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
년의 일이다. 그때 나는 오하이오대학의 교수로 있었다. 쿼터 (Quarter)제도 였기에 모든것이 빨리 돌아가 사실상 강의하기에
몹시 바빴다. 한 쿼터에 4개의 과목을 가르쳤다. 어떤 강의는 50분 강의 였기에 일주일에 세번 들어가야 하는데 그같은 강의가
두개, 또 일주일에 두번 들어가는 강의 두개. 이같은 스케쥴에 의하면 출근하고 부터는 점심식사 및 한.두개의 회의 참석을
제외하고는 강의실에서 살아야 하는 몹시 바쁜 하루 하루의 일정이었다.



조교수 였기에 테뉴어 (Tenure)도 생각해야 했고, 또 열심히 공부해서 내 분야에서 제일 좋다는 대학으로 가고 싶은 욕망도
있었다. 나는 그 당시도 또 지금도 연구활동과 글 쓰는것에 대해서는 각별한 생각과 야심이 있었다. 그같이 바쁨에도 불구하고 매년
3편의 논문을 학술지에 게제 하였으니 얼마나 열심히 공부 했는지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을것이다. 참으로 바빴고, 힘들었다.


그때 나는 귀한 목사님을 만났다. 지금도 나의 멘토이신 이근상 목사님이다. 그분은 매주 두번씩 콜럼버스로 부터 내려와 금요일은
성경공부 가르치시고, 주일에는 콜럼버스예배 마치고 얼른 내려 오셔서 설교하시고 떠나시곤 했다 (지금도 그렇게 하고 계신다).
성경공부가 얼마나 달콤했는지. 그때는 학업도 중요했지만 제자훈련 제대로 받고 싶은 생각이 컷다. 그래서인지 금요일이 기다려
졌고, 또 매번 성경공부를 통해 받는 은혜는 너무 컷다. 주의 말씀이 어찌 그렇게 달콤했던지… 어떤 질문이든 너무 명료하게
가르쳐 주신 이근상 목사님의 성경공부를 몹시 좋아 했다. 


뿐만 아니라 주일 예배 마치고 그냥 가지 않으시고 또 성경공부를 하시자고 하며 조금이라도 더 훈련시키시는 목사님의 인도함을
철저히 따랐다. 나는 그를 그래서 유격훈련장의 조교 같이 무자비하고 지독한 목사님이라고 속으로 부르곤했다. 몸이 힘들어도 죽어라
제자훈련 시키고 콜럼버스로 올라가시는 분이니까…


그렇게 1년반을 바쁘게 보내고 있을때 Indiana University로 부터 교수 포지션이 하나 났으니 혹 지원해 보지
않겠냐는 편지가 날아왔다. 내 이력서를 들여다 보아도 별로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내 분야의 교수들의 이력을 보아도
내것이 우월하게 느껴질 정도로 좋은 학술지에 제법 글을 많이 낸 편이었다. 그래서 한번 응모해 볼까 생각했다. 한 쿼터에
4과목하여 1년에 12과목을 가르치는 대학에서 떠나 1년에 4과목 (매학기 2과목) 가르쳐도 되는 대학으로 가는것 정말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인디애나 대학은 나의 전공분야에서는 제일 좋은 대학으로 여겨 졌기에 객관적으로 학자로서의 나의 성공을
나타내는 절호의 기회이지 않았나 생각해보았다. 뿐만 아니라 그곳 교수가 되는것을 몽상으로 그리며 잠시 환호에 젖기도 했다.
그리고 내심 하나님께 졸라내어 그곳으로 꼭 가야지 마음먹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마음먹고 기도하면 할 수록 내 마음에는 불편한 마음이 생겼다. 당시 새벽기도를 인도하며 은혜받고 있었는데 나의
기도는 허공을 치고 있었다. 인디애나 대학으로 보내달라고 떼를 썼는데 하나님의 응답은 그냥 그 자리에 남아 있어야 될것이라는
마음의 부담을 주시는것 같았다. 특히 당시 구약과 신약을 개관하는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이제 1년만에 구약이 끝난
상태였고, 신약의 초반부분에 있었다. 기도할 수록 그 성경공부가 아직 마쳐지지 않았음을 하나님께서는 내게 상기시켜 주시는것
같았다. “너 그것을 끝까지 마칠 수 없겠니?”라고 물으시는것 같기도 했다. 너무 슬펐다. 그냥 응모 하라. 그 뒤는 내가
책임지겠다. 너는 그곳으로 반드시 가리라… 뭐 이런 메세지를 주면 눈물 콧물 흘리며 감사해 할텐데… 그리고 그렇게
보내시면 하나님 위해 열심히 봉사하겠다고 서원도 하며 용기를 낼 텐데… 하나님은 내가 오하이오 대학에 남으시기를 원하시는것
같았다.


그같은 불편한 마음이 지속되자 내 마음에는 포기의 마음이 생겼다. 내가 갈길이 아니구나. 나는 이곳 오하이오 대학을 잘 지키고 있어야 되나 보다. 뭐 이렇게 생각하며 포기했다.  


응모 마감이 훨씬 지나 몇달후 매해 열리는 내분야의 학회를 참석했다. 참석해서 바로 들은 이야기가 옛날 오레건대학에서 박사 할때
그곳에서 석사를 했고, 또 조지야대학에서 포닥할때 박사과정학생이었던 어떤 여자아이가 내가 가고싶었던 대학의 교수로 새로
부임했다는 것이다. 그아이는 연구 실적으로 보면 나와 비교도 안될 만치 뒤지는 아이였다. 또 나는 오하이오대학에서 학생들의 강의
평가가 가장 줗은 교수중 하나였기에 강의능력 면에서도 그 아이이에게 뒤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떠올랐다. 또 우리분야에서 좋은
저널의 Associate Editor뿐 아니라 다른 서어비스도 제법 하여 여러가기 면에서 뒤질것이 없던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날
호텔방에 들어가 혼자 눈물흘리며 궁상맞게 밤을 새우며 슬퍼했다. 많이 울었던것 같았다. 


이제 인디애나 대학의 교수로 가려면 기존의 교수들이 은퇴하기전에는 자리가 없을것이고, 그들이 은퇴를 하려면 최소한 10년이
걸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당시 뛰어난 다른 대학의 우리 프로그램에서도 교수채용 공고가 없었던 터이라 나는 참으로 암담했다.
차라리 하나님께 묻지 말고 그냥 응모할것을… 하나님께서 찬성하지 않으셔도 그곳 가서도 신앙생활 잘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까??? 뭐 이런 저런 생각을하며 식사도 제끼고 슬픔으로 그 학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 왔다. 


어짜피 오하이오에 있는 몸이니 그냥 성경공부 열심히 하며, 그곳의 학생들 죽어라 섬기고, 부지런히 전도하며 보내자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러니 시간이 빨리 갔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분야에서 주는 최고의 연구상도 그 다음해에 받았다. 내가 학술대회를 가지
않았기에 학회의 학회장이 직접 오하이오대학으로 방문하여 상을 전해 주었다. 부족한 사람에게 그같은 상을 주는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권적인 일하심이 있지 않았나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나의 포기는 적었는데 너무나도 큰 상을 받아서
어쩔줄 몰랐었다. 


이보다 더 큰 기쁨은 이제 구약과 신약을 살펴보는 그 성경공부가 마쳐진 것이다. 성경의 전체 그림이 머리속에 구체적으로
그려지고, 나의 믿음도 더 확고해 지며, 주님의 음성에 더 민감한 삶을 살게 된것이 내게는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바로 그때 인디애나 대학으로 부터 편지가 왔다. 그전 해에 오기로 했던 교수가 오지 않아서 다시 교수를 뽑아야 하는데 혹
응모하지 않겠냐는 내용이었다. 이번에도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여쭈었다. 하나님, 이곳도 좋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면 그리고
가겠습니다. 그러나 원치 아니 하시면 이곳에서 학생들 섬기며 감사히 지내겠습니다… 뭐 이렇게 기도했던것 같다. 하나님의
응답은 분명치 않았다. 그래서 계속 기도해 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내 마음에 불편함 보다는 하나님의 숨은 사역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궁금해 하며 응모해 보는것이 어떨까 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물론 응모 하였다. 그리고 인터뷰에 초대 받았다. 인터뷰하면서 내가 꼭 오기를 바라는 사람들 같이 모두 내가 이미 그 대학의
교수인양 대접해 주었다. 그리고 청빙위원회의 위원장이었던 데이브는 “월급 흥정할때 담대하게 가격을 불러도 되니까 흥정에
shy하지 말라!”고 조언도 해주었다. 보통 반응이 이렇게 되면 인터뷰가 잘되었다는 사인이 된다. 그날 저녁 내가 지냈던
Indiana Memorial Union안의 호텔에서 밤을 꼬박 세웠다. 너무 신이나서였다. 


집에 돌아온 이후 약 1주가 지났던것 같았다. 학교에서 Offer가 왔다. 내가 제시한 연봉에 아주 가깝게 응해 주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학교에서는 1주일 이내로 답을 달라고 하는데 나는 아직 하나님께서 가라는 음성을 듣지 못해 그것을 듣고
계약서에 사인하고 싶었다. 문제는 1주가 다 되는 데도 하나님의 침묵 깨어지지가 않았다. 그냥 사인해서 보내버려하지! 하며 마음
먹었다가도 곧 그럴 수 없다고 여겨서 금식하며 마지막날의 기도를 드렸다. 그날 오후 아내와 아이들이 집을 비운뒤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여쭈었다. 하나님의 침묵이 깨어졌다. 여호수아 1장를 열어서 읽어 보라고 하시는것 같았다. 나는 쭉 읽어 가며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허락하시는 음성을 들었다. 


이후 나는 그곳에서 9년을 교수생활 했다. 그곳에서 2004년도에 테뉴어를 받았다. 학과의 50년 역사에 모든 교수가 강의
(teaching)으로 테뉴어를 받았을뿐 연구로 받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학과 역사상 처음으로 연구업적으로 테뉴어를
받았다. 모든 커미티로 부터 만장일치의 찬성을 받기가 쉽지 않은데 나는 만장일치로 테뉴어를 얻었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
였다. 포기로 얻어진 직장이었고, 포기로 얻어진 은혜였다. 


반드시 좋은 학교로 가는것만이 하나님의 축복은 아니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께 순종하는것 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받으시고, 그 마음 때문에 기뻐 하신다. 나는 지금 칼빈대학에 와 있다. 연봉은 몇만불이 더 적다. 강의는
전 인대애나 대학보다 훨씬 더 많이 한다. 그러나 인디애나대학을 포기하라고 했을때 그 순중 자체가 내게는 축복이었다. 주안에서의
포기는 하나님의 전적인 인도하심과 임재하심을 동반하는 귀한 축복이 따른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