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4년 8월

3. “영과 진리로”–예수님의 예배


예수님 시대로 오면 유대교는 훨씬 다양한 신학과 전통으로 분화된다. 제사장들로 형성된 사두개파와 평신도들로 구성되었던 바리새파가 유대교의 두 기둥 역할을 했다. 비교적 열성적이었던 바리새파의 신학과 실천도 부족하다 느낀 사람들은 광야로 나가 공동생활을 하며 수도 생활에 몰두했다. 이들을 에쎈파라 불렀다. 이와는 반대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기 위해 결의한 사람들도 있었다. 열심당으로 불렀던 이들은 폭력을 사용하여 로마의 통치를 뒤집어엎으려 했다. 물론, 신앙에 회의를 느껴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결국, 예수님 시대로 오면 일반 대중의 신앙적 대안들이 매우 다양해져 있었다.


하지만 성전 제사 제도는 유대인들에게 여전히 강력한 영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누리고 있던 절대적 권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유대인 대부분의 신앙은 성전 제사를 중심으로 유지되었고, 마을 곳곳에 세워진 회당은 성전의 역할을 보완하고 있었다. 성전은 제사를 위해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성소였고, 회당은 예배와 교육과 치리를 위한 생활 공동체였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 설교하고 가르치셨다.


앞 장에서 우리는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에 대해 상세하게 살펴보았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 제사 종교에 대해 선지자들보다 더 강한 어조로 비판하셨다. 복음서의 기록상으로 볼 때,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한 번도 성전 제사에 참여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성전 제사 제도가 중단되어야 하며, 머지않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믿으셨다.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13)라는 비판은 성전 제사 제도에 적용해도 딱 들어맞는 말씀이었다.


반면, 예수님은 회당 예배1)에 자주 참석하셨다. 회당 지도자들이 그분에게 의심을 품고 배척하기 전까지 예수님은 회당을 무대로 복음을 전하셨다. 그러나 ‘회당 안에 있던 예수님’은 마치 ‘낡은 가죽 부대에 담긴 새 포도주’(마 9:17)처럼 ‘불안한 동거’였다. 그분의 신학과 삶은 회당 예배가 견디기에는 너무 혁신적이고 파격적이었다. 그분이 회당 예배에 참석한 것은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였지 회당에서의 예배 자체를 인정해서가 아니었다. 회당의 지도자들이 배척하기 시작하자, 예수님은 밖으로 나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설교하고 기도하고 교제를 나눴다. 예배를 위한 지정된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님을, 그분은 행동으로써 천명하셨다.


당시 유대인들이 중시했던 영성 생활의 중심 도구는 ‘기도’와 ‘금식’과 ‘구제’였다. 그들은 하루 세 번의 기도 시간을 지키는 것을 덕목으로 여겼고, 일주일에 두 번 정도의 금식을 이상적인 것으로 알았다. 고의적으로 저지른 죄2)를 해결하기 위해 구제 활동에도 열심을 다했다. 유대교인들은, 한 사람의 영성은 그가 이 세 가지를 얼마나 충실하게 실천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다양한 규칙과 전통이 개발되었고, 이것들은 보통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마 11:28; 23:4)으로 혹은 ‘멍에’로 작용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이러한 형식적 절차와 관습에 전혀 얽매이지 않으셨다. 그분은 하루에 세 번 형식적 기도를 드리는 것에서 초월하여 ‘항상’ 기도하셨다. 늦은 밤과 이른 아침에 기도에 깊이 몰두하곤 하셨고, 항상 하나님과 사귐을 유지하셨다. 그분은 하나님을 ‘아바’(abba)라고 부르셨는데, 이 호칭은 그분이 하나님께 대해 어떻게 느끼고 계셨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바’는 당시에 아버지를 부르는 애칭이었다. 독일의 신약학자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는 현존하는 유대교 문서를 뒤져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른 선례가 있는지 찾아보고는 “‘아바’ 호칭이야말로 예수님의 어법 중 가장 특이한 것이었다”라고 결론지었다3). 즉, 예수님은 이 호칭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유대교 역사상 유사한 예가 없는 혁명적 인식을 드러내셨다. 그분은 하나님을 다정다감한 ‘아빠’로 경험하셨고, 그분과 애정 깊은 대화를 나누듯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예배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형식을 통해 드려지는 것이 아니었다. 일상생활 중에 항상 어디서나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그분의 기도였고 예배였다.


예수님의 예배 신학은 마태복음 5장 23-24절(“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에 잘 드러나 있다. 여기서 ‘형제’를 좁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넓은 의미의 ‘이웃’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한 제사보다 이웃과의 화해를 더 중요하게 간주하신다. 이웃과 화해하지 않고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만 용서받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유대 제사 종교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죄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제사 규정을 마련했다. 모든 죄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께 범하는 것이므로 궁극적으로 그분께 용서 받아야 한다는 말은 옳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으로 구체적인 피해를 입은 당사자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받고 응분의 조치를 취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께 속죄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그것은 제사를 이용해 윤리적 요청을 회피하는 빌미가 되고 만다. 예수님은 이것을 거부하셨다. 그분은 이웃에게 행한 잘못을 당사자에게 먼저 용서받고 그 다음 하나님께 용서를 빌도록 요청하신다. 종교적 행위를 빙자해 윤리적 요청을 회피할 어떤 언떡거리도 허락하지 않으신다.


같은 맥락에서 용서에 대한 말씀을 보자. 그분은 기도에 대해 가르치면서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 용서받기 전에 먼저 당사자에게 용서를 받아내라고 말씀하신 분이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너그러운 용서를 베풂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기대하라고 말씀하신다. 유대교 예배 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의 용서는 제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사 없이도 용서받을 길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다른 사람을 너그러이 용서하는 삶의 태도를 하나님께서는 제사보다 더 귀히 여기신다는 뜻이다. 우리는 앞 장에서, 병자를 고치면서 “네 죄가 사함을 받았다”라고 선언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성전 제사 제도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을 의미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형제를 용서하면 하나님께서도 용서하신다는 말씀도 마찬가지의 의미를 가진다. 제사 없이도 용서받을 길은 있다! 자비를 실천하는 길이다! 유대 제사 종교의 교권자들이 들을 때, 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발언이었겠는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사 종교에 대한 비판은 마태복음 23장에 수록된 말씀에서 매우 자극적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예수님은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의 이중적이고 형식적이며 기만적인 종교 행태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신다. 삶과 일치되지 않는 가르침(1-4), 종교적 신분을 이용해 높임을 받으려는 태도(5-12), 하나님을 이용해 물질적 이익을 구하는 태도(16-22),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의 과정을 무시하고 제사에만 몰두하는 태도(23-24), 내면에 관심을 쏟지 않고 경건의 모양만 꾸미는 위선(25-28), 체제를 지키기 위해 진리의 사람들을 거부하고 박해하는 태도(29-36) 등이다. 이러한 종교적 타락으로 인해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구원을 무효화 시킬 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멸망으로 인도한다(13-15). ‘종교 지도자’라는 허울을 달고 있지만, 그들의 행동은 참된 종교를 훼방하는 사람들이다. 제사는 화려했으나 하나님은 거기에 없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도 없다. 제사와 예배와 모든 경건 행위가 인간적인 욕심에서 비롯하여 인간적인 욕심을 채우는 데 기여했을 뿐이다.


이 말씀 중에서 예배와 관계하여 가장 주목해야 할 말씀이 23절(“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이다. 여기서 십일조를 드리는 행동이 제사 혹은 예배를 가리키는 반면, 정의와 긍휼과 믿음의 삶은 일상생활을 가리킨다. “율법의 더 중한 바”라는 말은 제사에 대한 율법 규정보다 일상생활에 대한 율법 규정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일상생활에서 의롭게 살고 자비를 실천하고 신의를 지키는 것을 제사 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적 예배 시의 우리의 마음 자세와 행동거지보다 일상생활에서의 마음 자세와 행동거지에 더 큰 관심을 두고 계신다.


삶의 예배에 대한 강조는 사마리아 여인과 나눈 대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애석하게도 기독교는 이 말씀의 의미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 예수님 당시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 세운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두 민족4)은 서로 자신의 성전에 가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선지자인 것을 알고는 두 성전 중에 어디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냐고 묻는다(요 4:20).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24절)고 답하신다. 매우 암시적이고 함축적인 대답이다.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히브리말과 헬라말에서 ‘영’은 ‘바람’, ‘숨’, ‘공기’를 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영이시다”는 말씀은 하나님은 어느 장소에 가두어둘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영으로서 우주에 충만하신 분이다. “영과 진리”라는 말은 “진리의 성령”이라는 뜻이다5). 따라서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 사귐을 나누려면 지금 있는 자리에서 진리의 성령을 인식하고 그분과 함께 하면 된다. 그렇게 살아가면 그 삶 전체가 참된 예배가 된다. 그것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다.


이 대화에 이르기 전에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보면 예수님의 진의가 무엇인지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분은 우물로 물을 길러 온 그 여자에게 ‘생수’에 대한 말씀을 하신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4절). 여기서 ‘물’이 성령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요한복음 연구자들의 오랜 합의다. 따라서 지속적인 종교 생활에도 불구하고 채울 수 없는 영적 갈증을 가지고 있던 그 여자에게 예수님은 제도적 종교가 아니라 성령과 함께 하는 참된 영성을 해결책으로 제시하신다. 예수님을 통해 진리의 성령을 만나면 그분이 우리의 삶 속에 마르지 않는 생명수의 샘물을 터뜨려주신다.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대상이며, 하나님은 이러한 영성의 사람들을 찾으신다(23절).


이 같은 설명에 대해 “그럼, 공적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무방합니까?”라고 질문하는 학생들을 나는 자주 만났다. 이것은 너무 성급한 비약이다. 예수님의 경우만 보아도 그렇다. 그분은 열 두 제자를 당신 곁에 두고 함께 공동생활을 하면서 훈련시키셨다. 열둘을 따로 택해 세우신 것은 ‘새로운 이스라엘’을 일으킨다는 상징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실은 그분과 공동생활을 한 사람들의 수는 그보다 더 많았음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가는 데마다 식탁을 여시고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감사했다. 그 식탁이 곧 예배당이었고, 그 잔치가 곧 공적 예배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모든 모임을 폐지 하셨다거나 부정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왜곡이다. 그분은 기존의 종교적 모임에 대한 대안으로서 새로운 성격의 모임을 시작하셨다! 오늘날의 교회는 그분이 가는 곳마다 베푸셨던 식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예수님의 식탁처럼 모임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해방된 영성으로 일구어가는 삶의 예배를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참된 예배는 진리의 영과 함께 살아가는 순간순간의 삶이다! 공적 예배는 이러한 삶으로 우리를 일깨우는 점에서만 존재 의미를 가진다. 진실한 영성의 삶으로 연결되지 않는 공적 예배는 무의미하며 위선적이고 기만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참된 예배자들을 오늘도 찾으신다!


4. “거룩한 산 제물”–바울의 예배


독일의 신약학자 페르니난드 한(Ferdinand Hahn)은 이미 오래 전에 제사와 관계된 구약적 용어들이 신약성경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6). ‘예배’를 가리키는 ‘라트레이아’나 ‘제사’를 가리키는 ‘투시아, ’제물‘을 가리키는 ’프로스포라‘같은 것이 그 예다. 이 현상은 신약의 저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예배를 구약 제사의 맥락에서 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실제로,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초대 교회가 제사 제도나 제사장 제도를 받아들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처음부터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은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고 떡을 떼는 활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행 2:43-47).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모임이 성전에서 드리던 제사 혹은 회당에서 드리던 예배와 전혀 다른 것임을 알았고 또한 그렇게 실천했다. 그들의 모임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들에게 이루신 구원 행동을 확인하고 축하하고 찬양하는 것이었다. 존 버크하르트(John Burkhart)는 “예배란 하나님께서 행해 오신 것, 행하고 계신 것 그리고 행하실 것에 대한 축제적 응답이다”7)라 고 정의한 바 있는데, 실로 초대 교회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적 응답이었다.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그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생활 방식을 창안해야 했다. ‘유대인’으로서 그들은 율법을 지켰고 안식일에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거나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은 안식일 저녁에 함께 모여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서로 권면하며 떡을 떼고 기도하고 말씀을 들었다. 이런 까닭에 그들의 모임8)은 유대교인들만의 모임과 다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방인들 혹은 이방화된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자, 유대교인들의 모임과의 성격적 차이는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 같은 전환기에 특별한 공헌을 한 사람이 바울이다. 바울은 유대교에 속한 한 종파와 같던 그리스도교를 독립된 종교로 발전시키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했다. 유대교의 편에서 본다면, 바울은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야훼 신앙을 배반하고 사교(邪敎)의 지도자가 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바울을 증오했고 배척했다. 이러한 상황이 바울을 이방인들에게로 내몰았고, 그가 전파한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은 유대교와 더욱 멀어졌다. 이방인의 사도로서 바울은 그리스도 신앙으로부터 유대교적 흔적을 지워내는 일에 부심했다. 바울이 성전의 의미를 우리 몸으로 그리고 믿음의 공동체로 확대시켰다는 사실은 앞장에서 충분히 설명한 바 있다.


바울의 예배 신학을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구절은 로마서 12장 1절이다. 그는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에서 구원의 원리를 설명한 다음, 12장부터 구원받은 사람의 삶에 대해 다루기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구원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바울은 12장 1-2절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대원리를 천명한 다음, 3절부터 16장까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한다.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는 한 문장에 농축되어 있다.


바울은 자주 ‘몸’(소마)과 ‘육’(싸르크스)을 구분해 사용한다. ‘몸’은 영과 혼과 육을 다 포함한 전체로서의 인간 존재를 말하고, ‘육’은 육체만을 가리킨다. 따라서 “너희 몸을”이라는 말은 “너희의 전 존재를” 혹은 “너희 삶 전부를”이라고 해석해야 옳다. “산 제물”이라는 말은 역설적 표현이다. 모든 제물은 죽여서 바치게 되어 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 전 존재를 제물로 바치되, 죽여서 바치지 말고 살아있는 상태에서 바치라고 요청한다. 그러니까 첫 번째의 명령문을 의미를 따라 풀어 쓴다면 이렇게 된다. “하나님이 보시고 기뻐하실 수 있도록 너희 전 존재를, 너희 삶 전체를 거룩하게 살아라. 너희 자신이 산채로 바쳐지는 제물이 되게 하라.” 그런 다음 바울은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덧붙인다. “영적 예배”라는 번역은 직역이 아니다. 헬라어의 뜻을 따라 달리 번역하자면 ‘합당한 예배’(표준새번역) 혹은 ‘이성적 예배’ 혹은 ‘제 정신이 든 예배’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좋은 번역은 <공동번역>에서 채택한 ‘진정한 예배’다. 그렇다면 바울은 일상생활 전체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의 과정을 진정한 제물이요 진정한 예배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는 권고는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함으로 산제사의 삶을 살라는 뜻이다.


이와 함께 로마서 15장 16절도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소명에 대해 피력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바울이 자신의 소명을 ‘제사장’이라는 말로 표현한 유일한 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제사장직은 무엇인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이 성령 안에서 거듭나고 거룩해짐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섬기는 역할이다. 제사 종교는 율법의 규정에 따라 정결례를 행하고 제사를 드려야만 하나님께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정결례나 제사가 아니라고 본다. 그들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성령을 받고 변화되어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다. 바울이 스스로를 제사장이라고 부른 이유는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직분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살아있는 영혼들을 복음으로 거룩하게 변화시켜 ‘산 제물’로 바치는 직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을 ‘공적 예배 무용론자’로 보는 것은 오해다. 그는 고린도전서 11장과 14장에서 공적 예배에 대한 깊은 관심을 드러낸다. 그는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11:2)고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전통’이란 공적 예배에 대한 전통을 가리킨다. 바울은 로마 도시에 교회를 세우고 믿음의 전통과 예배의 전통을 가르쳐 주었다. 이 구절로 미루어 볼 때, 고린도교인들은 바울이 전해 준 예배 형식을 잘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공적 예배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주의 만찬’을 먹을 때 자주 발생한 혼란(11:17-34)과 열광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낸 혼란(14:1-25)이 대표적인 문제로 부각되었다.


바울은 이 문제들을 다루면서 ‘적실성’과 ‘유익성’을 예배 형식의 두 가지 기둥으로 제시한다. 그는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11:17)고 말하는가 하면,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14:26)고 권고하기도 하고,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14:40)고 말하기도 한다. 이 모든 권면을 종합해 볼 때, 바울은 공적 예배 형식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절대적인 법은 없으며, 모든 것을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위엄에 어울리는지?”(적실성)와 “예배 참여자들에게 신앙적으로 유익이 되는지?”(유익성)의 질문에 따라 창조적으로 고안하고 실행하라고 권고하고 있는 셈이다.


예배의 적실성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응답하는 것이므로 그분의 위엄과 영광에 어울려야 한다. 이방 종교의 제사 관습을 사용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다. 예배의 유익성도 마찬가지다.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통해 어떤 유익을 얻기를 기대한다. 문제는 “우리가 예배를 통해 기대해야 할 유익이 어떤 것인가?”의 질문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말하는 예배의 유익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회개하며 가르침을 받고 새로워짐으로 “지혜에 장성한 사람”(14:20)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적 예배를 통해 일상생활을 산 제물로 바칠 수 있도록 변화 받고 성화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공적 예배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삶 전체의 예배가 목적이며, 따라서 공적 예배는 이 목적을 위해 이바지할 수 있도록 고안되고 실천되어야 한다.


5. “경건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히브리서의 예배


앞에서도 언급했듯,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과거에 제사 종교의 관행에 깊이 빠져 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제사 종교를 떠났으나, 머지않아 다시금 제사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에 빠졌다. 생각해 보라. 정기적으로 짐승을 잡아 바침으로 그 동안의 죄를 씻어내곤 하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의 은혜를 받아들여 한 순간에 제사를 중단했을 경우, 뭔가를 상실한 것 같은 느낌에 빠지기 쉽지 않겠는가? 이것은 마치 한 주일에 한 번 정도는 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하던 우리가 미국에 와 사는 동안 매일 샤워를 하면서도 왠지 몸에 때가 남은 것 같아 목욕탕에 가고 싶어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편지를 통해 매일 샤워(영적 교제)하는 사람이 목욕(제사)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초보자에게는 지루하고 복잡하게 느껴지기에 충분한 전반부의 신학적 설명(1-7장)을 끝내면서 저자는 이렇게 요약한다.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8:1-2). 이것이 히브리서의 요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하늘의 성전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참된 대제사장이므로, 우리에게는 더 이상의 제사가 필요 없다(9:11-14). 우리는 짐승의 피로 거룩함을 얻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10:10) 거룩함을 얻었다. 예수님은 완전한 제사를 드리심으로 성전 제사를 폐지하셨다. 따라서 우리가 다시금 제사를 드리려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값진 희생을 무효화시키는 일이 된다. 결론은 분명하다. “이것들[죄와 불법]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10:18).


그리스도인들은 제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대제사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영원하신 참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입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4:16)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저자는 마침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10:19-20).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하늘 보좌를 향해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더 이상의 피 흘림이 필요 없다! 더 이상의 중재가 필요 없다! 하나님께 이르는 길(“살 길” 즉 참 된 생명에 이르는 길)이 우리에게 활짝 열렸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공적 예배가 필요 없는 사람들인가? 그렇지 않다. 저자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10:25)고 경고하는 한 편,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13:15)고 권고한다. 그는 또한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13:10)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의 제단’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인들만의 독특한 예배를 상징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또 하나의 비밀스러운 말씀 즉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12:22-24)는 말씀도 역시 그리스도인들의 공적 예배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를 드러낸다.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공적 예배는 마지막 날에 누리게 될 그 모든 축복을 미리 경험하는 장소다.


공적 예배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받은 부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깨닫고 새로운 태도로 삶을 살아간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받은 약속이 무엇인지를 진실로 깨달으면 우리의 삶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12:28). 혹은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10:21-24). 공적 예배를 통해 진실을 깨달을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두 가지 변화는 ‘내면의 성화’와 ‘일상의 성화’다. 진리를 깨달으면 죄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려는 열심이 일어나게 되어 있고, 이런 열심이 성숙되면 일상생활에서 구체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저자는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13:16)고 말함으로, 일상생활에서의 선한 생활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제사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6. “예배드리듯 살기”–실천적 제안


구약과 신약을 통해 예배의 본질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공적 예배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다. “예배란 하나님께서 행해 오신 것, 행하고 계신 것 그리고 행하실 것에 대한 축제적 응답이다”라고 정의했던 버크하르트는 그리스도교 예배가 가져야 할 세 가지 요소를 ‘깨달음’(acknowledgment), ‘재현‘(rehearsal) 그리고 ’선포‘(proclaim)로 정리했다9). 이 모든 요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다. 둘째, 진정한 예배는 일상생활 전체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며 그분의 뜻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공적 예배는 일상생활 전체를 예배로 변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영적 훈련이다. 공적 예배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삶의 예배가 목적이다. 셋째, 공적 예배의 형식은 얼마든지 창조적으로 변화될 수 있다. 다만, 하나님의 위엄에 어울려야 하고 참여자들의 영성을 깨우고 키우는 데 유익하면 된다.


이러한 예배 신학에 바탕을 두고 우리의 예배적 삶을 위해 몇 가지 실천적인 제안을 해 보자. 첫째, 한국 교회의 예배를 지배하고 있는 제사적 용어와 상징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배당을 성전으로, 목회자를 제사장으로 보는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축제적 응답’으로서의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지 않는 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풀기 위해 혹은 물질적인 복을 구하기 위해 제사 드리는 심정으로 예배에 임하게 된다. 이미 주어진 은혜와 복에 눈뜨지 못하고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구한다. 삶의 예배를 소홀히 하고 공적 예배에 집착하게 되고, 공적 예배와 삶이 분리되는 잘못에 빠진다. 따라서 예배를 제사로 오해하게 할만한 모든 요소들을 제거해야 한다. 예배 시간에 자주 듣게 되는 ‘제물’, ‘제사’, ‘제단’ 등의 용어들을 가능한 한 쓰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초대 교회의 전통이다.


둘째, 공적 예배를 준비하고 집례 할 때 삶의 예배를 준비시키는 것에 목적을 두어야 한다. 이러한 사상의 바탕에서 예배의 모든 순서와 내용을 정해야 하고, 이 사상이 명료하게 전해지도록 해야 한다. 예컨대, 축도를 할 때 “성부, 성자, 성령의 은혜가 예배를 마치고 세상으로 나가는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라고 하는 것과 “성부, 성자, 성령의 은혜가 참된 예배 현장으로 나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함께 하시어 거룩한 산제사를 드리게 하소서”라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사고 방식과 행동 방식으로 인도한다. 현재 한국 교회 목회자들과 교인들의 의식이 너무나 깊이 제사적 패러다임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지속적이고 의도적인 노력이 없이는 예수님의 죽음을 무효화시키는 발언을 반복하는 잘못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공적 예배 시에 순서를 맡은 사람들은 바른 예배 신학에 기초하여 할 말을 미리 작성하여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즉흥적으로 말하더라도 바른 예배 신학이 반영될 정도로 의식이 변화될 때까지!


셋째, 목회자와 성도들은 영감이 충만한 감동적 (공적) 예배를 위해 정성을 다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읽고 “어, 공적 예배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네?”라고 생각한다면 다시 읽고 생각해 보기 바란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공적 예배보다 삶의 예배가 더 중요하다. 하지만 일상생활 전체를 예배의 차원에서 산다는 것이 한편으로 얼마나 가슴 벅찬 삶이며 다른 한 편으로 얼마나 도전적인 일인지를 안다면, 그 가슴 벅찬 도전을 위해 공적 예배를 더욱 귀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은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열망을 만족시키지 않는다. 반대로 그 열망을 더욱 심화시킨다. 예배에 참석함으로 하나님을 갈구하던 우리 심령이 만족을 얻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깊어진다. 그 열망과 갈증은 예배 시간을 넘어 한 주일 전체 안으로 스며든다”10)고 했다. 좋은 맛이 미각을 개발시키고 더 강화시키듯, 영감 있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면 하나님께 대한 열망이 더 강해지고 예민해진다. 그 열망이 한 주일 내내 하나님과의 사귐을 추구하게 하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도록 이끈다. 목회자와 성도 모두가 공적 예배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정성을 다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목회자는 예배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을 매번 새로운 마음으로 섬기는 것은 웬만한 영성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넷째, 예배 형식의 문제는 가변적이고 문화적인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최근에 열린 예배(contemporary worship)가 유행하면서 때로 교회가 이 문제로 인해 분열되는 경우를 본다. 이렇게 교회가 분열할 정도로 어느 한 형식의 예배를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예배 형식은 회중의 문화와 전통과 기호에 관한 것이다. 다만, 그 예배 형식과 내용이 하나님의 위엄에 어울리고 참여자들의 영성을 깨우는 것이면 된다. 현재 미국 연합감리교회의 대표적 목회 성공 사례로 꼽히는 부활의 교회 아담 해밀턴(Adam Hamilton) 목사의 사례는 이 점에서 꽤 의미 있다. 그는 1990년에 캔사스 주의 한 도시에서 교회를 개척하면서 주변 교회에 대한 조사를 했다. 그 결과, 모든 교회에서 열린 예배를 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해밀턴 목사는 자신도 열린 예배를 제공할 이유가 없음을 깨닫고 전통적 형식의 예배를 드리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는 창조적이고 영감 있는 목회를 시도한 결과 10여년만에 6천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했다. 그는 전통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경험한 바로는 비종교인들이나 형식적인 종교인들(우리 교회에 등록한 사람의 70퍼센트 정도가 이런 사람들이다)이 전통적인 것들에 대해 가지는 거부감은 그것들을 적절하게 해석해줌으로 쉽게 해결된다.”11)


다섯째, 목회자는 성도들의 영성을 지도할 때 좀 더 멀리 보도록 힘써야 한다. 공적 예배 참석도가 그 사람의 영성과 언제나 비례하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일상생활에서의 문제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교회에서 맴도는 사람들을 그 동안 많이 보아왔다. 반면, 공적 예배 참석률은 부진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목격해 왔다. 따라서 목회자는 성도들이 공적 예배를 드리는 태도와 함께 그들의 개인적인 삶의 예배가 어떤지를 자주 점검해 보아야 한다. 목회의 참된 성공은 주일 예배 참석자의 수보다는 교인들의 삶의 질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배와 심방과 상담과 교육 등을 통해 각자가 거룩한 산제사를 드리도록 돕는 것이 목회자의 가장 큰 과제다. ‘예배드리듯 사는 삶’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는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거듭난 사람(Born-again Christian)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Made-again Christian)이 목회의 과제인 것이다.


여섯째, 성도의 입장에서는 공적 예배를 귀중히 여기는 동시에 다른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언제나 하나님과 교제하며 거룩한 산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반복해서 미안하지만, 영성 생활의 초점은 일상생활 전체를 예배로 만드는 것이다. 매사에 예배드리듯 행동하는 것이다. 먹는 일도, 자는 일도, 매매하는 일도, 가르치는 일도 모두 예배 드리듯 섬기는 것이 영성 생활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과 일상생활이 일치되도록 늘 경계하고 노력해야 한다. 이 일을 이루는 데 있어 영감 있는 공적 예배와 함께 다른 영적 훈련이 필요하다. 매일 충분한 시간 동안 경건 생활을 하고, 정기적으로 영적인 사람들과 영적 교제를 나누며, 정기적으로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할 때 영적으로 항상 깨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고, 그런 상태에서만 우리는 행하는 모든 일을 예배처럼 섬길 수 있다.




1) 회당 예배는 남성 10인 이상이 모일 때 성립되었다. 여성은 아무리 많이 모여도 예배 성립 조건에 기여하지 못했다. 회당 예배는 쉐마의 낭독, 18조 기도문 낭송, 율법 낭독, 예언서 낭독, 강해와 권면, 축도 순으로 이어졌다.
2) 유대 신학에 의하면, 과실로 범한 죄는 제사로 용서받을 수 있지만, 고의로 범한 죄는 용서받을 수 없었다. 고의로 범한 죄는 선행으로 상쇄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구제 활동은 상대방의 필요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3) 요아킴 예레미야스, <예수의 선포> (왜관, 분도출판사, 1995).
4) 엄밀하게 말하면 두 ‘민족’이라는 표현을 쓸 수 없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 취급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두 민족처럼 분리되어 있었다.
5) 영국 출신의 신약학자 C. H. Dodd가 이 해석을 제안한 이후, 이것은 신약학계의 정설로 인정되어 왔다.
6) Ferdinand Hahn, The Worship of the Early Church (Philadelphia: Fortress, 1973), pp. 36-38.
7) John E. Burkhart, Worship: A Searching Examination of the Liturgical Experience (Philadelphia: Westminster, 1982), p. 17.
8) 그리스도인들만의 모임이 나중에 ‘에클레시아’(교회)로 불렸다. 이것은 ‘시나고게’라고 불렀던 유대교인들의 모임과 차별 짓기 위해 지어진 이름이다.
9) Burkhardt, Worship, p. 29.
10) Eugene Peterson, A Long Obedience in the Same Direction (Downers Grove: IVP, 2000), p. 56.
11) Adam Hamilton, Leading Beyond the Walls (Nashville: Abingdon, 2002), p. 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