향 전환에 걸맞게 생활 방식을 고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임박한 심판에서 구원받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당시 유대교는 오직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를 통해서만 죄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유대교의 사고 방식에 따르면 모든 죄는 비고의적인 죄와 고의적으로 범한 죄로 나뉜다. 고의적으로 범한 죄는 선행으로 상쇄할 수 있고, 실수로 범한 죄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림으로 용서받을 수 있었다. 제사는 오직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드려야 효력이 있었다. 톰 라잇(Tom Wright)이 명료하게 지적하듯, “1세기 유대교 체제에서 본다면,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성전과 제사장을 중심으로 마련된 공식적인 통로를 통해서만 죄를 용서해 주신다.” (1)


그렇다면 죄의 용서를 위해 시온 산이 아니라 요단강으로 오라는 세례 요한의 설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는 하나님께 마음을 돌리고(‘회개의 세례’를 받고 생활 태도를 고치면(‘회개의 열매’를 맺는 것)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서 그렇지, 요한은 필경 성전과 제사장과 제사 제도를 비판하는 말과 행동을 자주 했을 것이다. 그 자신이 제사장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 비판은 더욱 강력한 힘을 가졌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요한에게 대한 유대인 지도자들의 증오심의 원인이었다. 그는 그들의 기득권에 대해 무시할 수 없는 중대한 위협이 되었던 것이다. 그를 체포하고 처형한 것은 헤롯 안티파스였지만, 예수님의 경우처럼 그 배후에는 성전 교권의 음모가 있었음에 분명하다.


2) “하늘이 열리다!”–예수 그리스도


예수께서 요단강으로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그분이 성전에 대한 세례 요한의 입장에 공감하셨다는 뜻으로 풀 수 있다. 세례 요한이 체포당하자 예수님은 갈릴리로 물러났다가 얼마 후에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셨다. 그분의 갈릴리 사역에서 가장 큰 물의를 일으킨 것은 “네 죄를 사하노라”는 권위적인 선언이었다. 예컨대, 침상에 들려온 중풍병자를 향해 그분은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고 선언하신다. 거기에 있던 서기관들이 이 말을 듣고 경악한다. 그들은 속으로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9:3)라고 부르짖는다. 그러자 예수님은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9:6)고 말함으로 더욱 자극하신다. 가끔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다. 병을 치료해 주실 때 그분은 거의 예외 없이 먼저 죄의 용서를 선언하신다. 그리고 그 때마다 유대인들은 경악한다.


우리는 그 동안 이 말씀을 예수님의 신성을 입증하는 증거로 사용해 왔다. 하나님에게만 있던 죄 사함의 권세가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믿었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임에 틀림없다는 뜻이다. 루이스(C. S. Lewis)는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에서 “이 발언은 예수님이 진실로 하나님이었다는 가정에서만 납득된다. 죄를 통해 자신의 법이 무너졌고 자신의 사랑이 상처받았다고 느끼지 않는 한 이런 선언을 할 수 없다”(2)고 지적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어 이 발언은 용서받을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서기관들이 느낀 문제점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만이 아니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죄 용서를 선언한 것은 성전 제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행동이었다.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조건으로 용서를 선언하던 요한 보다 더 무지막지한 것이 온 것이다! 이것은 성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다!(3)


이 대목에서 열 명의 나병(4) 환자를 고친 이야기(눅 17:11-19)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있던 어느 마을에서 전도하실 때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찾아와 고쳐 달라고 간청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14절)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두고 예수께서 당시 성전 제사 제도를 어느 정도 인정하셨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의도는 전혀 다른 곳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레위기 규정에 의하면, 나병에 걸린 것으로 확인되면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격리되었다가 제사장에 의해 완치된 것으로 확인되면 정결 의식을 드리고 자기 마을로 돌아오게 된다(14:1-32). 그러므로 열 명의 환자들에게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신 말씀은 “이제 너희 질병이 완치되었으니 성전 제사장들에게 가서 확인 절차를 밟아라”는 뜻이다. 그들의 몸이 아무리 완전해진다 해도 성전 제사장에 의해 인정되지 않으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은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한 한 시위와 성전에 대해 하신 말씀들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나는 이미 ‘시작하는 말’에서 성전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행동(이해를 돕기 위해 ‘시위’라고 이름지었었다)의 의미를 설명한 바 있다. 그분은 성전 바깥 뜰(‘이방인의 뜰’이라고 불렸다)에서 제사용으로 팔리던 짐승들을 풀어주고,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동전을 헌금용 동전으로 바꿔주던 환전상들의 상을 뒤집어엎고, 장사하던 사람들을 흩어 버리신다. 우리 시대의 가장 명망 있는 유대인 학자 중 하나인 제이콥 뉴스너(Jacob Neusner)는 주목해야 할 하나의 논문(5)에 서, 당시 유대교 상황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행동은 성전에서 진행되는 제사 행위에 대한 저항이었다고 결론지었다. 당시로서는 성전 바깥뜰에서의 매매 행위가 사라지면 성전 제사를 모두 중단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성전 제도의 수호자들은 예수님의 그 행동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정확히 알았다. 비록 단발적인 시위로 끝났지만 그 ‘불순한’ 운동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예수를 제거할 음모를 시작했다.


그뿐 아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위용에 대해 제자들이 감탄하는 것을 보시고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막 13:2)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한 번만 했다고 볼 수 없다. 가야바 법정에서 무리들이 그분을 고발할 때 어떤 사람들이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막 14:58)고 증언했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막 15:29)라고 조롱했다. 이 사실은 성전의 비극적 운명에 대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씀했다는 뜻이다. 다만, 예수님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분이 성전을 당신의 손으로 무너뜨리겠다고 말했다고 증언함으로써 그분의 혐의를 중하게 만들려 했다.


성전에 대해 하신 말씀은 두 가지 요점으로 요약된다. 첫째, 성전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파괴될 것이다. 둘째, 내가 새로운 성전을 일으킬 것이다. 예수께서 일으킬 성전은 무엇인가? 우리는 <시작하는 말>에서 요한복음 저자가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보았다.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2:21). 여기서 사용된 ‘육체’는 헬라어로 ‘싸르크스'(육신)가 아니라 ‘소마'(사람의 존재 전체)다. 예수님의 존재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시는 그분의 존재,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요 14:9-10)고 하셨던 그분의 존재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그분을 통해 하나님을 뵙는다. 누군가를 통해 간접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면대면(面對面) 대하게 된다. 바로 이런 까닭에 그분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6)고 말씀하신다. 이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성전을 찾아갈 필요가 없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밝히 드러내 보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큰’이라는 말은 실상 ‘완전한’이라는 뜻으로 풀어야 한다. 완전한 것이 왔다면 불완전한 것은 폐지되어야 마땅하다.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은 아니지만 반드시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두 가지 사건이 있다. 하나는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일어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실 때 일어난 것이다. 복음서들에 의하면,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하늘이 열렸다”(마 3:16). ‘하늘’은 하나님을 가리키기 위해 유대인들이 자주 선택했던 대용어다. 따라서 “하늘이 열렸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막혔던 관계가 예수님께 활짝 열렸음을 뜻한다. 하나님과 인류가 맨 처음 누렸던 친밀한 관계가 이제 회복되었다는 뜻이다. 이와 유사한 상징적 사건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실 때 일어났다.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마 27:51). 성소란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를 가리킨다. 지성소는 두 겹의 휘장으로 성소와 분리되어 있었고, 대제사장 한 사람만이 1년에 한 차례만 이곳에 들어가 백성을 위해 중보 하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지성소의 휘장은 하나님과 인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두터운 장벽을 상징했다. 결국, 성소 휘장이 찢어졌다는 말은 요단강에서 암시된 그 ‘개벽’의 사건이 십자가에서 완성되었다는 뜻이다.


더 이상 말해 무엇하겠는가? 예수님의 말씀, 그분의 사역, 그분의 존재, 그분의 죽음–이 모두가 합하여 부정할 수 없는 한 가지 진리를 천명하고 있다. 예루살렘 성전은 끝났다! 제사도 끝났고 제사장도 끝났다! 이제 하나님에 이르는 길은 예루살렘으로 통하지 않는다! 그 길은 예수님으로 통한다. 그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이르고 그분과 사랑 깊은 관계에 들어갈 수 있다. 첫 인류의 죄로 인해 잃어버렸던 낙원이 이제 회복되었다! 눈을 떠서 우주에 충만한 하나님의 댄스(dance)를 보라! 귀를 열어 우주에 충만한 하나님의 속삭임을 들어라! 그 옛날 시편 저자가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19:3-4)라고 했던 고백이 엄연한 진실임을 확인하라!


3) “보라, 새 세상을!”–바울


바울은 예수께서 남기신 성전 신학을 구체적인 상황에 맞추어 좀 더 상세하게 전개시킨다. 그는 회심한 이후 성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아야 했다. 성전에서 활동했던 유대교 교권자들이 그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고 적개심을 불태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는 회심 이후 한 번도 성전 제사를 드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의 선택이기도 했다. 그는 로마 도시로 다니면서 성전 없는 종교, 제사 없는 종교, 율법 없는 종교, 할례 없는 종교, 안식일 없는 종교를 전파했다. 바울의 이 복음이 유대인 지도자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신학은 역경의 상황에서 더욱 심화되는 법이다. 사람들이 자신이 믿고 행하는 바를 비판하고 박해할 때, 우리는 더욱 치열하게 자신의 입장에 대해 궁구하게 되고, 그 결과 사상이 성숙하고 무르익는다. 이것이 바울의 상황이었다. 자신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반대와 박해 앞에서 그는 자신이 믿고 행하는 바에 대해 목숨을 내 걸만한 확신에 이르러야 했다. 그래서 더욱 기도하고 연구하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 결과, 그가 남긴 편지들은 오늘날 우리가 믿는 신앙의 기초가 될 수 있었다. 바울은 성전의 개념을 부정하는 동시에 그 개념을 확대하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 예루살렘 성전은 끝났다. 완전한 것이 왔으므로 불완전한 성전은 이제 폐지되어야 했다. 그가 율법에 대해 “초등 교사”(갈 3:24)요 “초등 학문”(갈 4:9)이라고 부른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는 성전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율법의 마침(롬 10:4)이듯, 성전도 예수에게서 종국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제 성전은 없다! 반면, 바울은 성전의 개념을 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리고 성도의 몸을 가리키는 것으로 확대시켰다. 고린도전서 1장부터 4장에서 그는 고린도교회의 분열 문제를 다루면서 중간에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3:16-17). 여기서 말하는 ‘너희’는 복수 2인칭 대명사다. 1장부터 4장까지 그의 관심은 오직 믿음의 공동체에 있다. 따라서 그는 믿음의 공동체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표현이 에베소서에도 나온다. “그[모퉁잇돌이신 그리스도]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 믿음의 공동체 안에 성령의 임재가 더욱 충만해지도록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이런 맥락에서 말하자면, ‘교회가 성전이다’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조심할 것이 있다. 교회를 예배당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를 뜻하는 헬라어 ‘에클레시아’는 어원적으로는 ‘안으로부터 밖으로 불러냄’이라는 뜻이지만, 바울 당시에는 ‘모임’이라는 뜻의 보통 명사로 쓰였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을 보고 교회 즉 에클레시아라고 불렀지, 어떤 건물을 보고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처음 에클레시아라는 말이 사용될 당시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별도의 건물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가정에서 혹은 큰 건물을 빌려 모임을 가졌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전이다’라고 말할 때 절대로 건물을 생각하면 안 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몸을 성전에 비유하기도 한다. 고린도전서 6장에서 그는 창녀를 찾는 교인들에게 글을 쓰면서 몇 가지 중요한 발언을 한다. 그 중 하나가 성적 행위에 대한 정의다. 그에 의하면, 섹스(sex)는 단지 성기와 성기의 접촉이 아니라 한 인격과 한 인격의 합일이다(6:16). 주목할 만한 또 다른 말씀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라”(6:19)는 말씀이다. 바울의 인간론에 의하면, 인간의 몸(‘소마’)은 영(‘프뉴마’)과 혼(‘프쉬케’)과 육(‘싸르크스’)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할 때 성령은 영을 통해 우리 존재 안으로 들어와 사신다. 영과 혼과 육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 안에 있으므로 우리의 영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혼과 육에도 영향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영만이 아니라 몸 전체가 거룩한 성전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창녀와 성적인 접촉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훼손하는 일이 된다. 섹스는 몸의 일부가 아니라 몸 전체에 관계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말씀으로써 성전과 우리 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준다. 우리 자신이 성전이 되었는데 성전을 찾아 돌아다닐 이유가 무엇인가? 성전이 된 사람에게는 온 천하가 성전이 된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 눈을 뜨게 해 주시면, 하나님이 없어 보이던 물질계가 하나님으로 충만한 영적 세계로 변한다. 바울은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했다. 의미를 고려하여 새로 번역하자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눈이 뜨입니다. 과거에 보이던 세상은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새로운 세상을!”


이 신비로운 변화를 테이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만큼 명쾌하게 서술한 사람이 또 있을까? “믿음으로 우리가 변화된다 해도 세상의 모든 자연적인 현상들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대신, 동일한 자연 세계 위에 하나의 원리가, 내적 궁극성이 혹은 또 하나의 영혼이 둘러 덮는다. 믿음의 영향 하에 사는 사람에게 이 세상은 외적인 모습을 변모하지 않은 채 생명력 있는 것으로 변하게 된다.”(6) 믿음 안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개안(開眼)의 은혜를 입으면 이 세상 어디에서나 하나님을 뵐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 이 우주 전체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새롭게 보이는 것이다.


4) “완전한 성소에 계시는 분”–히브리서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성전 제사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를 설명한 신학적 논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편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으면서도 여전히 성전 종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신자들에게 쓰여졌다. 그들이 미련을 버리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단 한번의 완전한 제사’의 효력을 완전히 믿지 못한 데 있었다. 과거에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성전에서, 눈에 보이는 제사장들의 중재를 입어, 눈에 보이는 짐승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자신의 죄가 해결되었음을 ‘눈으로’ 확인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눈에 보이는 것 하나 없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 하나 없이, 예수께서 바친 완전한 제사를 통해 자신들의 죄가 용서되었음을 ‘마음으로’ 믿어야 했다. 성전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기뻐했는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뭔가 부족한 듯한 느낌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도 믿고 제사도 드리는, 혼합 종교를 꿈꾸고 있었다.


히브리서 저자는 제사 제도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것인지를 논증하며 담대히 서도록 요청한다. 제사장과 제사에 관한 대목은 그 문제들을 다루는 장(章)에서 논하도록 하고, 여기서는 성전에 대한 논증에만 집중해 보자.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참되고 완전한 성소에 계시다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그[예수]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라”(8:1-2)고 하는가 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9:11-12)고도 한다. 같은 장에서 그는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9:24)셨다고 말한다.


여기서 저자는 헬라 철학자들이 자주 사용했던 이원론적 도식을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성소와 지상의 성전의 차이를 설명한다. 참되고 영원한 성전은 하나님의 보좌이며, 지상의 성전은 하늘 성소의 모형이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십자가 위에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님(10:12)은 믿는 자들을 위해 영원히 중보 하신다. 그러므로 더 이상 제사 드릴 이유가 없다(10:18). ‘참된’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 ‘참되고 영원한’ 성소에서 당신이 단번에 드린 ‘완전한’ 제사를 통해 계속하여 성도들을 위해 중보하고 계시는데, 왜 다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서 ‘불완전한’ 제사장의 도움으로 짐승의 피로 드리는 ‘불완전한’ 제사를 드리려 하는가?


5) 일상 속의 성전


이렇게 본다면, 신약성경의 성전 신학은 일관되고도 아주 명쾌하다. 성전은 폐기되어야 한다! 성전과 함께 제사도, 제사장 제도도 폐기되어야 한다. 온 우주에 충만한 하나님의 현존에 눈멀게 하는 성전은 사라져야 한다. 예수께서는 말씀과 행동을 통해 이 메시지를 아주 분명하게 전달하셨다. 그 메시지를 알아차린 유대교 교권주의자들은 그분을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 그를 제거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요새가 제거 당할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승리했다. 로마의 권력을 이용하여 그분을 제거하고는 문제의 뿌리를 말끔히 뽑아냈다고 생각하고 자축했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민들레는 뿌리를 뽑아 버린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뿌리뽑힌 것 같던 예수님은 어느 새 부활하여 더 큰 세력으로 성장해 갔다. 결국 예수께서 예언한 것처럼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그분을 따르던 사람들은 성전 없는 새로운 종교를 형성해 갔다. 자신의 몸을 성전으로 여기고 섬기며, 믿음의 공동체에 참여하여 성전을 완성해 가며, 천하를 성전으로 삼아 어디를 가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새로운 영성의 시대를 열어갔다. 일상 밖에 있던 성전을 일상 속으로 끌어들여 일상 전체를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영성의 복음을 전파해 갔다.


그러나 아쉽게도, 불과 100년도 지나지 않아 새로운 교권 세력이 등장하여 성전을 다시 쌓고 제사 제도를 만들고 제사장이 되기를 자처했다(7). 예수께서 당신의 전부를 드려 허무셨던 것을 다시 쌓고 새로운 성전 종교로 변모시켰다. 일상 속에 끌어들였던 성전을 다시 일상 밖으로 끌어내어 견고한 요새로 만들어 버렸다. 새로운 성전 종교 체제 하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신음하며 시들어갔다. 영성이 질식할 즈음에 이르러 개혁자들이 나타나 예수께서 가르치신 영성으로 돌아갈 것을 주창했고, 그럴 때마다 영성의 생명력이 회복되었다. 하지만 개혁 운동이 하나의 제도가 되고 기득권이 되면 어김없이 다시 성전 종교로 타락했다. 오늘날 개신교의 수많은 교파가 이 개혁과 타락의 순환을 증언한다. 지금 우리 한국 개신 교회는 교파를 막론하고 성전 종교의 심각한 오류에 빠져 있으며, 따라서 성전 종교의 오류를 수정하는 것이 한국 교회의 영성 회복을 위해 가장 시급한 일이라는 것이 나의 진단이다.


3. 실천적 제안


위에서 설명한 성전 신학을 심각하게 고려한다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고쳐야 할까? 구체적인 실천 사항을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몇 가지 중요한 사항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 건물에 대해 ‘성전’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 교회는 성전이라는 말을 너무 많이 사용하고 있다. 내가 아는 어느 나라의 경우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교회 건물을 성전으로 부르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다. 이름은 기호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특정한 이름은 특정한 해석을 반영하는 것이며, 일단 이름이 정해지면 그 이름에 담긴 해석이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한다. ‘광주 사태’와 ‘광주 항쟁’과 ‘광주 의거’가 다 같은 사건을 가리키지만, 어느 용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리 의식에 큰 변화가 생기는 것과 같다. 따라서 바른 이름을 짓는 것은 바른 생각을 가지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다. 이런 점에서 ‘성전 건축’, ‘대 성전’, ‘지 성전’ 등의 용어들을 모두 버려야 한다. 아울러, 교회 건물을 성전으로 칭하는 모든 찬송가와 찬양들을 경계해야 한다. 통일찬송가의 59장(“성전을 떠나가기 전”)이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이런 찬양을 부르다 보면 무의식중에 그 사고에 지배당한다. ‘예배당’이라는 이름이 제일 바람직하다.


둘째, 예배당을 마련할 때 구약의 성전을 모델로 삼지 말아야 한다. 요즈음 교회를 위한 별도의 건물을 짓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늘고 있는 것 같다. 교회 건물이 포화 상태인 경우, 기존 건물을 임대하여 사용하거나 다른 단체와 공유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법이다. 그러나 ‘성전은 없다’라는 입장이 교회 건물을 따로 짓는 것에 대한 전면적 부정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란다. 교회의 규모나 일상적인 활동을 감안할 때, 어느 정도의 독자 공간을 가지는 것은 반대할 일이 아니다. 문제는 한 지역 안에 지나치게 많은 예배당이 밀집되거나 혹은 예배당의 외관과 기능이 그 건물의 존재 이유를 뒷받침하지 못할 경우에 생긴다. 너무 사치스럽거나 화려하지 않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위화감이나 위압감을 주지 않고, 정갈하고 소박하고 단순하면서도 아름답게 지어진 예배당 하나가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생각해 보라!


미국 신학자 마커스 보그(Marcus Borg)는 논쟁의 중심이 되고 있는 최근의 책에서 이탈리아 아씨시(Assisi)에 있는 프랜시스 성당(Basilica of St. Francis)을 방문한 경험을 회상한다. 적빈(赤貧)의 전도자 프랜시스가 자신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그 장엄한 성당을 보면 “이것은 나와 상관없어!”라고 말할 것이라고, 보그는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그 성당을 전적인 실수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성당은 우리에게 프랜시스를 생각나게 하며, 우리를 아씨시로 이끌고, 그가 품었던 비전으로 눈길을 돌리게 한다. 그리고 프랜시스는 자신을 넘어 예수님과 하나님께 우리를 이끌어 더 큰 비전을 보게 한다.”(8) 나 개인적으로는 중세 시대에 지어진 대부분의 성당들을 ‘실수’로 여긴다. 오늘날 도심에서 목격하게 되는 많은 개신교 ‘실수들’처럼! 하지만 보그의 주장에는 분명히 일리가 있다.


교회의 예배와 교육과 친교를 위해 건물을 마련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할 요소는 하나님의 ‘임마누엘 되심'(“우리와 함께 하심”)을 상징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차피 공간적인 존재들이다. 따라서 공간을 어떻게 꾸미느냐는 우리의 정서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현존을 좀 더 즉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건물의 모든 요소에 상징성을 부여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만, 성전을 모델로 삼는 것만은 피할 일이다. 예배당의 비품들도 성전 비품을 모델로 삼아 만들지 않는 것이 좋다. 성경 안에는 성전 외에도 예배당 건축 디자인에 사용할 만한 상징들이 많다. 그런 것들을 창조적이고 예술적으로 사용하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상징하면 충분하다. 우리의 눈을 건물로 고착시키는 디자인이 아니라 건물을 넘어 하나님을 보게 하는 디자인이 필요하다.


셋째, 예배당이 성전이 아니라면, 믿음의 공동체가 사용하지 않는 시간에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건물을 개방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임할 필요가 있다. 때로, 거대한 예배당 건물들이 주중에 대부분 ‘놀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이 비좁은 땅에서 이래도 되는가?’라는 질문에 마주치곤 한다. 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임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사역의 연장선상에서 비영리 단체의 활동을 적극 유치하고 장려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또한 장소를 빌려 주고도 비판을 받는 경우를 당하지 않으려면, 장소를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공유하는’ 것이라는 사고로 전환해야 한다. 교회의 기득권을 지나치게 주장하지 말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는 여유와 아량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넷째, 우리는 예배당의 실용적 차원과 신비적 차원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앞에서 말한 장로님처럼 예배당을 신성시하는 것도 잘못이고, 반대로 예배당의 신비적 차원을 전혀 무시하는 것도 옳지 않다. 그리스도인들은 물질로만 보이던 이 세상을 영적으로 보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다. 꽃 한 송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듯, 믿음의 공동체를 위해 지어진 건물에서도 하나님의 빛을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 빛은 ‘성전에서만 보는’ 빛이 아니라 열린 눈으로 볼 때 천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빛이다. 예배당은 그 용도와 특별한 디자인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다 직접적이고 용이하게 경험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물론, 예배당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게 해 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형제 자매들과의 참된 교제(‘코이노니아’)다. 하지만 모든 예술이 그렇듯, 하나의 예술품으로서의 예배당은 우리의 영성에 중요한 영향을 줄 수 있다.


예배당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보다 절실하게 경험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우리의 영적 눈이 한층 밝아지고 영적 감각이 한층 예민해져야만 밖으로 나와 물질계 안에서 꿈틀거리는 영적 실체를 보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배당은 우리의 영적 순례의 목적지가 아니라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그곳에서의 예배와 교육과 교제와 섬김을 통해 영적으로 충전된 후 삶의 현장으로 나와 동일한 영적 감각으로 일상의 일들을 섬겨야 한다. 다음 장에서 예배를 논할 때 보겠지만, 공적 예배는 참된 예배의 출발점일 뿐이다. 예배당에서의 그 자세가 일상 생활 속에서도 지속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살펴야 한다. 성전이 타락한 것은 그것이 영적 순례의 종착역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다섯째, 우리는 성전으로서의 교회(믿음의 공동체)를 존중해야 한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지만 또한 믿음의 사람들이 함께 모인 곳에 특별한 방식으로 함께 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라고 했던 히브리서 저자의 호소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성전은 없다!’라는 주장을 공적 예배를 폐하자는 뜻으로 곡해하지 말라.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모아 함께 축하하고 기도하고 가르치셨고 다수의 제자들과 함께 공동체를 형성했었다. 바울도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eoffer)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와서 전해주는 형제가 필요합니다.그는 다만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형제가 필요합니다. 자기의 마음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형제의 말씀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보다 약합니다. 자기 마음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불확실하나, 형제의 말씀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확실합니다.”(9) 성전을 부정하는 것은 공동체를 부정하자는 뜻이 아니라 공동체를 더욱 귀중히 여기자는 뜻이다.


여섯째, 우리 몸이 성전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몸을 살피고 돌보는 것을 비신앙적인 것처럼 생각해 왔다. 영적 삶이란 육적 삶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오해했다. 그래서 몸을 소홀히 하는 것 혹은 학대하는 것을 영적 삶의 한 방법처럼 오해했다. 그러나 우리 몸이 성전이라는 사실은 우리 몸을 섬기는 것이 영성 생활의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스테파니 폴셀(Stephanie Paulsell)은 “몸을 섬기는 삶은 기독교 영성의 핵심적 요소다”(10)라 고 단언한다. 우리의 몸 섬김은 자기 숭배로 흐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몸을 섬기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전인격을 통해 최대한의 사역을 이룰 수 있게 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육과 혼과 영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에 있음을 기억하고, 몸의 모든 차원에 대해 세심한 배려를 베푸는 것이 필요하다.


일곱째, 천하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 충만하신 분이다(렘 23:23-24; 시 139).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마 5:34-35)이다. 우리가 선 땅은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창 28:17)이다. 하나님은 어디를 가든 그곳에서 우리를 만나신다. 패트릭(Patrick)이 흉패에 새겨 넣었었다는 기도문이 우리의 신학(神學)이 되고 세계관이 되어야 한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내 앞에 계신 하나님, 내 뒤에 계신 하나님, 내 안에 계신 하나님, 내 밑에 계신 하나님, 내 위에 계신 하나님, 나의 우편에 계신 하나님, 나의 좌편에 계신 하나님, 내가 누운 곳에 계신 하나님, 내가 앉은 곳에 계신 하나님, 내가 일어선 곳에 계신 하나님!”(11) 시편 139편의 고백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현존을 피해 달아날 곳은 아무 곳도 없다. 달아날 곳은 없지만 피할 방법은 하나 있다. 하나님의 현존에 눈을 감고 외면하고 무시하고 살아가는 것! 영적인 눈이 뜨여 있는 한, 하나님의 현존을 피할 곳은 아무 데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테이야르 드 샤르댕이 기도했던 것처럼 다음과 같이 기도하며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늘 살아가도록 우리 삶을 그분께 맡겨야 한다. “주님, 주님께서 저희 곁 어디에나 계시다는 것을 저희가 알고 또한 느낍니다. 하지만 저희 눈앞에 장막이 드리워져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얼굴빛이 저희를 환하게 비추게 하소서. 주님의 그 깊은 광채가 저희가 빠져 있는 이 거대한 어둠의 가장 깊은 곳을 비추게 하소서.”(12) 눈을 떠 영적 세계를 환히 보고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므로, 다윗이 하나님께 늘 기도하던 단 하나의 소원, 즉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것”(시 27:4)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주여, 이 일을 내게 이루소서!




(1) Tom Wright, Jesus and the Victory of God (Minneapolis: Fortress, 1996), p. 435.
(2) C. S. Lewis, Mere Christianity (HarperSanFranscisco, 1952), p. 52.
(3) 신학도들을 위해 이 문제에 대한 참고서를 추천한다면 Sean Freyne, Galilee, Jesus and the Gospels: Literary Approaches and Historical Investigations (Philadelphia: Fortress, 1988)을 꼽겠다.
(4) 성경에서 ‘나병’으로 번역된 병은 오늘날 의학 용어로 ‘한센 씨 병’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전염성이 있는 난치 피부병을 모두 가리키는 말이다. 물론, 한센 씨 병은 가장 무서운 종류의 피부병이었다.
(5) “Money-Changers in the Temple: The Mishnah’s Explanation”, NTS 35.
(6) Pierre Teilhard De Chardin, The Divine Milieu (HarperCollins, 1960), pp. 110-11.
(7) 지금의 문헌 증거로 볼 때, 대략 주후 150년 경부터 교회가 제도화되기 시작했고, 새로운 교권 체제는 구약의 성전 종교의 모델에 비추어 교리와 제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주교는 대제사장이, 사제는 제사장이, 예배당은 성전이 그리고 예배는 제사가 되어 버렸다.
(8) Marcus J. Borg, The Heart of Christianity (HarperCollins, 2003), p. 98.
(9) 본 회퍼, <신도의 공동생활> (기독교서회, 2000), 26쪽.
(10) Stephanie Paulsell, Honoring the Body (San Francisco: Jossey-Bass, 2002), p. 10.
(11) 패트릭의 기도문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리스도’라고 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성자 하나님이므로 글의 일관성을 위해 ‘하나님’이라는 말로 바꿨다.
(12) Teilhard De Chardin, The Divine Milieu, p. 106. 마지막 한 문장은 생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