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4년 12월호

유학생 사회에 있어 보면 유학생들이 겪는 여러 가지 애환들을 목격할 수 있다. 공부에 대한 중압감, 경제적 어려움, 건강상의 문제들, 딸린 가족들에서 생겨나는 어려움들, 공부를 마치고 난 뒤의 진로 문제 등… 이 와중에 사고라도 당한다든가, 논문통과가 안된다든가, 그 학교에서의 공부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른 학교로 옮겨야 된다든가 하는 일들이 생기면 이러한 어려움들은 더욱 가중된다. 이럴 때마다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고통을 주시는 것일까?


우리는 극심한 고통가운데 있을 경우에는 이 질문에 대한 객관적인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가 쉽지 않다. 자신의 상태에 대한 절망과 탄식으로 자포자기 하거나 혹은 그것을 다른 누구의 탓으로 전가하기가 쉬운 것이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고통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겸비하게 그것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분명히 아는 한가지 사실은 하나님은 자기를 믿는 사람들에게도 고통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 분명히 아는 또 한가지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에는 다 뜻이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실까 하는 이유를 찾다 보니, 그 이유가 단 하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6가지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첫 번째 경우는 어떤 사람의 죄를 회개하게 하기 위해 고통을 주시는 경우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 잘못된 행동을 할 때, 그로 하여금 회개하고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게 하기 위해 채찍을 주신다(히12:6).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가려고 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큰 풍랑을 주시고 또 급기야 고기에게 잡아 먹히는 어려움을 당하게 해 주셨다. 바로 그를 회개시키고 다시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과거 신학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한 학생이 있다. 그는 시험시간에 컨닝을 하다가 적발된 학생이었는데,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용서를 구하기에, 한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다. 나는 그에게 ‘먼저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므로 일주일 동안 회개기도하고, 나에게도 잘못했으므로 반성문을 써 보내라 그러면 다른 방도를 찾아 보겠다’고 말했다. 그 뒤 반성문을 보내 왔는데, 그 반성문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내용인즉, 자기도 평소에 컨닝은 절대로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자기 옆에 친구가 책상에 글을 쓰는 것을 보고는 불안한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책상에 몇 자 적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는 보지도 못하고 걸렸고 자기 친구는 보고도 안 걸렸기에 처음에는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제는 자신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고 했다. 왜냐하면 자기 옆의 친구는 그 죄를 회개하지 않고 다음에도 또 똑같은 죄를 지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은 바로 이러한 처벌 때문에 회개하고 자신의 잘못을 고칠 수 있게 된 것이 너무도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 편지를 보고는 이 학생과 마찬가지로 나도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처벌이 참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죄를 짓고도 처벌당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그것을 죄로 알지 못하고 반복하게 된다. 그러나 처벌이 있을 때, 죄를 죄로 알게 되고, 그 죄를 회개할 뿐 아니라 고치려고 하게 된다. 나도 교통신호를 어겨 경찰로부터 딱지를 받은 적이 있는데, 이 처벌을 받기 전에는 무심코 행동을 했다가 딱지를 받으면서 부터 ‘이게 잘못이구나, 조심해야 겠구나’하는 것을 깨달은 적이 있다.


이처럼 처벌은 죄를 죄로 깨닫게 해 준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가 잘못된 길에 들어서면, 그의 죄를 깨닫게 하시려고 어려움과 고통을 주신다. 이런 고통의 순간에 사람들은 고통을 면케 해 달라고 기도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그러나 회개하기 앞서 먼저 그 고통을 없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안된다. 먼저 그 죄를 내어 놓고 하나님앞에 토설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죄를 사해 주실 뿐 아니라 그 고통을 치유해 주신다.


두 번째 경우는 죄가 전혀 없는데도 그 사람의 믿음을 시험해 보시기 위해서 고통을 허락하시는 경우이다. 욥이나 아브라함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라 할 수 있다. 욥은 의인이었고 흠이 없었지만, 그의 믿음을 시험하는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역시 그의 믿음이 테스트당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고난을 겪어야만 했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상황이 되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런 반응이다. 베르디의 오페라 토스카 중에 보면,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남을 해친 일을 한번도 없소, 제단에 꽃을 바쳤소, 그런데 왜 이리도 어려워야 합니까?’ 라는 대목이 있다. ‘이렇게 당신을 위해 많은 것을 했는데 왜 이러한 고통을 주십니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욥처럼 고통중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또 아브라함처럼 그 고통속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어떤 사람의 믿음은 바로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그 믿음이 진짜인가 아닌가가 드러난다. 이럴 때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다면, 그는 정말 위대한 신앙인이다. 그리고 이 고통을 믿음으로 잘 극복하면, 그는 반드시 욥처럼,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더 큰 축복을 받을 것이다.


세 번째 경우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고통을 허락하시는 경우이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경험하고 큰 능력을 가진 바울이었지만 그에게는 하나의 육체의 가시가 있었고, 이 가시는 늘 바울에게 고통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제거해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다. 바울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12:7)


간혹 어떤 신앙의 가정에 보면 신앙도 좋고, 직장도 좋고, 하는 일도 잘되고, 다 좋은데, 자녀가 문제가 있다든가, 혹은 다른 것은 다 잘 되는데, 어떤 하나가 문제가 되어 고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경우 가운데는 간혹 그 사람을 너무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러한 문제를 허락하시는 경우가 있다. 사람은 모든 것이 만족스럽고 문제가 없다면, 나태해지기 쉽다. 그 뿐 아니라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의 능력과 힘으로 사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어려움이 있으면 겸손하게 되고 또 기도하게 된다.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내가 너무 교만하지 않도록, 그리고 기도하도록 하기 위해 이러한 어려움을 주시나 보다 하고 감사하면서 나가야 한다.


네 번째 경우는 그 사람을 연단시키기 위해 고통을 허락하시는 경우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40일 정도 걸리는 블레셋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광야의 길을 40년 동안 가게 하셨다. 신 8장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을 알게 하려고 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그들의 믿음을 연단시키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시기 위해 때로 이러한 고통과 시련을 허락하신다. 욥도 그의 고난 후에 그의 믿음이 더욱 연단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에서 연단을 받은 후에 적어도 그들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우리 신자들에게도 이처럼 영적인 연단과 승리를 위해서는 고통이 필요하다.


어떤 곤충학자가 나비 애벌레가 고치를 깨고 나오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을 보고는, 그 발버둥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워 칼로 구멍을 내고 쉽게 나오도록 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 나비는 오래 살지 못하고 죽어 버리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가 새로이 발견한 것은, 고치를 깨고 나오려고 발버둥치는 바로 그것이 그 나비를 생존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을 준다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고통을 지나면서 얻어진 힘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영적 전쟁을 승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능력이 된다.


다섯 번째 경우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경우이다. 제자들이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면서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본인의 죄때문 입니까’ 하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예수님은 누구의 죄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말씀하셨다.(요9:3) 그리고 실제로 그를 고쳐 주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셨다. 이 소경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해 나면서부터 소경이 되는 고난을 겪은 것이다.


때로 우리들에게도 우리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고난을 주시기도 한다. 최근에 <지선아 사랑해>라는 책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준 이지선 자매의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 자매는 꽃다운 나이에 교통사고로 심한 화상을 입어 전신이 이지러지는 아픔을 겪었다. 어떤 여자분은 쌍꺼풀 수술이 잘못되었다고 자살하기도 하는데, 젊은 여자가 얼굴 뿐 아니라 온 전신이 완전히 이지러졌으니 얼마나 큰 고난이었겠는가? 그러나 이 자매님은 그러한 고난 가운데서도 그것을 비관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림으로써, 어떤 목사의 설교보다도 사람들에게 더 큰 감명을 주었다. 이 자매로 인해 고난받는 많은 사람들이 큰 위로를 얻었고, 또 모르기는 해도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관심을 갖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고통은 자매에게는 너무도 큰 아픔이었지만, 오히려 그 고난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당신의 일을 이루셨다. 우리도 이런 고난을 당한다면 나의 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 여섯 번째 경우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당하는 고난이다. 옛날 선지자들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의 믿음 때문에 많은 고난과 죽임을 당했다. 기독교 역사에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전 재산을 몰수 당하기도 하고, 감옥을 가기도 하고, 급기야는 죽임까지 당한 수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있다. 그야말로 복음과 함께 당하는 고난이다.


우리도 내용과 정도는 다르지만, 믿음생활을 제대로 하려고 하다 보면 이런 저런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직장에서 왕따당하기도 하고, 재정적 손실을 보기도 하고, 승진에 손해를 보기도 하고, 때로는 직장에서 쫒겨나기도 하고, 집안에서 학대받기도 하고….


이처럼 믿음을 지키려다 고난을 당하는 경우에는 예수님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상이 그 만큼 크기 때문이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12)


믿음생활을 제대로 하려다가 손해를 보고 힘든 고난을 당할 때는, 우리 앞에 놓인 상을 바라 보자, 그러면 고통을 참을 수 있다. 예수님도 장차 다가올 영광을 보고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셨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처럼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것에는 한가지 만의 상황이 아니라 적어도 여섯가지 경우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각각의 상황에 대해 각기 다르게 대응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욥처럼 그의 믿음을 테스트하기 위해 고난을 당하는 사람에게 죄를 회개하라고 질책한다면 이는 잘못된 것일 것이다. 반대로 죄를 지어 책망을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욥의 고난을 이야기하면서 위로 한다든가, 믿음 때문에 고난당하는 것처럼 하늘의 복을 운운한다면 이것도 올바른 대응이 아니다. 각각의 상황에 따른 적절한 대응이 있어야 한다.


물론 성경속에는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또 다른 이유가 더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여섯가지 가운데 두 세가지가 한꺼번에 올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욥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했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믿음이 더욱 연단되는 결과를 얻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동안 광야를 방황하게 된 까닭은, 그들이 가데스바네아에서 범죄한 것에 대한 책망이기도 하면서, 또한 그들을 겸비하게 하고 연단하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고난을 받을 때는 반드시 기도하면서 믿음으로 극복해야 한다. “너희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약 5:13)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우리가 겸손하게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원하신다.


내가 당하는 고통이 이 경우들 가운데 어떤 것인지가 불확실하다면, 먼저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고난을 허락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잘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믿음생활이 나태하고 범죄하고 있는데도 그것에서부터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고난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낫다. 아무런 고난없이 믿음이 나태해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보다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더 큰 축복이기 때문이다.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 71)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나아갑니다’(찬 503장)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이 한가지를 명심하자. 모든 고난에는 뜻이 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마침내는 복을 얻게 해 주는 축복의 통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