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3년 2월호

크리스마스를 앞둔 며칠 전부터 일기 예보에서 비가 내릴 거라고 보도했습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하지 못하고 있던 우리에게 하늘에서 아름답고 탐스런 눈꽃송이를 뜻밖의 선물처럼 듬뿍 내려주어, 마음을 무척 들뜨게 만드는 화이트 크리스마스 이브였습니다.


무언가 특별한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막연한 기대감마저 갖게 하는 오후에 손님이 한 분 찾아 오셨습니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P부인이었는데 기쁨이 가득 찬 밝은 얼굴로 들어오자마자 저를 다정히 안아 주면서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차를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길 나누다가 지난 저녁 그녀와 그 가족들이 경험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좀더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 그녀가 제게 해준 이야기를 그대로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어제 아들네 집에 갔었다우. 우리 큰아들 말이야, 얼마 전 목사 안수 받고 다음달부터 켄터키의 작은 도시에서 목회를 시작하기로 했다고 전에 말했죠? 그래서 이곳의 집과 모든 일들을 정리해 나가면서 온 가족이 기도로 준비를 하고 있지. 그 아인 참 신실해요. 며느리도 그렇고.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마음이 진실한 아이들이지. 그 애가 소명을 받고 안정된 직장을 그만 두고 신학을 하겠다고 했을 때 우리 가족 모두는 기뻐하며 언젠가는 이루어질 일이라고 믿고 있었기에 두손들어 환영했었다우.


아무튼 그 집에서 어제 작은 파티를 열었다우. 동네 이웃들을 몇 가정 불러서 간단한 저녁 식사를 하며 미리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거였지. 그런데 바로 이웃의 두 집은 전혀 믿지 않는 가정들이라 우린 특별히 기도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그들을 맞았지요.


한 가정은 남편은 오지 않았고 부인과 세 명의 아이들이 왔는데, 초저녁인데도 그 여자는 술에 취해 있는 거 같았다우. 머리와 옷매무새도 흐트러져 있었고 산만한 태도와 말할 때마다 술 냄새마저 풍기고 있었으니까. 나와 남편은 좀 당황했지만 아들과 며느리는 아주 다정하게 그녀와 아이들을 대하더구만. 아이들도 보살핌을 받지 못한 것처럼 단정하지 못한 차림새에 버릇없는 행동이 몸에 배어 있는 것 같았어.


그 여자의 이름은 수전이었는데 아이들 이 식탁에서 예의 없이 구는 것을 보면서 좀 부끄러워하며 “ 이 동네에서 십 년이 넘게 살았지만 우리 가족이 초대받은 건 처음이에요. 우린 남들과 어울리는데 익숙하지 못하답니다.” 라고 말하더군. 다섯 가정의 이웃과 우리 부부, 아들네 가족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했어요.


참, 내 손녀 알죠? 한나 말이유. 올해 다섯 살이 되었는데 그 앤 정말 특별하다우. 맑은 두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천사를 만나고 있는 것 같지. 게다가 그 어린것이 두 손을 꼭 쥐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아마 하나님도 그 애의 기도는 다 들어주실 것 같아. 그 아인 정말 축복이야, 암 하나님의 선물이고 말고. 아, 이야기가 다른 데로 흐를 뻔했네. 한나 이야기만 나오면… 호호.. 늙으면 다 이런다우.


식사를 마치고 케잌을 돌리고 있는데 수전이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더군. 멀리 가는 것 같진 않아서 그냥 모른 척 하고 다른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 아이들은 지하실에 내려가서 장난감과 놀이 기구들을 가지고 서로 잘 어울리며 놀고 있었구. 얼마 후 수전이 들어왔는데 눈물을 글썽이며 자리에 앉는 거야. 우리는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해서 모두 그녀를 향해 시선을 집중했지. 수전은 한 동안 울음을 억제하고 나서야 말문을 열었다우.


“ 방금 전에 저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마당에 나갔었답니다. 여기서 몇 시간씩이나 참아서 담배를 여러 개 계속해서 피고 있었는데 한나가 저를 빤히 쳐다보는 거예요. 하도 열심히 쳐다보기에 왜냐고 물었죠. 한나가 뭐라는 줄 아세요? 오, 세상에… 담배를 그렇게 많이 피면 아줌마가 아프게 되지 않냐고 물으면서 눈물이 고인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거였어요. 정말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이죠.“ 그녀는 다시 울먹이느냐고 목이 메인 것 같았다우.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누구에게도 사랑 받아본 적이 없었답니다. 남편은 거의 매일 때리고 욕을 퍼붓곤 해요. 몸에서 피가 나고 다쳐도 우리 아이들은 저를 걱정하기는 커녕 더러운 욕을 하거나 웃으며 놀리기만 해요. 그 아이들도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르기 때문이겠죠. 다 내 탓이겠지만….


난 늘 술에 취해 살아요. 그렇지 않으면 한 시도 견딜 수가 없거든요. 이웃들도 모두 다 저를 무시하고 경멸해요. 아무도 저에게 말을 걸지도 않고 마주치는 것조차 싫어하지요. 상점에서도 제가 지나가면 의심스런 눈으로 제 뒤를 보는 걸 느낀답니다. 아무도, 아무도 절 사! 랑하지 않아요. 전 그냥 그 상태를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거구요. 그런데 한나가 저를 보고 사랑한다는 거예요. 저 예쁘고 귀한 아이가 저처럼 냄새나고 지저분한 사람을 말이지요. 오, 세상에.. 저를 사랑한다구요!!“ 수전은 기쁨과 슬픔이 겹쳐서 소리내어 울었고 방에 있던 모두가 훌쩍이기 시작했다우.


누군가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우린 다 따라서 찬송을 시작했지. 이웃 집 부인이 수전을 끌어안고 낮게 기도를 시작했고 누군가는 “수전, 사랑해요” 라고 말하기까지 했다우. 어제 우린 정말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우. 난 믿어요.
수전이 머지않아 하나님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도 깨달을 거라는 걸.



이야기를 마친 P부인의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저도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기대하지 못했던 커다란 선물을 듬뿍 받은 것 같습니다. 가슴 가득 즐거움이 차 오르는 것을 느끼며 창 밖을 바라보았습니다. 하얗게 눈 덮인 저녁이 너무나 환하고 따스하게 느껴졌습니다. 누군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기 위해 한 밤에 몰래 다가올 것 같은 저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