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4년 6/7월호


몇해 전, 코스타에서 다시 뵙게 된 한 은사로부터, 학교에서 하고 있는 연구가 성경 공부 및 묵상과의 사이에서 어떻게 서로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는지에 관한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연구에 사용된 방법들은 성경 말씀을 체계적으로 묵상하고 깊이 이해하는 일에 도움을 주었고, 반대로 성경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습득한 방법론들은 논문을 찾아 읽고 분석하며 종합하여 새로운 연구 주제로 연결시키는 일에 그대로 적용이 되었다는 경험적 통찰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며, 그 모습은 다양한 형태로 드러난다. 우리의 믿음은 말이나 생각으로만 그치는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삶과의 분명한 연결고리를 가지는 실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성경 말씀의 ‘원리’가 매일매일의 삶과 만나 ‘적용’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말씀이 온전히 이해되고 우리 안에서 ‘생명’으로 자라나는 일은 어찌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삶의 의미를 분명하게 세워주는 신앙, 그리고 신앙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삶의 상호 역동적인 관계의 열쇠가 말씀 묵상과 기도를 바탕으로 한 주님과의 깊은 교제에 있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 사람은 교회 예배나 부흥 집회, 또는 인터넷에서 듣는 설교로부터는 곧잘 은혜를 받지만 매일매일 스스로 말씀 안에서 삶 가운데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는 상대적으로 부족함을 보이기도 하며, 다른 사람은 한 그루의 나무를 살피는 일에는 잘 훈련이 되어있지만 숲 전체를 보는 일을 더러 놓치기도 한다. (사실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나 자신의 일일 때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우리 모두가 일생을 두고 이루어가야 할 신앙 성장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한 순간에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다만,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과정 자체와 방법론에 관한 고찰이 혹 깊은 묵상을 이루는 데에 우선적으로나마 도움을 주는 부분이 있다면 그러한 측면들을 한 번쯤 고려해 보는 일도 의미없지는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런 면에서, 책을 읽는 방법론에 관한 고전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는 “어떻게 책을 읽을 것인가? (“How to read a book?” M.J. Adler & C. van Doren 저)”라는 책은 나름대로의 유용성을 제공한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어떻게 정보의 습득에 그치는 것이 아닌 ‘이해를 위한’ 독서를 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지식의 증가에 그치는 것이 아닌 ‘마음을 자라나게 하는’ 독서를 할 것인지에 대하여 단계별로 책 읽는 방법을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상위 단계가 하위 단계의 측면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이 책에 제시된 네 가지의 분류는 서로 다른 ‘종류’가 아니라 상호 연관성을 갖고 발전하는 ‘단계’를 표현한다:




  1. 기초적 읽기 (Elementary reading)
  2. 관찰적 읽기 (Inspectional reading)
  3. 분석적 읽기 (Analytical reading)
  4. 합적 읽기 (Syntopical reading)

첫 번째 방법인 ‘기초적 읽기’는, 주어진 문장이 무슨 뜻인지, 본문의 이야기와 비유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의미 그 자체를 파악하는 단계이다. 이는 마치 외국어를 번역할 때 원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노력하는 과정과 같다.


첫 번째 단계에서 이룬 문장과 단락의 문자적 이해를 바탕으로, 두 번째 단계인 ‘관찰적 읽기’ 에서는 문법과 문맥에 주목하면서, 본문이 가지는 전체 구조를 보다 ‘구조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 단계에 이르면, 전후 문맥 상에서 현재의 문장 또는 문단과 그 앞뒤를 이어주는 이야기의 흐름에 주목하게 된다. 이러한 ‘관찰’은 어디까지나 글의 이야기 전개 과정을 충실히 따라가며 ‘새겨듣는’ 것인 만큼 저자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독서 방식이라는 점에서 다음 단계인 ‘분석적 읽기’와는 구별된다.


세 번째의 단계인 ‘분석적 읽기’의 경우는, 반대로, 나름대로 생각의 틀을 가진 독자 스스로가 읽기를 주도하는 독서 방식이다. 두 번째의 읽기가 어느 정도 정해진 시간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세 번째의 형태는 많은 시간이 걸리는, 즉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읽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것은, 읽으면서 수시로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본문 안에서 답을 찾아보기도 하며, 이미 알고 있었던 일들과 연계하여 스스로 답을 달아보는 가운데 때로는 비평가의 입장에 서기도 하면서 글을 재구성 해보기까지 하는 적극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책을 읽는 경우에 관한 한 가장 높은 수준의 읽기가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단계인 ‘종합적 읽기’는 세 번째의 단계가 여러 권의 책에 적용되어 비교 분석 및 통합을 이루는 과정이다. 따라서, ‘종합적 읽기’는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이루어졌던 ‘분석적 읽기’의 방법론이 여러 책들에 창조적으로 확대 적용되는 것으로도 (i.e., “How to read two books?”) 이해할 수 있다. 이 단계에 이르러서는 독자가 새로운 관점을 창조적으로 도출해 내기도 하므로 고유성(originality)을 지닌 논문을 쓰는 연구 과정에 비견되는 독서이기도 하다.


이러한 독서 방식들에 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첫 세 방법들에 대해서는 점과 그래프의 관계로 한 번 표현해 보았다(아래). 여기서는 나타내지 않았지만, 네 번째의 읽기는 ‘분석적’인 그래프가 여러 개 겹쳐있어 어떤 경향을 표현하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읽기의 단계들과 방법들을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데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첫 번째 읽기는 우리가 어떤 본문을 처음 읽을 때라면 언제나 해당되는 방법이다. 초보적인 단계이지만, 이후 모든 단계의 기초가 되는 만큼 그 중요성이 낮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한 번 두 번 성경을 반복하여 읽으면서 익숙해짐에 따라 우리는 그 본문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기초적인 읽기’를 무시하는 경향이 생기기 때문에, 묵상은 매너리즘에 빠지고 본문으로부터는 아무런 새로운 것도 얻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익히 알고 있는 본문일지라도 그 말씀들을 다시 대할 때에는 내가 이전에 알고 있던 것들을 다 내려놓고 ‘초심으로’ 돌아가서 ‘기초적 읽기’부터 새로이 시작하는 것이 오늘 주신 말씀 앞에 겸손함을 유지하는 길이기도 하다.


귀납적 성경 공부나 QT시간에 우리는 본문 말씀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그러나 놓치는 것 없이 받아들이고자 많은 시간을 기울이는데, 바로 이 때가 두 번째 읽기 과정에 해당된다. 여기서는, 문맥과 문법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놓쳤을 수도 있었을 성경의 의미를 건져올리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장 2절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의 문법과 문맥을 자세히 짚어보면, 성경이 말하는 교회란 건물이나 조직, 또는 기관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 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다.


본문 말씀에 대한 관찰은 곧 읽은 말씀에 대한 해석과 묵상으로 이어지는데, 세 번째 읽기는 바로 이 단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읽기에 충실했을 때, 독자는 저자의 의도를 알게 되며, 이야기 뒤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말씀의 정신’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스스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노력을 기울인다는 점에서, 이러한 독서는 주어진 본문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이 단계에서는 복음서, 서신, 역사서, 예언서, 시편 등 다른 장르의 글들에 대하여 각각에 알맞은 다양한 접근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분석적 읽기’의 한 예를 들면,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만나주신 대목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를 만나신 예수님은 그에게 다른 말씀 없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한 질문만 세 번을 반복하셨다. 겸손하게 대답하는 그에게서 주를 사랑한다는 고백을 받으신 후에는 역시 다른 말씀 없이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는 말씀만 세 번을 반복하여 하신다. (특별히, 공동번역 성경에는 위의 말씀으로 세 번을 동일하게 대답하신 것으로 번역되어 있다.) 따라서, 전후의 정황 및 다른 곳에서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들을 함께 떠올리고, 여기서의 일들을 나 자신에 대한 적용과 연관지어 묵상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깨닫게 된다. 먼저, 주님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히 여기시는 것 한 가지를 든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대한 삶의 구제적인 표현은 그분의 양들, 즉 ‘영혼들을 잘 돌보는 일’이어야 함을 깨닫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주님의 ‘제자’로서 살기 원하는 나에게도 오늘 동일하게 말씀하고 계시는 그분의 음성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오늘 해야할 일들과 오늘 결정되어야할 사항들은 이 묵상을 염두에 둔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네 번째 읽기에 관련한 말씀 묵상은 개인적인 신학이 수립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부시대에 삼위일체 교리가 확립되기까지는 아마도 이러한 읽기와 묵상의 결과들이 축적되고 적용되었을 것이다. 삼위일체의 개념은 성경 어디에서도 직접적으로는 언급되지 않지만 곳곳에서 그 의미가 묻어나오는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다른 예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때에 따라 어떻게 역사하셨고 그들은 또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를 나 자신의 삶에 나타나는 패턴들과 오버랩시키면서 스스로의 신앙의 현주소를 되물었던 순간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을 두고 구축해가는 이러한 개인의 신앙과 신학은, 마치 오랜 시간동안 바닷가를 다니면서 손수 주워 모으고 닦고 다듬은 하나하나의 조개껍질들을 한데 엮여서 만든 목걸이와도 같다. 이 과정의 읽기와 묵상에 눈을 뜨고 거기에 필요한 시간과 노력을 들일 때 우리의 신앙은 점차로 깊은 뿌리를 더하여갈 것이며, 우리는 주변 상황에 덜 좌우되는 신앙 인격을 연마하게 될 것이다.


주님과 함께하는 영적 세계로의 여정은 그 깊이가 끝이 없는 과정이라고들 많은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그런 깊은 세계에 대하여, 부족한 영성과 경험을 가지고서 방법론을 표현해보고자 하다보니 매우 어설픈 글이 되어버린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말씀을 이해하게 되는 일은 궁극적으로는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문을 열 때에 문 밖에 서서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께서 비로소 우리 안에 들어와 함께 잡수시는 것을(계 3:20) 생각할 때, 말씀을 받고 이해하는 자리로 나아가고자 노력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우리 자신의 몫일 수 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올바른 방법과 단계적인 접근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매일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삶의 현장에서의 문제들이 비록 어제까지는 희미하게 보였을지라도 오늘 삶의 한 영역에서 만큼은 주님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 같이 온전히 깨달아 가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매일 임하기를 소망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야고보서 1:5)





[정정합니다] “바하의 ‘마태수난곡’을 통하여 묵상하는 예수님의 고난” 글의 각주 8) 번에서, 해슬러(Hassler)의 원곡은 요한수난곡에서 ‘도입 합창’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중간 삽입곡으로 사용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