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죄가 관영하는 이 세상에서 미끄러짐 없는 신앙생활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실천하며, 거룩한 신앙인으로 책망할것 없는 삶을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숨쉬기를 할때 들숨과 날숨을 의식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들이마시고 내어 밷을 수 있듯, 주의 말씀을 그렇게 자연스레 순종해 가며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너무 야무진 공상일까?

 위의 질문 뒤에는 나의 미끄러짐으로 인한 아픔이 숨어 있다. 내게 있어 미끄러 졌다는 것은 하나님을 따르며 순종하는 삶에서 벗어났다는 표현이다. 그것은 크게 벗어났던 작게 벗어 났던지간에 내게 있어서는 미끄러짐이다. 특히 같은 상황에서 똑 같이 미끄러 넘어졌을땐 더욱 더 처절하게 느껴져서 나의 한심한 신앙생활로 인해 눈물을 그렁이며 아파하기도 한다. 더우기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보는 데서 미끄러졌을 경우 나는 더욱 좌절한다. “그렇게 살아 가면서 어떻게 캠퍼스 사역한다고 하고, 교회에서 설교 하고, 학생들 상담하지?” 라고 묻는것 같다. 아 내게 이같은 미끄러짐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대부분의 미끄러짐에는 나의 부주의가 많다. 미끄러운곳을 걸어갈때는 긴장도 해야 하는데 그냥 방심하고 진행할때 미끄러진다. 내 발걸을음 잘 점검하지 못하고, 주변의 환경을 기도를 통해, 또 말씀을 통해 분별해 가면서 지혜롭게 가면 미끄러짐을 극소화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영적 부주의는 미끄러짐을 경험하게 한다. 늘 익숙해진 대학 캠퍼스가 내 생활의 주요 무대인 나에게는 영적인 긴장감을 갖기 보다는 늘 가던곳이고 하던 것이니 방심하게 된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늘 만나고 얼굴을 대하는 편안한 가족이기에 말에서나 행동에서 실수할때가 있다. 아내에게 무례한다던가, 아이들의 말을 온전히 귀담아 들으며 아이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일에 방심하고 있을때가 있다. 

일상생활의 부주의가 미끄러짐의 일차적 요인으로 작용하지만 내게 있어 정말 중요한 장애물은 나의 교만이다. 나의 교만은 하나님을 의지함 보다 나의 경험과 지식을 의지할때 흔히 나타난다. 나의 경우 교만은 나 혼자 할 수 있다라는 생각으로 나타난다. 나의 선택과 나의 길이 더 안전해 보이고 더 지혜로와 보이는 것이다. 그같은 교만은 하나님과 반대 방향으로 향해 가기 십상이다. 그러기에 이같은 생각이 내게 들어온 순간 나는 이미 미끄러진것이나 다름없다. 이같은 교만은 하나님 보다 나를 더 중요시 하게 된다. 일단 그같은 상황에 놓이면 세상것이 주님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도 되고 하나님 나라보다는, 내가 나를 위해 만들고 싶은 그런 세계 및 상황을 바라게 된다. 이쯤되면 또한 내 왕국을 만들어 보려는 동기로 먹고 마시며, 뛰고, 쉬고, 일하게 된다. 나는 이같은 상황을 미끄러져 내동냉이쳐 졌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빼먹지 말아야할 중요한 이유가 또 있다. 미끄러짐은 나의 회개의 문제와 아주 깊숙히 맞물려 있다. 입으로 하나님께 잘못했다고 기도하기만 하면 그냥 자동적으로 용서 받는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는다. 신앙생활 초기 특히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적이 있었다. 이같은 회개는 변화를 동반하지 않기에 똑같은 자리에서 다시 미끄러지는 가능성을 크게 열어 놓게 된다. 그러나 때론 입술의 고백을 떠나 마음의 고백까지 가는 경우도 있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아픈 마음으로 주께 용서를 부르짖는다. 입술의 고백보다 좀더 발전된 방법 같아 보이지만 이같은 방법은 도덕적 회개에만 머물 수 있어 또 다시 미끄러지게 한다. 참다운 회개는 가던길에서 거꾸로 되 돌아서야 된다는 결단과, 실제 삶의 현장에서 돌아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가던길을 돌어서긴 했지만 다시 돌아가지 못하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구하며 그 눈을 뒤로 돌리지 아니하고 주님을 응시한채 걸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이고 또 미끄러짐의 가능성을 기본적으로 제거하는 방식이다.

유학생들과 삶을 나누며 대화하다보면 미끄러짐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코스타나 교회의 수련회등 여러 집회를 통해 많은 은혜를 체험하고 이제부터는 바른 신앙생활 해보겠다고 마음먹고 헌신하려 하였지만 삶에 현장에 되돌아 왔을때 바로 미끄러져 버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며 좌절해하며 힘을 잃는다. 신앙생활에서 미끄러진채 거기서 그냥 멈출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복음의 힘은 넘어 지지 않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넘어지고 부딛히고 깨지며 살아갈때 우리를 세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삶이다.나의 아이들과 아내는 내가 미끄러지는 것을 보아 왔다. 그러나 그들이 이제 분명히 아는 것 하나 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전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아빠를 세워주실 것이다 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다. 넘어 지는 나를 믿기 보다 나를 늘 세워 주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나의 세 아이들은 나의 거룩한 삶 혹은 거룩을 향한 삶을 보고도 살지만, 나같이 연약한 사람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사용하시고 세워 가시고 만져가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보며 변화해 간다.

과연 영적 미끄러짐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이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많은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마다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과 죄성으로 미끄러지고 깨어지는 많은 체험들이 있을 것이다그러기에 그것과 싸우는 대처방법이 다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그러나 나는 새벽이슬과 같은 믿음의 청년들에게 최소한 다음의 두가지는 반드시 나누고 싶다.

첫채로 삶의 목표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유학생활의 목표가 학위취득에 있는것이 아니라 거룩함 추구를 그 우선순위로 놓아야 한다. 이제 구원을 받았기에 천국은 보장되어 있다는 생각에 신앙의 선한 경주를 멈추고 땅에 주저 않아 쉬고 있어서는 안된다. 공부하며 순간 순간 십자가를 바라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포커스를 맞추어야 한다. 주님을 나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 면전에서의 삶, 즉 코람데오의 삶을 살도록 주님과 동행해야 한다. 하나님과 늘 동행한 에녹처럼, 오늘날 유학생들은 성경에 한줄밖에 나오지 않은 평범한 신앙선배인 에녹을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 거룩한 삶을 소망하고 그리스도의 성품이 학업의 우수성보다 더 귀하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목표가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한 헌신이 있어야 한다.

두번째는 나의 죄성을 심각히 자각하는 것이다. 구원은 받았지만 내 안에 남아있는 옛사람이 가지고 있는 죄를 향해 맹렬히 달려가고자 하는 죄성이 있음을 의식해야한다.  이것을 온전히 자각하게 되지 않으면 죄의 속임에 쉽게 미끄러져 버린다. 그러나 그같은 죄성이 내 안에 있음을 깨닫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그냥 미끄러져 버릴 수 없는 우리의 삶임을 순간순간, 삶의 모든 상황속에서 인정하는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을 발전 시킨다. 따라서 캠퍼스에서든, 캠퍼스 밖에서이든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깊숙히 생각해야 한다. 십자가를 젖은 눈으로 바라볼때 우리는 나의 죄악들과 세상에 관영하고 있는 죄악들에 대해 치를 떨며 미워해야 한다. 그러나 거기서만 멈추지 말고, 십자가에 그리스도를 못박으시면서 까지 우리와 화목을 원하셨던, 그리고 그 화목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 오르셨던 그리스도를 바라 보며 큰 사랑에 감격해야 한다. 미끄러져 넘어져 있을때 우리가 일어설 수 있는 것도 그 사랑때문이다. 그러나 죄에 대해 소름끼치는 미움이 없이 일어 선다면 또 미끄러질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기에 우리는 이 두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밖에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고 매일 매일 말씀묵상을 통해, 예배를 통해 우리는 깨어있어야 한다. 미끄러짐 없는 똑 바른 걸음을 걷기 위해 우리는 순간 순간, 매일의 삶이 예배가 되도록 해야 한다. 나는 이글을 마치며 우리들처럼 미끄러짐의 아픔을 경험한 바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상기시키고 싶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