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4년 3월호


동양의 사상이나 철학은 뛰어난 관찰과 직관으로 대변되는 그들의 특징적 장점들로 인하여 삶이나 인간 자체에 대한 깊은 이해에 도움을 주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성경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고전의 문구들 가운데에서 오히려 신선한 어법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잘 표현해주는 듯한 말이나 내용들을 종종 발견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만물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 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보는 것만 같아 흥미롭다. 개인적인 소견으로, “어떤 리더가 참된 리더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노자가 제시하고 있는 ‘리더의 네 가지 유형’은 그 한 좋은 예가 된다고 사료된다.


노자의 도덕경은 약 5천 자 내외로 구성된 비교적 짧은 책으로, 그 첫 사분의 일 지점을 보면 ‘다스리는 자’에 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太上下知有之 其次親之譽之其次畏之 其次侮之


다소 의역하여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백성들이 그의 존재를 알며, 차선(second best)의 지도자는 백성들이 그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따르는 지도자는 그보다 못한 지도자이며,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지도자는 백성들에게 경멸 당하는 자이다.”


재미있는 것은, 백성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 지도자는 차선의 리더일 뿐 가장 훌륭한 리더는 아니라고 언급하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말하기를, 최고의 지도자는 백성들이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다른 말로 하면, 뭇 사람들에게 적극적인 사랑과 존경을 받고있다고 해서 최고의 리더인 것은 아닌데, 그것은 가장 훌륭한 형태의 리더십이 발휘되고 있다면 사람들은 자기의 삶과 소명에 더욱 충실하게 될 뿐 특별히 그 리더 자체에게 집중하거나 연연해 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자가 말하는 가장 훌륭한 리더십은, 앞에서 강압적으로 끌고 가거나 소위 카리스마를 내세우는 스타일이 아니라, 뒤에서 말없이 따라오면서 혹 엇나갈 때마다 “막대기와 지팡이”로 툭툭 쳐주며 인도하는 가운데 스스로 바른 길을 깨달아 가게끔 이끌어주는 형태이다. 이런 경우, 스스로의 자발성이 위축되거나 손상을 입지 않으므로 자신의 능력과 의지를 다하여 일에 임하게 되는 장점은 있지만, 일이 되어진 결과 자체에 대해서 대개는 스스로의 덕택에 그렇게 된 줄로 생각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은 리더에게 어떤 특별한 감사나 존경을 줄 필요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공기나 물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존재에 대해 매순간 특별한 경외심이나 감사한 마음을 품지 않는 것과 같다.


이러한 형태의 리더십은 언뜻 보기에는 수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적극적인 관찰과 기다림, 그리고 신뢰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것은 전체를 조망하는 안목과 확신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며, 그 대상자들 한 영혼 영혼에 대한 지속적이고 애정어린 관심이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혹 일의 진전이 더디거나 뜻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는 답답함 속에서 기다려줄 줄 아는 인내가 요구되기도 하며, 이를 위해서는 근거도 보장도 없는 상황 가운데서 거의 속아주는 것에 가까운 신뢰가 수반되어야 하기도 한다. 붙잡아야 할 것을 끝까지 붙잡으면서도 스스로 지치지 않을 수 있으려면, 끊임없는 자기연마와 더불어 그 일을 둘러싼 소명 (또는 언약) 자체가 지속적으로 갱신되는 내면적인 과정 또한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런 모든 과정들을 다 거치고 난 뒤에, 그 공로에 대한 사람들의 인정이나 칭찬조차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비워진 마음이 있어야만 한다. 즉, 자기 분량의 수고를 애정어린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여 하고 난 후에 댓가도 없이 이름도 없이 자신의 존재를 감출 수 있는 사람만이 이러한 리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리더십이 가능한가? 사상가나 철학자의 이야기들에는 “되어져야 할 삶의 모습” 은 있지만 “어떻게 그러한 모습으로 되어갈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주어져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아마도 어떤 특정한 방법에 따라서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 가기에는 너무나도 난제들인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만큼, 그 내용을 생각하고 말할 수 있었다고 해서 이러한 리더십의 실제적인 구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현실적으로는 아직도 요원한 일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나의 삶의 주인이시며, 내 자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오직 내 안에 그분만이 사신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누구보다도 이러한 리더십을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일 것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부인이 있는 사람일 것이며,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는 일을 주 안에서의 생의 소명이요 영광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므로, 주님의 부르심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나보다 남을 귀히 여기며 복음 앞에서는 내 생명조차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살아가는 그의 삶 가운데서 이런 리더십의 모습 또한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자가 말로써 표현한,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삶으로 본을 보여주셨던 이러한 리더의 모습에 비추었을 때, 나 자신의 지난날의 모습은 과연 어떠하였던가? 믿음과 사랑 안에 온전히 서있지 못하거나 성실하지 못하여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는” 인도자가 되었던 것은 혹 아니었는지? 주님의 영혼들을 일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일의 성취를 위한 도구로 삼거나, 그들로 하여금 의무감 때문에 “마지못해 따르게 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더러는 시의적절한 관심과 사랑과 가르침을 주어 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리더가 혹 될 수 있었을런 지는 몰라도, 칭찬과 인정을 받기 원하는 유혹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주님이 아닌 나 자신을 바라보게 하거나 아니면 주님과 더불어 나 자신도 늘 함께 바라보게 만드는 ‘영혼의 걸림돌’이 되고 말았던 것은 아니었는지?


언젠가 신앙의 멘토 한 분으로부터, 그분이 “보이지 않는 격려자 (hidden encourager)” 라는 모토(motto)를 일관되게 지니고 살아왔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난 시간들 가운데서 개인적으로 도움을 받아왔던 영적 멘토들 몇 분을 떠올려보면, 그분들은 참으로 “보이지 않는 격려자” 의 면모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몇 년간이나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살펴주어 오신 분들이었고, 올바른 신앙의 길로 스스로 들어설 수 있도록 지대한 영향을 주어 오신 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겸손하고 친근한 자세 때문에 오래동안 멘토링을 받고 있는 줄 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게 했던 분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뒤늦게나마, 눈에 보이지는 않았으나 말없이 할 일을 이루어갔던 그분들의 리더십이야말로 노자가 말하는 리더십이며, 예수님께서 스스로 모범을 보이셨고 말씀 안에서 오늘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시는 성경적인 리더십이었음을 깨닫고 있다. 


나 자신 또한 그러한 온전한 리더쉽이 실천되는 삶을 살 수는 없을런지…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랑과 은혜로써 불꽃같은 시선을 내게 두고서 매순간 인도해 주고 계시는 “가장 훌륭한 리더” 이신 주님께서 내 안에 함께 하시기에 소망을 가져본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주님의 선하고 온전하신 리더쉽이 나의 삶 가운데에도 조금이나마 묻어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고린도전서 3: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