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의
경건의 연습과 약속 (1)
진리가 왜곡되는 시대

십여년 전 나는 유학생활을 시작한 지 몇 개월만에 내가 변화받아 섬기던 한인
이민교회가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았다. 그 후에도 수 많은 이민교회가 분쟁하고, 쪼개지는 아픔을 보았고, 또 겪었다. 그러고 보니
이민교회의 수 없는 분쟁과 아픔 속에서 내 믿음이 자란 셈이다. 지금도 도시 도시마다 한국 이민교회들은 서로의 문제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이들 교회 속에서 섬기는 유학생들도 필연적으로 상처입을 수 밖에 없으며, 이런 현실 속에서 저들의 믿음은
넘어지며 또 성장하고 있다. 열악한 이민교회의 환경 속에서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는 크리스천 유학생들이 어떻게 신앙을 훈련하고
단련할 것인가에 대하여 본 칼럼에서 몇 회에 걸쳐 쓰고자 한다.

내가 어렸을 때 살았던 시골에서 드물게 만났던 크리스천은 시골에서 참 형편없이
인기없는 사람들이었으나, 그들의 신조를 믿는 우직함과 정직성과 신실성에서는 가장 신뢰받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크리스천은
말만 떠벌리는 허풍쟁이요, 기복주의에 탐닉하는 위선주의자로 사회에 비쳐지고 있다니 슬픈 소식이 아닌가? 또 이곳 한인 이민교회는
준비되고 훈련되지 못한 교회의 지도자들 때문에 얼마나 중병을 앓고 있는가? 모두가 예수님의 열 두 제자처럼 혹독하게 훈련받고,
교회의 지도자로 선택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세상의 잘못되고 왜곡된 신학과 변질된 가치기준으로 훈련 안 된 교회의 지도자를
‘서로 협력하여’ 세웠으니, 이 시대에 한국교회와 이민교회가 고통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최근 한국교회의 이러한 문제점을 분석하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나는 본질적인
문제는 첫째로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혼동한 데 있고, 둘째로는 훈련 안 된 사람을 무분별하게 교회의 지도자로
세운 탓이라고 본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준엄하신 공의는 동전의 양면같이 존재하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이 두 속성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우리를 사랑하사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사랑의
주님께서 선포하신 공생애의 첫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4:17)”였다. 결국 우리 죄의 회개함 없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무리 주님의 사랑이 크다고 하실지라도, 죄의 회개함 없이 죄의 용서는 없다는
준엄함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겠는가? 죄가 있는 곳에는 “회개”의 선포가 있어야지, “사랑”이 선포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많은 현대의 크리스천들은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며, 사랑으로 죄를 감싸라고 요구하고 강요하고 있다. 물론
사랑은 우리의 허다한 허물을 덮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를 회개함 없이 사랑으로 덮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시대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세의 징조에 대해 이른 것 같이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4:3-4)”한 그런 시대가 되었다. 목회자들이 죄있는 곳에 회개를 선포하면 교인들을 억압한다고 반발한다고 하니,
교인들은 자기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목사들만 찾게 되고, 또 양식있는 목자들도 그 풍조를 따라가게 되었다. 주님의 사랑 만을
이야기하면 너무도 감미롭고 달콤하며 듣기에도 좋다. 그래서 현대의 교회들은 세상의 많은 죄와 크리스천의 잘못된 죄악을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다 덮고 말았다. 결국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에 어긋나면 병들기 마련이다. “회개”를 선포해야 할 곳에서 사랑으로 죄를
덮었으니, 종래는 이것이 죄악으로 곪아서 냄새가 나고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되어있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복음을 우리는 “죄의
회개”의 선포없이 너무도 싼 값에 주어버리지 않았는지 돌이켜 볼 일이다. 죄의 회개를 말하면 모두 싫어하고, 그래서 지금 한국교회와
이민교회가 병이 나고 있다.

내가 아는 많은 한국교회와 이민교회가 지금도 이 사랑과 공의를 바로 이해하고
적용하지 못하여 분쟁에 휘말려 있다. 사랑없는 하나님의 “공의”를 들이대면 구원받을 자가 누가 있겠으며, 용서받을 행위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여전히 “공의”는 하나님의 의요, 사랑이다.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이란 “죄의 회개함”이 있는 곳에 무조건적인
용서를 약속해 주신 것이다. 주님과 함께 골고다에 못박혔던 한 강도는 단순히 “죄를 회개함”으로 주님과 함께 낙원에 갈 수 있다는
무한하며 무조건적인 사랑의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은 30냥에 예수님을 팔고서 회개함이 없이 목매어 죽어 버린 가룟 유다를 연민으로
긍휼히 여길 수는 있으나, 사랑으로 그의 죄를 덮어 줄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다.

나는 무엇보다도 이 시대의 제일 큰 위기는 참된 진리와 가치를 분별하는 능력을
우리 모두가 잃어가고 있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급히 변화하는 가치와 문화는 진리와 비진리 사이에 존재하는 선명한 기준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리며, 시대에 따른 모호한 새로운 삶의 기준을 만들어서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다. 이 시대를 사는 모든 크리스천도 예외는
아니어서 하나님이 성경에 분명하게 말씀하신 진리도 왜곡하고 변질시켜서 우리에게 강요하는 변질된 신학과 거짓 선지자 및 크리스천
가치와 문화를 보면, 이 시대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기 원하는 크리스천들에게 위기의 시대임이 분명하다.

이미 미국에서는 한번 이혼한 경력이 있는 부부가 거의 50%가 넘는다고 하니,
이혼이 하나님이 원치 아니하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막10:2-9) 이제 교양없는 소치로 받아들여지며, 또 이혼에 대해 공개적인
견해를 밝히는 것은 이 사회의 금기사항이 되었다. 동성연애자가 너무 많아서 하나님이 금하신 동성연애(레20:13,롬1:24-27)를
합법화 해주고 있다. 미국에서 결혼하였느냐, 아이들이 몇이냐고 묻는 것은 큰 결례가 되는 질문이 되었다. 심지어 많은 크리스천
사이에서 조차도.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이라는 베일 속에 준엄하신 하나님의 공의를 묻어버리길 원하는 크리스천이 너무도 많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공의는 항상 동전의 양면처럼 병행하며 조화를 이루는 진리임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이 시대의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준엄하신 공의를 너무 쉽게 저버리고 있다.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조지 부시는 알 고어 전부통령과의 TV 공개토론회에서
동성연애의 합법성에 대하여 기자의 질문을 받자,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해야 되는 것으로 알고있다고 두번이나 확실하게 답변하였다.
미국의 혼탁한 현실을 고려할 때 대단히 용기있는 대답이었다. 최근에 접한 부시의 신앙고백을 읽으면서, 그가 신실한 크리스천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결코 여기서 이혼이나 동성연애문제 같은 뜨거운 감자를 갑론을박할 생각은 전혀 없다. 이혼한 사람이나 동성연애자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하고, 저들의 아픔을 나누며, 새로운 삶을 살도록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바르지 않다고 하신 것을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옹호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전혀 없다.

분명 이 시대는 하나님의 진리와 공의가 왜곡되는 시대이며, 이것을 너그럽게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수용하는, 불의와 야합된 크리스천이 난무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주님은 말세에 믿음 보겠느냐고 물으셨던
것일까? 이 시대가 이처럼 혼탁해진 것은 이 시대를 주도하는 세대를 하나님 말씀으로 훈련하고, 영적인 싸움을 위해 무장시키지
못한 탓이며, 다가올 세대의 혼탁함을 미리 예측하며 대비하지 못한 탓이다. 이래서 성도의 신앙의 바른 훈련과 경건의 연습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나는 이런 관점에서 크리스천 유학생은 유학생활동안 부지런히 신앙과 학문을
겸비하여 훈련하고 배워야 된다고 생각한다. 미래의 크리스천 지도자가 될 유학생 크리스천의 신앙훈련은 너무도 중요하다고 믿는다.
물론 크리스천 유학생이 전공의 학문을 공부하면서 주님의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나, 지금은 도리어 신앙을
배우고, 훈련하고, 또 단련할 때라고 본다. 진정한 변화없이, 혹심한 훈련없이 진정한 섬김이 있을 수 없으며, 아직은 균형있고
충성스런 섬김을 이루기에는 좀 이르지 않나 생각해 본다. 졸업 후에 다가올 세대가 여러분의 능력있는 참 믿음을 요구하며 또 기다리고
있다. 지금은 향방없는 섬김에 너무 열중하기 보다는 도리어 신앙을 갈고, 닦고, 훈련하고, 연단하기에 초점을 둠이 옳다고 본다.
신앙은 훈련이다. 주님은 훈련없이 사람을 들어 쓰신 적이 없다.

유학생에게 절대로 필요한 것은 끊임없는 경건의 연습과 훈련이다.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맡아서 목양하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하였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딤전 4:7-9)”.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유학생들이 받을 만 한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유학생의 학업과 전문성 계발에 도움이
되고, 구원에 이르는 약속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경건의 혹독한 연습과 훈련이 있어야만, 흔들리는 이 시대에 사랑을 공의와 함께
말할 수 있고, 공의를 사랑과 함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진정한 크리스천이 될 수 있다.

경건의 혹독한 연습없이 허탄한 말을 너무 많이 하는 것처럼 무섭고 망령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된 나의 경건의 연습이 나로 하여금 유학생들에게 권면하는 글쓰기를 두렵게 한다. 다음
칼럼에서 만날 것을 다시 기대하며 나는 오늘도 주님께 기도한다. 주님의 마음을 주십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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