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4년 6월


요 즘은 아침에 일어나 아파트 뒤에 있는 야산을 오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서울에 있는 집뿐만 아니라 주중에 머무는 부모님 댁 뒤에도 다행히 야트막한 산이 있어서 아침운동을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그런데 더 더욱 좋은 것은 두 곳 모두 다 약수터가 있어서 운동 하기 전과 후에 신선한 물을 마실 수 있다는 것이다.

주 말에는 태어난 아기와 시간을 보내느라 뒷산을 가지 못하고 있다가 오늘은 벼르고 별러서 아내와 아침 산책 겸 운동을 다녀왔다. 아내와 함께 하는 아침 산책 길이 어찌나 행복하고 달콤하던지. 손을 잡고 걸으면서 아직 조금 남아 있는 아카시아 향기를 맡기도 하고 푸르름이 짙어가는 나뭇잎 내음도 맡으며 사는 얘기를 가만가만 하기도 했다. 비가 많이 오지 않는 주 중에는 거의 매일 들러서 상쾌한 공기와 물을 마시고 체력도 단련하고 걸으면서 기도와 묵상도 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고 있다.

그 런데 한국에 돌아와서 느낀 것은 그간 도시화가 빠르고 폭 넓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가령 예를 들면, 20여년 전 필자의 고등학교 시절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필자가 일하고 있는 곳인 청주는 도시면적이나 인구의 면에서 거의 네 배나 늘어났다고 할 수 있다. 인구증가 측면에서 보면 도시인의 자연증가보다는 농촌인구의 유입이 주된 도시화의 요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리고 도시면적의 증가는 이론의 여지 없이 산과 논 개발을 통해 일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랜만에 가 본 고향은 도심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곳이 새로 개발된 곳들이라서 아주 생소하게 느껴졌다. 현재 주중에 필자가 거처하고 있는 부모님 댁도 예전에는 야산이고 들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시멘트로 지어진 아파트와 잘 계획된 아스팔트 도로로 변해있다.

세 계화의 위력이 우리의 농촌과 도시의 모습을 이렇게까지 변하게 했구나 하는 감상에 젖기도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새로 생겨난 도시에 녹지 공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시 크기로 가히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 있는 서울도 여기에서 예외라고 할 수 없으며, 필자가 일하고 있는 청주도 여전히 녹지 공간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녹지가 차지하는 비율이 낮고 아스팔트와 시멘트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으면 보존된 녹지에서만 얻을 수 있는 보온, 보습, 방한, 방풍, 공기정화 등의 혜택을 얻지 못하게 된다. 서울의 도심과 부도심이 그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서울의 거리를 지나다 보면 숨을 쉬기 힘들만큼 공기가 오염되어 있고 여름에는 훨씬 무덥고 겨울에는 훨씬 춥다. 잘 알려진 외국의 예로서 남미의 아마죤 원시림은 하루에 축구장만한 넓이로 무참히 베어지고 있어 전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지구 온난화와 전 지구적인 산소 공급량 감소를 우려하기도 한다. 이러한 염려들은 지나치게 환경적인 측면만 고려한 것이고 아마죤과 관련된 사람들과 아마죤 자체가 가지고 있는 셀 수 없는 가치들 (원주민의 문화, 약품제조에 쓰이는 재료들, 희귀 동식물, 홍수 조절 능력, 생태계, 등)은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나마 부모님 댁이 있는 곳과 서울에 있는 필자의 거처는 다른 곳과는 달리 조금의 녹지 공간이 남아 있어 다행스럽게 생각된다. 아마도 두 곳 다 외곽지역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는 그나마 땅값이 상대적으로 싸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간에 도시화의 문제를 지적해 온 학자들과 시민들의 노력이 만들어 낸 귀한 산물이라고도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건설된 일명 신도시들을 살펴 보면 난 개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곳도 있지만 몇 곳은 녹지를 많이 확보하여 좋은 생활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고 보고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도시들도 자연적인 녹지를 그대로 살렸다기보다는 오히려 인공적으로 호수를 만들고 나무를 심어 가꾸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도시화의 단점 중의 하나인 녹지 공간 부족을 해소하려는 점만을 보면 이러한 시도가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아예 아무 것도 없는 곳이라면 모르겠지만 오랜 기간 동안 유지되어 오던 해당지역의 고유한 생태계와 문화와 역사를 고스란히 없애고 많은 돈을 들여 인공의 녹지와 휴식공간을 제공한다는 것은 왜 그런지 인간의 오만함이나 무지가 드러나는 것 같아 못내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뒷 산 지키기로 대표되는 도시의 녹지 공간 확보 및 녹지 축 보존은 장차 우리 후세들이 이 땅에서 살아갈 마지막 희망을 담보하는 일이기에 중요하다. 이제껏 의식 무의식적으로 인간이 자연과 동료 사람에게 행해 온 오만에 대한 생태계의 준엄한 심판을 조금이라도 피해가려면 최소한의 녹지 공간을 확보해야만 한다. 이 것은 어쩌면 자연을 위한다기보다는 사람이 살기 위한 마지막 보루로서 인식하고 사회전체의 합의를 이끌어내야 하는 소중한 일이다.

최 근에 서울에서는 Green Trust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이 운동을 통해 2006년까지 마을공원, 근린공원 같은 생활권 녹지 100만평을 확충하려고 한다. 영국의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을 모방한 ‘그린 트러스트’는 시민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녹지 확대사업을 펼쳐가는 도시녹화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동네별로 휴식과 운동을 겸할 수 있는 마을공원이 우선적으로 조성되며, 근린공원도 17개소 정도 건설될 예정이다. 그리고 학교의 담을 허물고 공원화해 인근주민이 이용하도록 하는 학교 공원화 사업과 개발제한구역 내(그린벨트)에 숲을 회복시키고 수목원, 생태탐방로, 농촌체험시설을 갖춘 소풍공원 등도 조성한다고 한다. 시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건물옥상에도 녹지공간이 생겨난다고 한다. 시민들이 집에서 5분 거리에 공원을 접할 수 있는 공원녹지를 제공하며, 공원과 공원을 녹지로 연결하는 생태통로를 만들어서 도시 전체가 생태적인 조화를 이루어 가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문화일보 2004년 1월 12일). 시민들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는 영국 및 미국의 경우와 같지는 않지만 사단법인 서울그린트러스트가 결성돼서 민간이 주도적으로 이 사업을 이끌어 가고 서울시가 적극적으로 행정적인 뒷받침을 하겠다고 한다. 늦은 감이 다소 없지 않지만 이왕 시작되었으니 서울시는 지나친 간섭을 피하고 민간 단체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여 명실상부한 시민주도의 숲 가꾸기 운동이 되기 바란다.

녹 지가 없는 도시 지역에는 인공적으로라도 녹지를 확보하도록 시민 전체가 의지를 모아야 한다. 그리고 이미 녹지가 있는 곳에서는 그곳 자체의 미와 전통과 이야기가 살아나도록 보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내셔널 트러스트처럼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없어질 위기에 놓은 녹지와 문화유산을 사서 더 이상 개발되지 못하도록 영구히 보존하려는 노력이 각 마을마다 생겨나면 좋겠다. 최소한 남아 있는 마을 뒷산이라도 더 이상 사라지지 못하도록 마을 전체의 의견을 모아 트러스트를 구성하고 영구히 보존하면 어떨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러한 운동을 통하여 사라져 가는 공동체 의식도 다시 회복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웃 마을과 나라 전체에 이러한 운동이 펼쳐지도록 관심을 기울이면서 자그마한 정성이라도 함께 보태보면 어떨까?

숲 은 과거 우리의 선조들이 노동하고, 휴식하고, 명상하고, 먹을 것을 구하던 생명의 보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시민들에게 깊은 숲은 없을지 몰라도 야트막한 뒷산이라도 있다면 아침마다 또는 지치고 힘들 때 찾아서 새롭게 하루를 시작도 하고, 남몰래 한숨도 지으며 위로도 얻을 수 있고, 나태해진 몸과 마음을 가다듬을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침마다 뒷산을 찾아서 기도도 하고, 명상도 하며, 새소리, 바람소리, 풀벌레 소리를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한 이득이 어디 있을까? 우리 주 예수께서 새벽 미명에 산에 올라 기도하시던 것을 생각하며…

우 리 그리스도인은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더 더욱 점점 이기적으로 변해가는 현대 사회에서 닫혀진 집 문을 열어 젖히고 이웃을 초대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겸손히 보여줄 수 있는 시발점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마을 단위의 중요한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모범을 보이며 공동의 관심사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특히 자발적으로 이러한 뒷산 지키기 같은 마을 중대사를 제안하고, 의견을 모아가며 행정관청과 연결하여 가능성을 찾아가는 일도 주께서 명령하신 이웃 사랑의 한 부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