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젊은 기독인의 초상


사법시험 이야기


얼마 전 <다니엘 학습법> 열풍을 비판하는 글이 <뉴스앤조이>에 올라왔습니다. 서울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는 김동환 전도사님의 책이 이처럼 큰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 자체가 결국 한국 기독교의 상향성 또는 업적주의를 보여주는 것 아니냐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도 기독교 서점을 갈 때마다 베스트셀러 분야를 장식하고 있는 그 책을 보았지만, 제가 다시 대학에 진학해야 하는 형편이 아니기 때문에(?) 사서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 <뉴스앤조이>에 소개된 바에 따르면, <다니엘 학습법>의 중요한 메시지 중의 하나는 “완벽한 프로그램 하에 10분 단위까지 계산해 가며 학창생활을 하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김동환 전도사님과는 달리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어디에서도 완벽한 프로그램 아래 10분 단위로 계산하며 살지 못했던 저는, 시험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아주 많이 당황스럽습니다. 세속적으로 표현하자면 시험 때마다 운이 좋은 편이었고, 기독교적 표현을 빌자면 시험에 관한 한 하나님께서 저에게 언제나 특별한 은혜를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다 알고 계신 것처럼, 예수 믿는다고 모두 서울대를 나와, 성공한 벤처 기업가, 판사, 검사, 의사, 교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무슨 요술 방망이가 아니니까요. 예수만 믿으면 마음에 드는 대학에 갈 수 있다고 선전하는 교회 지도자가 있다면 교회를 때려치우고 차라리 입시학원을 열어야 할 겁니다.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고시에 합격하고 좋은 직장을 잡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것도 아닙니다. 진짜로 의미 있는 은혜란 나 같은 죄인이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실 자체를 말하는 것이지, 세속적 성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전제 위에서 저의 부끄러운 고시 합격 이야기를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식의 글은 아무리 조심해도 결국 자기 자랑이 되기 쉽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법시험이 제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까닭에 그냥 빼먹고 넘어갈 수가 없네요.


1989년과 1990년은 저에게 여러 모로 절망적인 시기였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변호사가 되겠다고 준비를 시작했던 사법시험은 대학을 졸업하도록 1차에도 붙지 못했습니다. 특히 4학년 때(1989년) 도전했던 시험에서는 총 320문제 중 단 1개 차이로 실패의 쓴잔을 마셔야 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저에게 등을 돌린 것 같은 느낌, 시험에 떨어져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차가운 벌판에 혼자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그 추운 느낌을 알고 있을 겁니다. 모두들 “저 자식은 별 능력도 없는 것이 사법시험을 하겠다고 폼을 잡는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데도 떨어지는 것을 보니 돌대가리가 틀림없어”라고 손가락질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사법시험 한답시고 대학 4년 동안 외국어 공부라고는 해 본 적이 없으니, 고시 떨어지면 회사 취직도 어려울 것이 뻔했습니다. “내년에는 꼭 붙을 것”이라는 주변의 위로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시험에 떨어져본 경험은 그것이 대학입시이든 사법시험이든 입사시험이든지 간에 인간을 성숙시키는 좋은 계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다른 친구들은 대부분 군대 연기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무지막지한 공부를 몇 년이고 계속할 마음이 없었던 저는, 졸업 직후의 1차 시험에도 떨어지면 그냥 고시를 집어치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대학원에 진학하면 혹시 1차 시험에 실패해도 포기하지 않고 또다시 응시하게 될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그 불씨를 아예 제거하기 위해 대학원을 포기하기로 한 것입니다(대학원에 진학하지 않으면 졸업 후의 1차 불합격과 동시에 군에 입대해야 했습니다). 제 인생에 가끔씩 써먹던 ‘벼랑 끝 전술’을 이때도 한 번 구사해 본 것이었습니다. 다행히도 1990년 6월, 1차 시험에 합격했고, 1년 동안 입영을 연기할 수 있었습니다.


1차에 합격하고 막 2차 준비를 시작할 무렵, 오랫동안 사귀어오던 여자친구가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이성교제가 절단 나는 것 역시 성숙의 좋은 계기가 되지요. 요즘처럼 먹고사는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된 세상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실연의 문제는 남 보기에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본인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유명한 영화 “유로파 유로파(Europa Europa, 1991년 칸느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습니다)”의 원작이 된 솔로몬 페렐(Solomon Perel)의 자서전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유태인임을 숨긴 채 소련의 소년단, 독일군 통역관, 히틀러유겐트(히틀러 소년단) 등을 두루 거친 뒤 고향으로 돌아온 솔로몬이 전해 듣게 되는 한 친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솔로몬의 체스 친구였던 예르지크는 독일 점령하의 게토(유태인 집단거주지)에서 유태 공산당 지도자로 영웅적 투쟁을 벌인 끝에 소련군에 의한 해방을 맞이합니다. 예르지크가 나치 하의 게토에서 겪은 고통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유태인들이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수용소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살아남은 그의 생명력은 그가 얼마나 강인한 사람인지를 보여주지요. 그런데 유태인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그는 한 아가씨와 사랑에 빠졌고 그 아가씨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자,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져 자살로 삶을 마감합니다. 어찌 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나치 하에서 영웅적인 투쟁을 벌인 끝에 생존한 사람이 겨우 여자 문제로 자살을 하다니요. 그러나 그럴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실연은 젊은이들에게 그만큼 심각한 문제일 수 있습니다.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실연을 통해 인간은 성숙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힐 수 있는 것이지요. 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실연을 통해 인간적으로 많이 성숙한 건 감사한 일이었지만, 두 달 정도를 책 한 권 읽을 수 없는 공황상태 속에서 허송하게 되었거든요. 그러고 나니 어느새 겨울의 문턱이었고 2차 시험은 8개월 앞으로 다가와 있었습니다.


겨울바람과 함께 정신을 바짝 차리고 공부를 시작했으나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저의 인생에 그 때만큼 열심히 공부한 때도 없었을 겁니다. 12월호에 잠깐 이야기했었지요? 1986년 여름 UBF에서 예수님을 만났다가 가을에 그 분과 이별한 친구가 있다구요. 바로 그 친구와 함께 고려대 대학원 도서관에 죽치고 앉아 그저 하루 종일 교과서를 읽고 밑줄치고 이해하고 외우고, 또 읽고 또 밑줄치고 외우는, 그런 단조로운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남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고, 같이 2차 시험을 준비하던 동료들과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모의시험을 쳐보아도 결과는 늘 꼴찌였습니다. 스터디 그룹 모임시간에도 워낙 아는 것이 없어 언제나 멍청하게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가끔 논쟁에 끼어 들어봐야 결론은 늘 제가 틀렸다는 쪽으로 났습니다. 남들이 잘 안보는 교수님들의 교과서만을 택해 공부한 탓에(남들이 좋다고 추천하는 교과서들은 도대체 저의 체질에 맞지 않았습니다) 제가 주장하는 것은 늘 남들과 달랐고, 그렇다고 저의 논리로 남들을 설득할 실력도 없었습니다.


시험이 한 달쯤 앞으로 다가왔을 때부터는 모두들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포기하는 친구들도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즈음(1991년 6월 중순), 옆자리에서 공부하던 친구가 저에게 행정법에 대한 질문을 하나 던졌습니다. “너 혹시 이 문제에 대해 설명 좀 해 줄 수 있냐?” 그런데 그 때가 시험을 겨우 보름 앞둔 시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저의 머리 속에는 친구가 질문한 문제와 관련된 지식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공부량의 절대부족을 절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미안하다. 전혀 모르겠다. 그게 도대체 뭐냐? 나는 그 용어도 모르겠는데…”라고 제가 대답하자 친구는 걱정스럽다는 듯이 “이거 이번에 나올 가능성이 높은 아주 중요한 거야. 그런데 아직도 이걸 모르면 어떻게 하냐? 집에 가서 책 좀 찾아보고 내일 같이 이야기해 보자”고 말했습니다. 저의 부족함을 보충해 주려는 고마운 배려였습니다. 그러나 시험 보름을 앞두고도 처음 들어보는 법률용어가 있다는 사실에 저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 8개월 최선을 다했지만, 역시 절대적인 공부량의 부족은 어쩔 수가 없구나. 어차피 떨어질 시험인데 이쯤해서 그만 두자. 내 실력으로는 사법시험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그 대화가 오간 직후,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가방을 쌌습니다. 그냥 집으로 가서 쉬고 싶었습니다. 시험을 눈앞에 두고 한나절이 천금같던 시기였습니다. 저의 심상찮은 변화를 눈치 챈 친구는 “야, 공부 좀 더하다 가. 너 왜 그러냐?”하면서 저를 붙잡았으나 저의 머리 속에는 정말 아무 생각도 없었습니다. “오늘은 집에서 쉬려고.” 가방을 들고 도서관을 나와 학교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아름다운 교정이었습니다. 봄을 보내고 여름을 맞이하고 있던 교정은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석조건물들과 만발한 꽃들의 조화로 한 폭의 그림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저에게는 어울리는 않는 낯선 그림들이었습니다. 집을 향해 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 서울역 앞 고가도로를 지날 때부터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왕 사법시험은 틀린 거고…. 빨리 군대를 가야겠다. 일단 군대를 가고 나면 결국 법조계와는 완전히 안녕이지만 어쩌겠나, 처음부터 내 길이 아니었던 것을.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 공연한 욕심을 부렸나 보다. 실력이 없는 거야 어쩔 수 없지…’


줄줄 흐르는 눈물을 애써 감추며 제1한강교를 지나고 있을 때였습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소리를 정확히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내부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분명한데 그렇다고 내가 내는 것은 아닌 소리, 소리라기보다는 오히려 영상에 가까운 것 같은 느낌, 어쨌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런 마음의 소리였습니다. 저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네가 믿고 있는 것은 너 자신이냐? 아니면 나냐?”


그 순간 저는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 내가 그동안 예수 믿는다고 떠들고 다녔는데, 과연 내가 믿고 의지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서 내가 지금 절망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어차피 나 혼자 힘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아니다. 그리고 이까짓 시험 안 붙는다고 내 인생이 망하는 것도 아니다. 내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그 깨달음을 얻는 순간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 날 밤은 집에 가서 여전히 마음속에 메아리처럼 울리고 있던 그 소리를 깊이 묵상했고, 다음날부터는 다시 학교에 나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안정된 상태에서 시험 전날까지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그 음성은 이후에도 제가 불가능한 일에 부딪힐 때마다 마치 중요한 삶의 원칙처럼 저를 일깨우는 기억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사법시험 2차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이렇습니다. 2차 시험은 논술식으로 하루에 두 과목씩 총 여덟 과목을 평가합니다. 한 과목당 50점짜리 큰 문제가 하나, 25점짜리 작은 문제가 두 개 출제되는 것이 보통이었으니, 모두 합하면 약 24문제가 되는 셈이었지요. 각 과목 100점이 만점이지만, 평균으로 보아 65점 정도만 되면 수석을 할 수 있고, 55점 정도만 되면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사법시험 2차가 어려운 이유는 무엇보다도 공부해야 할 범위가 엄청나게 넓다는 데 있습니다. 민법 한 과목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가장 기본적인 교과서들만 해도 모두 합치면 3,000페이지가 넘습니다. 교과서들의 내용도 날로 깊이를 더하고 있어서 하루가 다르게 두꺼워지고 있습니다. 워낙 책이 두껍다 보니 마지막 부분을 읽을 때쯤이면 처음 읽었던 부분은 모두 잊어버리게 되지요. 그래서 고시공부를 흔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 표현합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엄청난 범위 중에서 실제로 시험에 출제되는 것은 겨우 30-40페이지에 불과하다는데 있지요. 인간의 머리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 엄청난 범위를 다 외울 수는 없고, 어차피 이해하고 잘 정리하고 최소한의 것만을 암기해야 하는데, 하필 자기가 간과한 부분에서 문제가 나오면 실패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사법시험은 이른바 ‘운’도 많이 작용하는 시험입니다. 물론 공부를 전혀 안 한 사람이 시험에 붙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만 상당한 준비를 마친 사람 중에서 누가 과연 그 좁은 관문을 통과하느냐를 결정하는 데는 운도 많이 작용한다는 의미이지요.


여덟 과목 중 제가 가장 자신 있어 한 것은 형법이었습니다. 법대기독학생회 지도교수로 모시며 많은 영향을 받았던 김일수 교수님의 전공이 형법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형법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었지요. 그 다음으로는 헌법이 자신 있었고, 아마 그 다음이 민법 정도 되었을 겁니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저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2차 시험 공부할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고, 그 결과 2차 시험에만 포함되어 있는 행정법, 상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등의 과목은 교과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읽은 횟수가 3회 정도밖에 안되었습니다. 가장 자신 없는 과목은 민사소송법이었습니다. 시험 마지막까지도 저는 도대체 민사소송법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시험 보름 전에 저를 절망시켰던 행정법도 비슷했습니다.


1991년 7월 마침내 시험 날이 되었습니다. 사법시험 2차 시험 현장의 모습은 조선시대 과거장을 연상하시면 됩니다. 시험장에 들어가면 둘둘 말린 전지가 한 장 칠판에 붙어있고 그 속에 시험문제가 적혀 있습니다. 시험 시작종이 울리는 순간, 말려있던 종이가 쫙 펼쳐지고, 그 때부터 2시간동안 거기 적혀 있는 논제들을 정신없이 적어나가면 됩니다. 말려있던 종이가 펼쳐지기 전까지는 피 말리는 긴장감이 교실에 넘쳐나고 종이가 펼쳐지는 순간 교실에는 탄성이 터져 나옵니다. 주먹을 불끈 쥐고 “됐어”라고 자신 있게 소리치는 학생도 있고(이상하게도 이런 학생들 중에 낙방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너무 좋아하다가 논점을 놓치는 경우가 많은 까닭입니다), 자기가 준비하지 않은 엉뚱한 논제에 넋을 잃는 수험생도 있습니다. 그 때의 긴장은 정말 인생에서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2차 시험 응시 첫날, 국민윤리나 헌법은 누구나 다 아는 평범한 주제가 나왔기 때문에 특별히 잘 쓰는 사람도 없고 못쓰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첫날 시험을 끝내고 출발은 그런 대로 괜찮다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그래도 둘째 날과 셋째 날 과목들이 모두 자신 없는 것들뿐이라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들은 둘째 날 시험부터 일어났습니다. 행정법부터 시작해서 두루마리가 펼쳐지는 순간마다 저는 저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신기할 정도로 제가 시험 직전에 마지막으로 점검한 부분에서 문제들이 출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민사소송법은 제가 시험 준비기간 동안에 한번도 제대로 이해해 본 적이 없는 부분에서 큰 문제가 출제되었는데, 그것도 역시 시험 바로 직전에 제가 화장실에서 읽고 들어간 내용이었습니다. 아마 시험 직전에 읽지 않았더라면, 두 페이지도 제대로 적지 못했을 문제였습니다(보통 큰 문제는 여덟 페이지 정도 적어야 합니다). 나중에 들으니 아버지께서 매일 시험시작 30분전에 학교 교장실 문을 걸어 잠근 채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제가 다른 것은 기도하지 않겠습니다. 제발 우리 아들이 지금 보고 있는 바로 그 부분이 시험에 나오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아버지다운 순진한 기도였고, 저는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셨다고 믿습니다. 그런 식으로 계속 ‘큰 문제는 직전에 본 것’이, ‘작은 문제는 원래 잘 아는 것’이 나오다 보니, 셋째 날 시험이 끝나고 난 후에는 합격을 자신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날의 형법은 제가 가장 자신 있어 하던 과목이었고, 형사소송법도 다른 과목들에 비해서 위험부담이 적은 과목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시험이 저의 힘으로 붙게 된 것이 아님을 명확히 하려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 날의 형법은 예상했던 것과 여러 모로 달랐습니다. 문제 뜬 것을 보고 자신만만하게 답안지를 채운 다음 여유 있게 시험장을 나섰습니다만, 쉬는 시간에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제가 논점을 완전히 잘못 잡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정작 적어야할 논점에 대해서는 한 줄도 적지 못했던 것이지요. ‘오, 하나님, 저를 이렇게 실패하게 만드실 거라면 어제까지는 왜 그렇게 저를 도와 주셨습니까’라는 한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사법시험에는 과락제도라는 것이 있어서 단 한 과목이라도 40점 이하의 점수가 나오면 무조건 떨어지게 되어 있답니다. 따라서 나머지 일곱 과목을 아무리 잘 쳤다 하더라도 형법 한 과목이 40점 밑으로 나오면 설사 나머지 점수를 합산한 것이 수석에 해당한다고 하더라도 그냥 떨어지는 것입니다. 오후의 마지막 형사소송법 시험을 뭘 적었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때우고 나서 시험장을 터벅터벅 걸어 나오자니 제 입에서는 한숨만 흘러나왔습니다.


바로 그 때, 저는 다시 한번 저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지난 번 것보다 한결 간단했습니다.


“너는 내 것이라.”


마치 선언과 같은 짤막한 문장이었습니다. 언젠가 들어보았으나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음성이었습니다. 그 음성을 듣는 순간 감격이 몰려왔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왜 이렇게 이런 소리가 자주 들리나. 혹시 내가 마음속으로 혼자 상상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하는 의심도 생겼지요.


그런데 그 날 밤에는 더 재미있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사법시험 끝나는 날이 금요일이었기에, 저는 감사 기도를 드리러 교회 철야기도 모임에 나갔습니다. 나흘 동안 거의 한 잠도 자지 못했기 때문에 거의 제 정신이 아닌 상태였는데 어떻게 철야기도 나갈 생각을 했는지 지금도 신기합니다. 어쨌든 그 날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서니, 부목사님께서 막 설교를 시작하시는 중이었습니다. 본문은 이사야 43장 말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의심 많은 저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설교 내용은 잘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너는 내 것이라”라는 말씀에서만 눈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낮에 들었던 것과 똑같은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이 신기한 현상을 그저 우연이라 생각할 수도 있고, 고시 공부라고 하는 비정상적인 관문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이상심리라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날 들은 음성이 하나님의 것이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강원도 홍천의 예수전도단 전도학교에 이어 또 한 번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한 순간이었습니다. 그 철야기도 이후 저는 이사야 43장을 무척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의 배경은 물론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국가를 향한 것이었지만, 저에게는 ‘물 가운데로, 불 가운데로’라는 말씀이 더하고 뺄 것 없이 제 인생을 향한 위로의 말씀이라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제 글을 읽어 오신 분이라면 제 삶에 영향을 준 몇 가지 사건들이 하필 물이나 불과 관련되어 있었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시험 발표까지 두 달 남짓한 기간 동안은 학교에서 예수전도단 신입생 후배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그 후배들이 “결과가 어찌될 것 같으세요?”라고 물어보면 “붙으면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고, 떨어지면 실력 없어 떨어진 것이니 별로 걱정 안 해”라고 담담하게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시험 붙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어차피 이미 하나님의 것이 된 사람인데 그까짓 시험에 떨어진다 한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하는 배짱도 있었기 때문에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함께 성경공부를 했던 신입생 가운데 고환경, 권대식 두 후배는 사법시험에 합격해서 로펌에서 일하고 있고, 윤유덕은 보험회사에서 열심히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런 저를 옆에서 지켜보던 1년 후배 류기인은 벌써 몇 년째 검사로 일하고 있지요. 선교단체 출신들 치고는 비교적 특이한 길을 걷는 무리들이 생기게 된 셈입니다.


그 해 가을 사법시험 합격자 명단에는 제 이름이 있었습니다. 성적도 아주 우수한 편에 속했습니다. 실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결과였습니다. 각 과목의 성적은 그 좋은 결과가 제 실력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제가 가장 자신 없어하던 과목부터 시작해서 평소실력과는 완전히 역순으로 점수가 나왔던 것입니다. 가장 자신 없던 민사소송법과 행정법에서는 70점이 넘는 경이로운 점수를 얻었고, 가장 자신 있어 하던 형법은 47점으로 간신히 과락을 넘겼습니다. 형법 과락자가 너무 많아 형법 점수를 전체적으로 10점씩 올려주었다는 뒷이야기가 수험가 주변에 흘러나온 것을 보면 원래 저의 점수는 37점으로 과락에 해당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 시험결과 앞에서 정말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4학년 때 아까운 점수로 1차에 실패하도록 내버려두신 하나님의 사랑도 뒤늦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4학년 때 1차에 실패했기 때문에 그 해 가을 동안 헌법, 민법, 형법의 기초를 충실히 다질 수 있었고, 덕분에 2차 수험기간이 너무나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극복이 가능했던 것입니다(참고로 4학년 때 1차에 합격했던 저의 동기들은 다음해 모두 2차 시험에 낙방했습니다. 그해 1차에 합격했더라면 저도 아마 그 대열에 동참했을 겁니다)


저는 그런 기적적인 과정을 통해 사법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다니니까, “실력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돌아다니면 어떻게 하냐? 변호사 영업에 지장 있잖아”라고 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래도 사실인 것을 어쩌겠습니까? 제 인생에는 그보다 더 큰 기적도 많았지만, 오늘은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사법시험 이야기를 한 번 해 보았습니다. 물론 저의 글을 읽고 하나님이 그저 기도하면 시험이나 붙게 해 주는 그런 분으로 오해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에 응답할 수 있는 분이신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제가 느낀 점 몇 가지를 나눠보겠습니다.


첫째는 ‘은혜’에 관한 것입니다.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저는, 그 메시지에 알게 모르게 담겨 있는 인과응보의 논리에 놀랄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아브라함의 믿음도 하나님 앞의 어떤 ‘행위’로 해석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이 있어야 축복이 뒤따른다는 논리가 그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은혜는 그 누구의 행위보다 앞선 것이며 거기에 아무런 이유를 찾을 수 없다’고 믿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무리 믿음으로 부르심에 순종했다 해도, 그 순종보다 앞선 것이 부르심과 은혜였습니다. 부르심이 시작되었을 때 이미 축복은 시작된 것이고, 왜 하필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건 그저 은혜일뿐입니다. 저는 믿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혜는 원래 그런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저에게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셨는지, 왜 여러분에게도 그런 음성을 들려주고 계신지 설명할 방법은 없습니다. 왜 나를 부르시고 복 주시면서, 내 친구에게 그런 은혜를 부어주시지 않는지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걸 자꾸 설명하려고 하고, 그건 “김두식에게 이러저러한 믿음과 선행과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라 해석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엇나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런 저런 은혜를 부어주신 것은 결코 제가 남보다 하나님을 잘 믿었거나 정직하거나 신실해서가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먼저 저를 사랑하셨고, 제 필요를 아셨고, 그걸 채워주신 것일 뿐, 제 쪽에서 원인을 찾을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둘째로, 어떤 시험이든 쉽게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실력이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당사자조차도 자신의 실력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거대해 보이는 시험 앞에 지레 겁을 먹고 시험장에 가기도 전에 싸움을 포기합니다. 저도 아마 시험 보름 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면 분명히 시험을 포기했을 겁니다. 시험을 포기하고자 하는 기독인이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면, (웃기는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아무리 여러분이 지금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그 부분에서 문제가 안 나오면 그만’이라는 사실입니다. 시험을 준비하다보면 왠지 내가 잘 모르는 그 부분에서만 문제가 나올 것처럼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확률적으로도 그건 진실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되,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그 전 날의 기도를 잊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시험 합격 전 날 저는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올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판검사, 변호사 아무 것도 안 해도 좋으니, 제발 시험만 붙게 해 주세요. 고시 공부하는 동안 저의 인생은 마치 벌레와도 같았습니다. 이제 인간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니 시험 좀 붙게 해 주세요. 하나님께서 만약 저를 시험에 붙여주신다면 저는 앞으로 평생 동안, 저하고 함께 시험을 쳤지만 합격하지 못한 다른 친구들이 세상에서 누리는 것만큼의 평균적 부와 명예만을 누리며 살겠습니다. 시험에 붙더라도 마치 시험에 붙지 않은 것과 같은 마음자세로 살겠습니다.” 이런 기도를 올리게 된 이유는 간단합니다. 시험에 붙게 되더라도 어차피 제 실력이 아닌 순전한 은혜로 붙게 된 것일 텐데, 그 추가적 열매를 제가 다 누리고 사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제가 잊지 않으려 노력했던 것은 이 결심 하나였습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둘 때 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았지만, 저는 그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노력으로 얻은 열매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하나님께서 제가 그 결심을 지킬 수 있도록 잘 인도해 주신 것 같습니다. 최소한 경제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대학 동창들 중 사법시험에 실패해서 다른 직장에 진출한 사람들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저보다 많은 수입을 올리며 살고 있으니까요.^^


사실 살아오는 동안 누구나 한 번쯤은 ‘그 전 날’의 경험을 갖기 마련입니다. 대학 합격자 발표 전 날, 입사시험 합격자 발표 전 날, 사랑을 고백하기 전 날, 중병 진단 결과를 알기 전 날 등등. 그 때마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런 저런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결과를 알게 되어 환호성을 지르게 되지요. 동시에 ‘그 전 날’의 결심들은 눈 녹듯이 잊어버리게 마련입니다. 일단 하나의 관문을 뛰어넘고 나면 그 모든 것이 다 자기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착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당장 법조계라는 하나의 분야를 생각해 봐도 그렇습니다. 법조계에 진출한 사람들 모두, 아니 기독교인으로 법조계에 진출한 사람들만이라도 ‘그 전 날’의 기도와 결심을 잊지 않았다면 우리 법조계가 이렇게 이상한 모습이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어렵지만 ‘그 전 날’의 기도와 결심을 잊지 않는 게 저나 여러분들이 행복을 누리며 사는 지름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기 껏 시험 하나에 합격한 이야기를 너무 길게 적었군요. 미숙한 제가 누려온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작은 경험이, 지금 절망 가운데 있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긴 제 부족한 글 솜씨를 생각하면, 제 글을 읽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이나 안 생기면, 그 자체로 은혜겠지만 말이지요.


(*편집자 주) 2002년 9월부터 월간지 <복음과 상황>과 eKOSTA가 기사 제휴를 하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역사와 사회를 조명하는” 복음주의 정론지 <복음과 상황>에 대한 자세한 문의는 <복음과 상황> 홈페이지 (http://www.goscon.co.kr) 나 이메일 goscon@chollian.net 로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