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으로 유학와서 공부하는 중에 한국에서 공부하던 것과 참 다르다는 것을 느낀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아무때나 자유롭게 질문하던 것을 보면서 일종의 질문권이라고 불러도 좋을만한 것이 미국의 수업에 있는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정행위가 거의 없는 것도 색달랐습니다. 강의계획안(syllabus)이 그대로 지켜지는 것도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과제물을 제출할 때, 내용도 내용이지만 포맷과 스타일을 엄격하게 따지는 것도 한국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멋진 형용사들을 늘어놓은 일반적인 진술(general statements)에 내려지는 혹독한 평가는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공부할 때만 해도 멋있게 썰을 풀어놓으면 어느 정도경우에 따라서는 꽤 좋은학점을 받고는 했으니까요. 지금은 물론 많이 달라졌겠지요.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 설교학을 가르치던 교수 가운데 한 분은 학생들이 설교에서 전문용어(그분의 표현으로는 “Big Word”)를 쓰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습니다. 만약 설교 중에 은혜라든가 경건이라든가 거룩이라든가 종말적같은 말들이 적절한 설명이 없이 등장하면 가차없이 지적하곤 했습니다. 제 식으로 그 분의 뜻을 옮겨보자면 그런 말들은 듣는 사람에 대한 배려(“listener-friendliness”라고나 할까요)가 부족해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말하는 설교자나 그와 많은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지(심지어 그런 사람들끼리도 같은 말을 다른 내용으로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 날 처음 교회를 찾아 나온 사람과는 거의 그 내용을 소통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커다란 단어들은 많은 내용을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장점은 있지만 아주 조심스럽고 적절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오히려 빈 말잔치로 끝날 위험이 큰 것같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려하면 많은 것들을 살펴야 하고, 더 명료한 생각에 이르를 때까지 자신의 두뇌를 괴롭혀야 하고, 그러려면 훨씬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설교학자로서 유명한 크래덕(Fred B Craddock) 교수는 학생들을 가르칠 때의 경험을 가끔 소개합니다. 설교학 시간에 앞에 나와 설교하는 학생들이 가끔 이런 식으로 설교한답니다. “제가 얼마 전에 만난 분은 정말 놀랍도록 경건하고 신실하며 사랑에 가득찬, 한 마디로 그리스도를 닮은 분이었습니다.” 그럴 때 자신의 반응은 이렇다는군요. “그만 입 다물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만 말하게. 그 이가 얼마나 경건하고 신실한 사람인지 느끼는 것은 그 이야기를 듣는 우리가 느낄 일이야.” 사실 신실, 경건, 그리스도를 닮음, 이런 것들은 구체적이고 자세한 이야기를 듣는 중에 듣는 사람의 마음에 자연히 떠오르는 말들이어야 할 것입니다. 부질없는 부사나 형용사를 될수록 삼가고 동사를 많이 사용할 일입니다. 구약의 언어인 히브리어가 형용사는 빈약하고 동사가 압도적으로 풍부한 말이라는 것도 생각해 봄직한 일입니다.


 


출애굽기 18 1절부터 12절까지에서 모세는 그를 맞으러 나온 장인 이드로에게 하나님이 모세와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신 일을 말합니다. 이드로는 이방 종교의 제사장입니다. 그와 인사를 나누고 나서, 모세는 장인에게,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신 일, 곧 바로와 이집트 사람에게 하신 모든 일과, 그들이 오는 도중에 겪은 모든 고난과, 주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건져 주셨는가 하는 것을 자세히 말하였다 (8).” 성경은 이드로의 반응도 전합니다. “그러자 이드로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에서 건져 주시려고 베푸신 온갖 고마운 일을 전하여 듣고서, 기뻐하였다. 이드로가 말하였다. ‘주님께서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와 바로의 손아귀에서 자네와 자네의 백성을 건져 주시고, 이 백성을 이집트 사람의 억압으로부터 건져 주셨으니, 주님은 마땅히 찬양을 받으실 분일세. 이스라엘에게 그토록 교만히 행한 그들에게 벌을 내리시고 치신 것을 보니, 주님이 그 어떤 신보다도 위대하시다는 것을 이제 나는 똑똑히 알겠네.’ 그리고 나서,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하나님께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쳤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도우셨는가를 자세히말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의 언사는 오히려 그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이드로의 입에서 나왔습니다(이것으로 미루어보아 모세의 자세한 이야기는 자신에게 영광이 돌아오지 않도록 깊은 생각을 거친 것을 알 수 있습니다만 저는 지금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모세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신 이야기를 대충 말하고는 온갖 형용사를 늘어놓으며 하나님을 찬양했다면 어땠을까요? 이드로로서는 사위를 실망시킬 수 없어서 마지못해 맞장구를 쳤을망정, 왜 하나님이 마땅히 찬양을 받으실 분인지 마음으로부터 깊이 공감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공감은 강요하거나 쥐어짜서 형성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모세가 공과 힘을 들인 것은 하나님에 대해 형용사를 동원하여 찬양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겪은 일을 자세히기억해내어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내용이 자세하고 구체적일수록 하나님의 위대함은 자연히 드러나게 마련이었습니다.


 


모세의 이러한 모습은 이스라엘이 겪은 일에 대한 감동이 그 자신에게 먼저 생생했기 때문일 터이지만, 그 감동을 남에게 전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신과 이스라엘을 위해 보존하려고 해도 사건 자체를 낱낱이 기억해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출애굽 사건 뿐 아닙니다. 성경의 내용은 대부분 사건 자체에 대한 자세한 기록입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신 일에 관한 기록일 것입니다. 얼마 안되는 시간에 일어난 일을 복음서가 가장 공들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번화한 항구 도시 고린도에 사도 바울이 전도자로 도착했을 때 속으로 다짐한 것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집중할 것, 멋들어진 말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보려고 애쓰지 말 것.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그 자체에, 그리고 그 자체에만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나타나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자세히 전하면 하나님이 왜 찬양받을 분인지 자연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연히 많은 형용사가 동원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 자체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거나 기억하고 있는 부분이 빈약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화려한 수사는 오히려 우리 자신의 게으름과 안일함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이야기는 많은 기적을 전해줍니다. 그러나 출애굽 뿐이겠습니까? 한 영혼이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빠져 나오는 데는 반드시 엄청나게 놀라운 일들이 있는 법입니다. “놀라운 일들이 꼭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신생아를 돌보는 것을 배우기 위해 어느 대학병원에서 한 달동안 일할 때 한 교수가 강의 중에 한 말을 기억합니다. “사람들은 치유될 수 없던 병이 나으면 기적이라고들 하지만, 나는 한 아기가 정상적으로 태어나는 것이야 말로 기적이라고 느낍니다. 배우면 배울 수록 아기가 잘못 될 수 있는 단계가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되거든요. 정상아가 하나 태어나려면 그 모든 과정이 다 정확히 맞아 떨어져야 하는데, 이게 바로 기적이 아닌지요.” 아이 하나가 태어난 과정을 자세히살펴볼수록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가 그만큼 더 드러날 테지요. 한 영혼이 거듭 나는데 육신적인 출생보다 그 신비와 놀라움이 덜할 리가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을 말할 것 없이 우리 각자가 출애굽하는데도 틀림없이 많은 놀라운 손길이 개입되어 있을 것입니다.


 


신앙의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이 어떻게 이 길에 들어서게 되었는지 말했습니다. 어거스틴, 루터, C S 루이스, 우찌무라 간조, 김교신, 그리고 누구보다도 바울 사도 같은 이들은 많은 공을 들여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이 중에 바울이나 어거스틴 같은 분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그리스도를 만난 일이나 아이들이 놀면서 하는 말을 따라 로마서를 펼쳐보게 된 일같은 신비로운 일때문에 회심한 것처럼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이 훨씬 더 공을 들여 기록한 것은 그 이전의 긴 기간 동안 자신의 내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특히 7장은 그 대표적인 부분입니다.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일어난 일이라든가 로마서를 펼쳐보게 된 일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마지막 손질 같은 것입니다. 그들 주변과 내면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간섭하시던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들을 통해 그들이 마침내 어떤 상태에 이르렀을때 행하신 마지막 손질(finishing touch)이지 그것들로 모든 것이 설명되는 것도, 오직 그 사건들 때문에 그들이 돌아설 수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뿐 아닙니다. 로마서 11장 끝부분의 장엄한 송영 같은 것은 또 어떻습니까? 바울 사도가 로마서 1-11장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자세히살펴본 뒤에 그 속에서 참을 수 없이 흘러나온 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었습니다. 이처럼 자세히살펴볼 때 하나님의 지혜, 그 분의 주권, 그 분의 은혜와 그 분의 자비가 드러났고, 그랬을 때 그는 바로 이드로와 같이 하나님을 찬양하며(로마서 11:3-36) 바로 그 하나님께 바칠 제사(로마서 12:1)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소위 신앙의 위인들에게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베푸셨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한 영혼이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나아오는데는 참으로 세밀하고도 놀라운 일이 많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업적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하나님의 업적을 선포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목적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베드로전서 2:9).” 이러한 하나님의 업적을 선포하되 자세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선포하는 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을 전도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업적을 자세히 선포할 때 하나님을 더 분명히 알게 되는 것은 다름아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저는 앞서 말한 사람들이 위대한 신앙인이라서 자신의 이야기를 쓸만한 것이 있었다기 보다 자신의 이야기(사실은 하나님의 이야기)를 그처럼 자세히 들여다보고 기억해냈기 때문에 그만큼 좋은 신앙인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빌려쓰는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문에 큰 종이가 붙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누군가가 쓴 글이 적혀 있습니다. 그 중에 한 문장을 소개합니다. “Everyone has a story to t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