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6년 11월호

OO 자매님께,


자매님이 가지고 계셨던 의문과 고민들에 관하여 지난 번에 나누어주신 이야기들이 그후로도 참 많이 생각이 났었습니다. 어려운 여건들 가운데서도 헌신과 봉사로 섬김의 수고를 다하는 삶의 모습이 애처로우리만큼 감동적이었고, 일면 부끄러운 마음으로 제 자신을 돌아보며 채찍질하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잘못아닌 잘못과 나아지지 않는 상황들로 인하여 힘들어하고 계신 점에는 참 많이 안타까왔습니다. 이토록 주님 앞에서 충성되고 신실하게 살아가고자 애쓰는 자매님인데, 하나님의 뜻은 과연 어디에 계신 것인지 모르겠다는 물음만 스스로 되뇌어보기도 했었습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무력함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고백하는 겸손한 마음이 아름다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혹 주님 앞에서마저도 마음이 계속 상하기만 하는 건 아닐까 공연한 걱정이 앞서기도 했답니다. 자매님이 치열하게 struggle하며 살아가는 것과 병행하여 주님 주시는 평화와 기쁨 또한 그 마음 안에서 나날이 더욱 커져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매님의 이야기들을 떠올리던 중 문득 본회퍼의 고뇌와 어딘가 모르게 닮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나치의 유대인 말살정책에 항거하다 체포된 본회퍼는 감옥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예수님을 연상시키듯 따뜻하고 의연한 모습으로 오히려 간수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처형되어 순교하기 얼마 전에 자신을 돌아보는 시를 한 편 지은 것이 사후에 널리 알려졌는데, 그가 주위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격적으로 비추어지고 있었는지, 자신의 내면에 흐르는 연약함과 두려움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고 있었는지, 그리고 전능자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겸허함과 신뢰를 가지고 있었는지가 잘 나타나 있는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이 글을 읽을 때마다, 여기까지 믿음으로 달려와 이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자신을 내어드리고 있는 그의 감회와 눈물을 보는 것같은 느낌을 받곤 합니다. 그의 마음을 헤아려보고픈 마음에 제 나름대로 한 번 번역해본 것으로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  디트리히 본회퍼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때로 말하기를,
나는 감옥의 갇힌 공간을 나설 때에
침착하고, 활기차며, 담대하다고 한다.
마치 자기 집 문을 나서는 유력자처럼…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또한 말하기를,
나는 간수들과 이야기할 때에
자유롭고, 친절하며, 분명하다고 한다.
마치 내 자신 지시를 내리는 사람인 것처럼…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또한 말하기를,
나는 어려운 시간들을 견뎌내는 가운데에도
한결같고, 웃음을 잃지 않으며, 기품이 있다고 한다.
마치 늘 승리하는 자의 모습처럼…


그럼 나는 정말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그런 사람인가?
아니면 단지 내가 알고 있는 나 자신일 뿐인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피곤하고 갈망하며 병들어있는,
마치 누군가가 목을 조르는 듯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아름다운 색들과 꽃들과 새들의 지저귐을 그리워하고 있는,
친절한 말 한마디와 이웃과의 정다운 삶에 목말라하고 있는,
가혹함과 사소한 모멸감에 대한 분노에 어쩔줄 몰라하고 있는,
기적같은 일은 더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체념하고 있는,
머나먼 곳에 떨어져있는 동료들 걱정에 힘없이 떨고 있는,
기도하기에, 생각하기에, 무언가 만들어내기에 지쳐 공허해져 있는,
기진맥진하여 이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버릴 준비가 되어있는, 그런…


나는 누구인가? 이편인가 저편인가?
오늘은 이편이었다 내일이면 저편인 것인가?
동시에 둘 다인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위선자요,
내 스스로는 비겁하고 수심에 찬 나약한 사람인가?
아니면, 아직도 내 안에는 패잔병의 모습이 남아있어서
다 얻은 승리 앞에서조차 뿔뿔이 도망치고 있는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외로운 질문들이 나를 비웃고 있구나…


내가 누구이든, 그분은 아시리라. 오, 하나님,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1944년 6월, 나치의 수용소 감방 안에서)


“WHO AM I?” (from “The Cost of Discipleship,” pp.19-20)
by Dietrich Bonhoeffer


Who am I? They often tell me
I would step from my cell’s confinement
calmly, cheerfully, firmly,
like a squire from his country-house.


Who am I? They also tell me
I would talk to my warders
freely and friendly and clearly,
as though it were mine to command.


Who am I? They also tell me
I would bear the days of misfortune
equably, smilingly, proudly,
like one accustomed to win.


Am I then really all that which other men tell of?


Or am I only what I myself know of myself,
restless and longing and sick, like a bird in a cage,
struggling for breath, as though hands were compressing my throat,
yearning for colors, for flowers, for the voices of birds,
thirsting for words of kindness, for neighborliness,
trembling with anger at despotisms and petty humiliation,
tossing in expectation of great events,
powerlessly trembling for friends at an infinite distance,
weary and empty at praying, at thinking, at making,
faint, and ready to say farewell to it all?


Who am I? This or the other?
Am I one person today, and tomorrow another?
Am I both at once? A hypocrite before others,
and before myself a contemptibly woebegone weakling?
Or is something within me still like a beaten army,
fleeing in disorder from victory already achieved?


Who am I? They mock me, these lonely questions of mine.
Whoever I am, thou knowest, O God, I am thine.


(June 1944, in the prison cell of Nazis camp)


저에게도 어려움과 고민으로 채워졌던 시간이 있었는데, 그런 가운데 큰 힘이 되어주었던 한 가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속이는 자”를 뜻하던 야곱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이라고 바꾸어 주신 그 드라마틱한 장면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이름들이 종종 한 사람의 일생을 종합적으로 간추려 상징하는 경우가 많은데, 제가 주목한 점은 나중에 하나님의 백성 전체의 이름이 되는 그 이름이 “거룩한 자”나 “복받은 자”와 같은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씨름(struggle)하는 자”의 의미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분과 더불어 씨름(struggle)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의미에서 우리가 주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연약하고 게으름과 죄에 미혹되기 쉬운 나이기에 그분께서 맡기신 소명을 어떻게든 감당하고자 한다면 그 과정에서 struggle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하여 그 모든 일을 능히 감당하고 이루실 주님이건만, 그분의 도우심 앞에 내 자신을 내어드리기까지는 나의 본성을 거스르는 struggle이 있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랑 없는 마음에 그분의 사랑을 담아 이웃을 사랑하는 자리에 나아가는 과정에서도 감당해야할struggle은 늘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struggle이 그러하였고 본회퍼의 struggle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매님께서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하며” 통과하고 있는 지금의 이 시간들 또한 어쩌면 자매님이 드릴 수 있는 가장 순전한 영광을 그분께 드리고 있는 순간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께서는 감당하지 못할 어려움을 허락지 않으신다 하셨으니, 아마도 주님께서는 그 정도의 난관을 감내할 만한 삶의 실력과 성숙함이 자매님에게 이미 있다고 인정하고 계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피할 길을 또한 마련하셔서 능히 감당하도록 도우신다 하셨으니, 말과 경주하여도 능히 이기고 요단강의 창일한 가운데서도 안전할 수 있게 하시는 그분의 손길을 혹 조만간 고백하게 되실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최선을 다했지만 더 이상 붙잡고 있기가 어렵다고 느껴지는 일이 혹시 있으시다면 때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분 품 안에서 존재 자체의 안식을 경험할 수도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가장 이루고 얻기 원하시는 것은 자매님을 통한 그 어떤 것이기 이전에 자매님 자신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한 찬양곡의 가사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Savior on a hill, dying for my shame, could this be true? … For you so loved the world, you gave your only Son to say “I love you so. Oh, how I love you so…” (Hillsong, “Saviour”)


그 사랑이 자매님을 어디든 쫓아가서 위로하시고 힘주시고 놀라게 하시며 만족케 하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자매님은 귀중한 “하나님의 소유”이시고, 그 사랑이야말로 자매님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그분 품안에 머물도록 하시는 진정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OO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