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4년 1월

주님의 제자들, 어떻게 살 것인가?


 


저물어가는 한 해를 마감하면서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에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을 주님의 뜻과 말씀의 빛에 비추어 돌아보며 반성하였다. 이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각기 다양한 형태로 스스로에게 던지기 시작하고 있다. 주님의 제자로서 올 한 해도 주님께 기쁨이 되어드리는 삶을 살아가리라 생각하는 동안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주님께로 향하여 가고 있음을 느낀다.


“주님, 제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우리를 ‘주를 사랑하는 자’ 부르시는 주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마태복음 22:34-40; 마가복음 12:28-34)”는 말씀으로 모든 율법을 요약하여 주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 ‘사랑’ 있으신 것은, 하나님이 ‘사랑’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충성되고 성숙되었으며 칭찬받을 만한 면이 많은 교회였던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도, 이 한 가지, ‘사랑’ 대해서만은 질책하셨다. “네 처음 사랑이 어디 있느냐?” 주님의 제자로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었기에,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다시 찾아와 그를 회복시키실 때에도 주님은 이 한 질문으로 세 번을 반복하여 물으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구체적인 삶 가운데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베드로는 분명 주를 사랑하는 자였다. 주를 부인하는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보면서 너무도 겸손해진 그였기에 감히 주를 사랑한다고 자신있게 고하지도 못하였지만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는 말과 더불어 주님은 그의 겸손하고 간절한 ‘사랑의 고백’을 받으셨다. 이에 주님께서는, “(그래, 네가 이토록 나를 사랑하니…)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신다. ‘내 어린 양’이란 물론 아직 믿음이 견고하지 못한 주님의 백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하시는 분부는, 우리에게 친근한 표현으로 하면 “영혼들을 돌보아(care) 주거라” 하시는 말씀과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을 장식하고 있는 이 갈릴리 호수에서의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전의 그분의 메세지와 완전하게 같은 의미가 된다. 여기서 주님은, 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자’의 마땅히 하여야할 바가 무엇인지를 간결하고 더 분명한 메세지로 우리에게 다시금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렇다면, 올 한 해 주님의 제자로서 온전히 살아드리기 원하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주님을 사랑할 것’과 그 구체적인 실천으로서의 ‘영혼 사랑’을 분부하고 계시지 않을까?


내 사랑하는 제자야, 너에게 다른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오직 이 한 가지만을 묻겠다. “진실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나는 이점을 가장 중히 여긴단다. 그래, 네 마음처럼 네가 나를 그토록 사랑한다면, 내 양들을, 그 영혼들을 돌보아줄 수 있겠니? 그들을 말씀으로 먹이고 사랑으로 돌보며 권면하고 양육하여 내가 너를 세운 것과 같이 그들을 세워주거라


우리를 예배자로 부르시는 주님


우리보다 앞서 살다 간 신앙의 대선배들이 만일 오늘 우리 앞에 다시 서게 된다면 어떤 삶을 살라고 독려할까? 모세의 경우에, 이스라엘을 향한 마지막 설교에서 그가 남기고 간 메세지는, 요약하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명기 6:5)”는 것이었다. 나의 모든 것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이러한 삶을 다른 말로 하면, 순간 주님의 주인되심 아래에서 겸손히 그분과 동행하는 ‘예배자의 삶’이라고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예배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교회의 정규 예배들에 참여하는 것 이외에 더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시는 가운데 올바른 예배란 무엇인지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이 산에서 드리는 것도 아니고 저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것도 아니라, (어느 곳에 있든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의 말대로 이 산에서 예배하여야 합니까, 아니면 유대인들의 말처럼 예루살렘의 성전에 가서 예배하여야 합니까?” 하고 묻는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었다. 열왕기상 12:25-33 보면, 북왕국 이스라엘을 세운 여로보암은, 백성들이 신앙적 전통을 따라서 남왕국의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예배할 경우 아직 견고하지 못한 그의 정치적인 입지가 위협을 받게될까봐 두려워서 각처에 산당을 짓고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두어 예루살렘에 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처럼 신앙적 동기가 아닌 정치적 동기로 말미암아 등장한 산당들의 존재는 두고두고 북왕국의 영적 타락의 한 상징으로 여겨졌다. 사마리아는 북왕국의 수도였던 만큼 이와 같이 산에서 예배하는 전통은 오래동안 뿌리깊은 관습이 되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명백하게 보이는 문제점들과 관련하여 질문을 받으셨을 때 조차도 예수님께서는 예배의 장소나 외적 요건에 관하여 대답하시기 보다는 오히려 예배자의 중심에 관한 면으로 생각의 촛점을 옮겨주고 계신다.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을 현대적인 표현으로 바꾸어 보자면, “캠퍼스에서 예배하여야 합니까, 아니면 교회에서 예배하여야 합니까?” 같은 질문들로 그 예를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오늘 이와 같이 주님께 여쭙는다면 여기에 대하여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실까? 사마리아에서의 그때나 마찬가지로 “어디에서?” 관한 말씀보다는 “어떤 자세로?” 대한 답변을 주지 않으실까? 우리를 향한 주님의 관심은 언제나 신앙의 외면적인 요소들보다는 마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에 두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배자로서의 우리의 삶의 첫 걸음은, 주님의 뜻이라면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따를 수 있는지, 그리고 주님의 말씀과 뜻을 이루는 일이 내 육신을 이롭게 하는 일보다 중요시되고 있는지에 대하여 매 순간 성령님 안에서 진실하게 자문하는 마음가짐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나의 삶 가운데서는 주님이 온전히 주인되시고 있는가? 나에게는 일 주일에 7일, 하루 24 시간이 주님께 현재진행형으로 드려지고 있는 예배라는 확신이 있는가? 예배에 관한 주님의 말씀의 마지막 대목을 음미해 보자.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우리를 거룩한 공동체로 부르시는 주님 


주님의 으뜸가는 제자였던 베드로는 그의 서신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권면을 남겼다.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베드로후서 3:11-12) 신약 시대의 명의 영적 거목이었던 바울은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보낸 그의 마지막 서신의 무렵에서 이렇게 당부하고 있다.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디모데후서 2:22) , 영적 거목들은 그들의 마지막 교훈들을 통하여, 우리가 순결한 주님의 사람들과 더불어 주님의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거룩과 성령의 열매를 이루어갈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거룩한 공동체’ 향한 바울과 베드로의 마지막 권면들은, 주님이 마지막으로 드리셨던 대제사장적 기도의 내용과 닮은 점이 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주님은, 먼저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셨고, 그분의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으며, 이어서 그분의 이름 아래 그분의 몸을 이룰 주님의 사람들의 ‘거룩한 공동체’ 위하여 기도하셨기 때문이다. 해를 맞으면서, 동안 지역교회 안에서, 캠퍼스 안에서, 가정에서, 우리의 각양 처한 곳에서 주님이 하셨던 기도들이 우리의 가운데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1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