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지난 6월에 청어람에서 했던 유진 피터슨 읽기에 대한 강의를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앞으로 총 6회에 걸쳐서 연재할 예정입니다. 저는 14년째 기독교 서적을 전문으로 번역하고 있는 번역가 양혜원입니다. 제가 번역한 유진 피터슨의 책은 공역을 포함해서 총 8권입니다. 나열해 보면, 「교회에 첫발을 디딘 내 친구에게」(The Wisdom of Each Other), 「거북한 십대 거룩한 십대」(Like Dew Your Youth-Growing up with your Teenager), 「현실, 하나님의 세계」(Christ Plays in Ten Thousand Places)(공역), 「이 책을 먹으라」(Eat This Book), 「그 길을 걸으라」(The Jesus Way), 「비유로 말하라」(Tell It Slant), 「부활을 살라」(Practise Resurrection)(공역), 그리고 가장 최근작으로 「유진 피터슨: 부르심을 따라 걸어온 나의 순례길」(The Pastor: A Memoir)입니다. 저는 학자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고, 그냥 번역가일 뿐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한 저자의 글을 자신의 모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생각하게 되는 몇 가지의 것들을 번역가 입장에서 다루어 본 것입니다.

4. 영성생활의 요소들: 인격성, 일상성, 인내와 기다림


이제 조금 더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서 그렇다면 피터슨이 말하는 영성의 내용 혹은 특징은 무엇이냐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피터슨 자신이 이것이 특징이라고 짚어서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의 책을 번역할 때 반복해서 등장하는 개념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기독교적 삶을 이야기할 때 그가 가장 많이 언급하는 특징으로 저는 인격성과 일상성 그리고 인내와 기다림을 꼽았습니다. (인내와 기다림은 인격성과 일상성의 특징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먼저 인격성입니다. 피터슨의 영성신학 시리즈를 번역하면서 이 단어를 정말 많이 접했습니다. 인격성, 관계성, 이 말이 안 나오는 데가 없습니다. 「그 길을 걸으라 」서문에서는 “인격성이 전부라고 말할 수 있는 복음”(14쪽)이라고 말합니다.「현실: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은 단연 인격적인 존재이시다. 또한 하나님은 언제나 관계 속에 계시는 하나님이다.…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인격적인 존재로, 인격적 관계를 맺는 분으로 계시하신다.”(28-29쪽)라고 말하고,「이 책을 먹으라」에서는 “계시의 모든 부분, 모든 양상, 모든 형태는 인격적이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관계적인 분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이 무슨 말을 하시든, 무엇을 계시하시든, 우리가 무엇을 받든 간에 그것은 인격적이며 관계적이다.”(57쪽)라고 말합니다. 또 이렇게도 말합니다. “우상은 탈인격화된 하나님, 탈관계화된 하나님이다.…우상 숭배의 핵심은 탈인격화다.”(「현실: 하나님의 세계」, 563쪽)(여기에서 밑줄 친 부분은 제가 한 것입니다.)

다음은 일상성입니다. 일상성은 종교성과 대립되는 의미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삶 자체’를 말하는 것이지요. 피터슨의 회고록에 보면 ‘Charity’라는 아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아이는 자신을 방문한 외할머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할머니가 계시는 동안에는 우리 하나님 얘기(godtalk) 하지 말아요, 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다고 나는 믿어요. 그러니까 우리 그냥 살아요.” 이 아이의 말을 통해 피터슨은 “하나님이 하나님 얘기로 비인격화되지 않고 자신들의 일상생활에, 말에서나 행동에서나, 하나님과 삶이 유기적으로 하나가 되는 그러한 일상생활에, ‘인격적으로 현존하시는 분’으로 이해되는 관계를” 이 아이가 요구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저는 이 아이의 말에서 ‘우리 그냥 살아요’가 참 많이 와 닿습니다. 다시 한 번 솔기의 이야기로 돌아가게 됩니다. 존재와 행동이 분리되지 않는 자연스런 일치의 삶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인내와 기다림은 앞에서도 말씀드린 대로, 인격성과 일상성의 특징 혹은 속성입니다. 인격성과 일상성은 서두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서두르면 인격성과 일상성을 놓치게 됩니다. 성급하게 목적에 도달하려고 할 때, 사람을 인격으로 보지 않고 동원할 숫자로만 보고,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로만 보게 됩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사람들은 인내하기보다는 갈아엎고 새로 시작하기를 좋아합니다. 새로 시작하는 일에는 흥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밀어버리고, 갈아엎고, 만날 새로 시작만 하는 삶은 기독교적 삶이 아니라고 피터슨은 말합니다.

“미국 교회는 새로운 출생이 주는 희열과 흥분에만 빠져 있다. 사람들을 교회로, 하나님 나라로, 큰 목적으로, 운동으로, 프로그램으로 끌어들이기에 급급하다.…미국인들은 일반적으로 성숙이 일어나는 환경에 순응하는 삶을 잘 견디지 못한다. 성숙이 일어나는 환경이란 조용하고, 명확하지 않고, 인내해야 하고, 인간의 통제와 관리에 종속되지 않는 환경이다. 미국 교회는 그러한 환경에 처하면 불안해한다.”「부활을 살라」서문에 나오는 말입니다.(밑줄은 제가 그은 것입니다.) 비단 미국교회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숫자 올리고, 동원하고, 사람을 잠시도 가만히 놔두지 못하는 것은 g한국교회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인격성, 일상성, 인내와 기다림. 너무도 상식적인 말들입니다. 영성은 신비로운 어떤 것이 아닙니다. 피터슨이 기도에 대해서 한 다음의 말이 저는 영성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는 신비스럽거나 무슨 비법과도 같은 영성이 아니다. 기도는 평범한 행위다.…그것은 우정의 행위처럼 간단하다.…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기도에서 일어나는 일은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 그리고 가족 안에서 늘 일어나는 일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비유로 말하라」, 2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