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로 일하다 보면 담배나 술을 끊지 못해서 건강의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적지 않게 보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그런 분들을 위한 프로그램들도 많이 개발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술을 끊는 것을 돕는 데는 AA(Alcoholics Anonymous)라는 프로그램이 가장 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 방지회라고 번역하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후레드릭 뷰크너라는 소설가면서 목사인 분이 이 프로그램에 대해 언급하면서 교회의 모습이 바로 AA 같아야 하지 않을까 한 적이 있습니다. 저도 무척 공감이 갔습니다.


이 모임은 물론 술을 끊기 위한 모임입니다. 모임의 이름이 말하는 대로 자신의 이름을 감춘 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모입니다. 수련의 시절에 견학을 갔는데 누구에게나 참석이 허용된 모임이 있고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모임이 있다더군요. 저는 물론 그 모임에 참석할 허락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것도 피상적인 것이고 어쩌면 잘 못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모임을 소개하려는 것이 주 목적이 아니니만치 양해해 주시고, 제가 잘 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고쳐주시는 분이 있으면 고맙겠습니다.


이 모임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신들보다 큰 능력(higher power)을 가진 분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가 있네 없네 하는 논쟁은 이곳에 없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힘만으로는 술을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수 없이 확인한 사람들입니다. 자신들끼리의 협력만으로도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들 모두가 또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술은 끊어야 한다는 간절함과 절실함은 있는데 그것이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되지 않는 일인 것이 분명할 때 그들이 동의한 것은 자신들보다 큰 힘을 지닌 분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분들이 모여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주로 합니다. 서로간에 자신들의 경험을 말하면서 다른 이들이 술을 끊는데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이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은 물론 없습니다. 자기가 참석하는 모임이 다른 모임들에 비해 더 유명한 사람들이 오느니 어쩌니 하면서 내세우는 일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도대체 이 모임에 참석한다는 것이오히려 수치스러울 망정 무슨 자랑할만한 일이 못됩니다. 자신이 술을 끊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려고 오는 사람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술을 끊지 못하는 것을 비난하거나 흉볼 여유를 가진 사람은 이곳에 오지 않겠지요. 이 모임에 오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문제 때문에, 자신이 술을 끊어야겠으니까 어쩔 수 없어 올 뿐입니다.


자신들의 모임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사업 구상 같은 것은 여기서는 거론될 이유가 없습니다. 모임에 대한 의논은 물론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의논은 피할 수 없는 일에 대한 것뿐입니다. 의논도 극히 실제적입니다. 어떻게 모임을 조직하면 서로 도우면서 술을 끊는데 유익하겠는가 하는 데 촛점이 늘 모아져 있습니다. 이 모임으로 덕을 보아 성공적으로 술을 멀리하고 있는 사람이 다른 이들에게 이 모임에 대해 알리며 권하는 것은 물론 있겠지요. 그러나 이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목적은 자신의 모임을 더 다양한 목적을 가진 모임으로 발전시킨다거나 더 유명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이 술을 끊는 것입니다. 그만치 자신의 문제가 절실하고 술을 끊으려는 마음이 간절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은 자신의 문제가 절실한데서 자연적으로 우러나온 공감과 동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훌륭한 강사의 말을 들으려고 모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도 필요하다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는 각자가 술을 끊고 건강한 삶을 얻는 것뿐입니다.


 


저는 지금 먼젓 글에서 잠깐 언급했던 개혁이라는 것을 말해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도 있지만 그저 지금보다 발전하고 나아져야 하겠다는 정도가 아니라 개혁이라고 부를만한 변화가 필요한 것이 한국교회, 또는 한인교회의 현실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을 저도 심심치 않게 만나곤 합니다. 교회의 모습이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물론 저도 하고 있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교회의 모습은 답답하리만큼 잘 바뀌지 않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도대체 어째서일까요?


저는 우선 제가 방금 쓴 표현을 한 번 다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교회의 모습이라는 표현 말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가하는 부분이 마음에 걸립니다. 교회가 달라져야한다고 하는데 동의하는 듯하던 분들이 막상 어느 선에 이르면 그만!”을 외치던 일들이 기억에 떠오르면서 입니다. 어느 선이라는 것은 대개의 경우 자기 자신의 생각과 모습이 바뀔 것을 요구하는 선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개혁 또는 갱신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또는 어떤 모습으로 교회가 바뀌어야 하느냐 하는데 대해서 가진 생각들이 많이 다를 뿐 아니라 사실은 우리들자신의 생각이나 태도가 바뀔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을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오히려 우선 그 대상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합니다.


저는 그것이 교회가 교회답기를 바라는 간절함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간절함이 없어서 열심이 부족해진다는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열심을 품는 것 못지 않게 필요한 것이 자신의 모습이나 생각까지 살펴볼 수 있는 열린 태도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교회가 교회다와지는 일이 정말 꼭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며 그 일을 위해서는 내가 불편해지고 고통스러워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되어야 할 일이라는 절실함이 있을 때라야 자신의 부족함이나 편견이나 고집이나 자존심 같은 것들도 제대로 살펴볼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일에 대해 품은 마음이 간절할수록 우리의 눈길은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꼭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교회 개혁이라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우리로서는 무엇보다 간절한마음을 가지고 기도할 일이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습을 어떻게 바꿔 놓으려고 하시건 바로 그것이 우선 나 자신에게 가장 복된 일인줄 믿고 순종하는 태도를 늘 훈련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눈길을 교회로부터 하나님과 나 자신으로 돌릴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김교신 선생의 글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 이 소수의 우인이야말로 나의 지상 생애의 전소유요, 전영광이요, 전위로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근친에게 버림이 되고 신앙으로 인하여 교회의 조롱거리가 될 때에 지상에서 힘될 것은 오직 이 소수 우인의 통찰이 있을 뿐이다. 친구들아, 나의 냉정함을 책하기 전에 우선 나의 주위를 살펴보라. 나는 결코 우의를 경시하여도 가한 처지에 있는 자가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나는 우의에 심히 냉박(冷薄)한 자인 것을 자인치 아니치 못하니 이것이 비통한 사실이다. 친구들은 전월의 우의, 전년의 우의, 혹은 10년 전의 우정으로 대할 때에도 나에게는 월전의 우의를 기억치 못할 뿐인가, 어제까지의 자아를 신뢰하지 못한다. 나는 날마다 자기를 향하여 절교를 선언하는 자요, 매월 성조지를 발송할 때는 절연장을 보내는 마음으로 투송하지 아니치 못한다. 실로 비통한 일이나 어쩔 수 없이 한다. 전달까지의 찬동자가 이달에도 협동자일 것을 나는 기대치 않는다. 나는 성구를 해석할 때에 우인의 신앙에 조화시키며 사회에 미칠 영향을 고려할 여유가 없다. 다만 표적을 향하여 발사하여 볼 뿐이다…”


여유가 없다,” 그만큼 절실하다는 뜻이 아닙니까?  성서를 따라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너무도 절실하고 간절하기 때문에 혹 친구를 잃는 고통을 겪게되는 한이 있더라도 성서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밝혀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친구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어제까지의 자아를 신뢰할 수조차 없다며 스스로를 개혁의 대상으로 여길 때 그렇다면 개혁의 주체로는 누구를 바라볼 것입니까? 우리가 스스로를 신뢰할 수 없다면 그런 우리의 마음에 드는 것 역시 불안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습이 누구의 마음에 들어야 하겠습니까?


 


시편 19편을, 자세히는 아니더라도 어렴풋이나마 그 내용을 기억하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시인은 이 시를 이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구원자이신 주님,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생각이 언제나 주님의 마음에 들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마음! 이것이 시인의 기준이었습니다. 시인은 스스로에게 불신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가 자기 잘못을 낱낱이 알겠습니까?”


그나마 자신이 깨달은 것조차 자신을 주장하지 못하는 것도 보고 있습니다. “주님의 종이 죄인 줄 알면서도 고의로 죄를 짓지 않도록 막아 주셔서 죄의 손아귀에 다시는 잡히지 않게 지켜 주십시오. 그 때에야 나는 온전하게 되어서, 모든 끔찍한 죄악을 벗어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시인이 죄를 끔찍하게 여기며 그것을 벗어버리고 싶어하며 온전하게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그런 마음이 간절할 수록 오히려 그런 선한 마음이 자기 스스로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의 손아귀가 자신을 장악하곤 하는 것을 더 분명히, 더 고통스럽게 발견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해방시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시인에게 주신 말씀에 뭔가 부족한 데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주님의 종이 그 교훈으로 경고를 받고 그것을 지키면 푸짐한 상을 받을 것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관찰하고 연구하여 (김교신 식으로 말하자면 박물공부를 통해서)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그것보다 더 분명한 깨달음을 얻는 것은 물론 주님의 교훈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나 그 교훈으로 경고를 받고 그것을 지키는 자신이 그리 미덥지가 못합니다. 자신의 열심이 부족한 것을 한탄하는 것도 아니며 손쉽게 자신의 한계를 내세우며 그것으로 자신의 허물에 스스로 면허를 내리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힘써 주님의 말씀에 귀를 귀울인다고 하면서도 미처 보지 못하는 것도 있고, 애써 눈을 돌리려하는 것도 있으며, 보았으면서도 고의로 자신의 편견이나 고집이나 욕심이나 욕망을 따르기도 하는 자신의 모습을 거듭거듭 보게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일을 통해서 자신을 주님의 마음에 들게 하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며 그것을 구합니다. 이렇게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기도는 간절함과 절실함이 없이는 도저히 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루터가 자신의 목숨뿐 아니라 신앙 양심이 걸려있는 자리에서 제가 여기에 서 있습니다. 저는 어떻게 달리 할 수 없습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했을 때도 자신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뜻을 추구하되 결국 자신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일은 자신의 양심이나 용기나 성경지식이나 많은 사람들의 동의가 아니라 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 유일하신 분께 달려있음을 고백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교회 개혁의 필요가 있다면 그 가장 큰 부분이 우리 자신이 어떻게 하든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해방되어서 진리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절실함과 간절함이 없는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개혁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많은 사람이 교회개혁을 꿈꾸며 성취하는 것이라기 보다 주님의 교훈으로 경계를 받고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우리의 간절함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혹시 주어지는 선물일지도 모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