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 앞에 서서 떡을 던지는 사람을 상상해 보라.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달 두 달, 일년 이년그리고 십년 이십년을 하릴없이 떡을 떼어 강물 위로 띄어 보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일까?



(1)



예수의 인생은 한 마디로 떡의 인생이었다.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소개했던 사람예수. 그는 세상의 떡으로 와서 떡의 인생을 살았다. 자신의 살을 떡으로 떼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주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 자신의 삶을 나타내는 영적 은유였다. 영적, 육적으로 굶주려 죽어가는 무리들 앞에서 예수는 작은 떡을 하나 취하여(taken), 하늘을 우러러 그 위에 축사한 후(blessed), 그 떡을 쪼개어(broken) 제자들에게 나누어주며(given) 많은 무리들에게 다시 나누어주도록 명한다. 그 장면은 장차 걸어가게 될 자신의 인생과 제자들을 통해 다시 전개될 생명 역사를 선포하는 엄숙한 순간이었다. 오병이어는 성경 전체의 주제를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치밀하게 계획되고 연출된 하나의 작품이었다.



예수는 처음부터 하나님 손에 붙들려 인생을 살았던 분(taken)이다. 세례 요한 앞에 무릎 꿇어 세례 받을 때 하늘 문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여 축사함을 받았으며(blessed), 그 받은 능력으로 담대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며 자신의 몸을 찢으셨고(broken), 마침내 부활의 영광으로 나타나 생명의 떡으로 만민에게 나누어주신 분(given)이다. 오병이어는 작은 떡 하나로 수많은 무리를 먹여 살리는 예수의 인생을 표현한 한편의 모노 드라마였을 뿐 아니라, 그 기적을 체험한 제자들 마다 예수의 인생, 곧 떡의 인생을 살도록 다시 초청하는 영적 암시이기도 하다. Taken-Blessed-Broken-Given의 인생, 이 네 가지 동사로 이루어진 떡의 인생으로 부름을 받는 것이다.



떡의 존재 가치는 먹히는 데에 있다. 자신은 조각조각 찢기고 씹혀서 사라지나 그것을 먹는 사람을 배부르게 하여 살리는 것, 그것이 떡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따라서 예수의 제자된 우리들도 그 같은 떡의 인생을 살도록 요청받는다. 한 조각의 떡이라도 더 먹으려고 아귀다툼을 하는 이 세상 속에서 거꾸로 자신의 떡을 떼어 죽어가는 자들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나누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의 제자된 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떡의 인생을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종종 우리는 앞의 두 가지 동사 Taken-Blessed의 자리에 머물기는 좋아하나 뒤의 두 가지 동사 Broken-Given의 인생을 살기는 싫어한다. 우리는 하나님 손에 붙들려 그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이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 가운데 축복의 자리에 나아가기를 기뻐한다. 교회 안에서 말씀으로 찬양으로 기도로 예배자의 복을 누리기는 좋아하지만, 교회 밖의 삶 가운데 자신의 떡을 떼어 산제사(living sacrifice)로 나누어주는 일에는 인색하기 그지없다.



예수는 우리가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으로 드러나기를 원한다. 변화산상에 머무르기를 좋아하는 우리들에게 산 아래 마을로 내려가라 명한다. 우리가 산 속의 수도자나 교회 안의 빛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혼탁하고 부패한 세상 속에서 한줄기 빛으로 살아가며 예수 안에 감췬 비밀 그 기이한 빛을 선전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믿는 자들이 교회 안에 갇혀서 그 많은 은사들을 소진하며 세상을 멀리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은 소멸되어 버리고 세상은 여전히 부패한 모습으로 결코 변혁되지 않은 채 남아있게 된다. 그리고 세상의 떡, 육신의 썩어질 양식을 우상으로 삼아 살아가는 그 모습대로 똑같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세상은 비웃고 손가락질 할 뿐이다. 너희들이 말하는 그 사랑이 어디 있느냐? 너희가 우리와 다른 점이 무엇이냐? 라고 말이다.



(2)



평양과기대 건설을 위해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계획을 세우고자 20039월에 연변과기대에서 프로젝트팀을 구성하게 되었다. 프로젝트 팀의 책임을 맡아 여러 교수님들과 팀웍을 이루며 일을 하는 가운데, 인간적인 눈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이 일에 대해 조금씩 하나님이 보이시는 환상과 비전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10여 년 전 연변과기대를 세우고자 하던 때의 추억을 회상해 보았다. 1990년 코스타에 참석하여 김진경 박사의 강의를 듣던 중 나에게 다가왔던 그 비전. 두 개의 나무 기둥 사이에 <연변조선족기술대학건설부지>라고 적힌 현수막만 보이는 텅 빈 민주벌판의 사진을 보여주며 함께 가서 일할 사람을 찾던 동키호테 같은 그 어이없는 초청이 나에게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예수를 믿은 지 얼마 안 되었던 그 시절, 세상 가치관이 허물어지고 난 후, 과연 어떻게 앞으로 내 인생을 살아가야할지 그 문제를 끌어안고 고민하던 나에게 중국에 있는 200만 우리 조선족을 위하여 그리고 13억 중국인과 북한 동포를 위해 대학을 짓겠다는 그의 말은 마치 한줄기 전율처럼 내 영혼을 흔들었다. 그때 내가 받았던 감동은 대학이 지어지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보다도 저렇게 인생을 사는 분들도 있구나 하는 새로운 깨달음에 대한 충격이었다. 오직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전 인생을 걸고 투자하는 사람들그것이 바로 내가 만난 예수의 표상, 그리고 내가 따라가야 할 예수의 모습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연변과학기술대학…… 정말 도무지 될 것 같지 않았던 그 일을 두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던가? 그러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신 히브리서 111절의 말씀을 붙들고 그 믿음에 헌신하고 투자한 사람들이 한 사람 두 사람…… 과거의 우리 선조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모여들었던 그 땅 황량한 만주 벌판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오늘, 상전벽해라는 옛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에스겔의 골짜기와 같았던 북산가 언덕 공동묘지 터 위에 연변과기대의 아름다운 캠퍼스가 어엿한 실상과 증거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1,600명의 학생과 200여명의 전문인 사역자가 모인 기적의 공동체가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배출한 2,000여명의 졸업생들이 얼마나 놀라운 열매와 씨앗을 전 중국 대륙에 뿌리고 있는지…… 기적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다.



KBS 인간극장의 PD로 잘 알려진 김우현 감독이 연변과기대에 취재차 와서 학생과 교직원 여러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비디오에 담아 보내왔다. 장차 다큐멘타리로 방송작품을 제작하고자 준비하는 가운데 시험적으로 만든 소품을 보내온 것이다. 그 안에는 연길 시내의 택시 운전사가 바라본 과기대 교수들의 모습, 아침 일찍 새벽 교정에서 QT를 하다가 맞닥뜨린 세 한족(漢族) 여학생의 유창한 조선말 인터뷰, 북한 사역에 헌신하여 일하다가 돌아온 졸업생 부부의 감동적인 간증, 결장암 말기의 진단으로 중국과 한국의 병원에서 포기했던 학생을 미국 디트로이트의 원종수 박사님께 보내어 기적적으로 살려온 이야기, 기독교에 배타적이던 공산당원 여학생이 교수님들의 부모와 같은 사랑에 감동하여 마음 문을 열게 된 간증, 마치 사울처럼 예수 믿는 후배들을 핍박하던 청화대학 출신의 엘리트 부부가 연변과기대에서 예수를 영접한 후 서울대학에서 유학하고 다시 돌아와 교수로 함께 일하는 모습, 졸업을 앞둔 여학생이 교수님들에 대한 감사와 학교를 떠나는 아쉬움을 눈물로 고백하는 이야기, 찬양 사역 하는 학생들이 하덕규 집사님과 모임을 가지며 꿈과 비전을 나누는 모습들…… 코스타 초창기의 찬양 사역자였던 조현직 교수님이 YUST 학생 까페 <낮은음자리>에서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의 노래를 부르는 그런 감동의 장면들이 소복이 담겨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지난 10년간의 눈물어린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감을 느꼈다. 그리고 전도서 11장의 말씀이 떠올랐다.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다시 찾으리라.(전도서 111)



(Cast your bread upon the waters. You’ll find it after many days.)



 



어쩌면 우리 모든 인간은 자기 앞을 스쳐 흐르는 존재의 강물, 역사와 시간의 강물 앞에 서 있는 그런 인생들인지 모른다. 그 강물을 타고 수많은 사람들, 그들의 영혼들이 내게 다가왔다가 더러는 스쳐 지나간다. 그 존재의 강물 위로 내가 가진 떡을 떼어서 던지라고 하나님은 명령하고 계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행동, 나와 내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자녀들이 먹어야할 그 떡을 떼어서 흐르는 강물 위에 던지는 그 어리석은 일을 하라는 것이다. 그리할 때, 언젠가는 반드시 내가 투자한 그 떡의 몇 배로 아니 육십 배 백배로 도로 찾을 그 날이 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약속이다.



1학년 처음 입학할 때 딱딱하게 굳어진 경계의 눈빛으로 교수를 바라보던 그 투박한 학생들의 마음이 4년이란 강물을 흘러 지나가면서 과기대 교직원들이 던진 그 사랑의 떡을 받아먹고 변화되어 따뜻한 가슴과 생명의 눈빛을 지닌 아름다운 모습으로 졸업을 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볼 때, 우린 그 약속의 성취를 맛본다. 작년 졸업생들을 내보낼 때, 사은회에서 받았던 감격을 반추해 본다. 졸업을 앞둔 학부 학생들이 사은회를 하겠다고 교수님들 가족을 모두 초대했다. 며칠 전부터 학교 강당을 빌려 무슨 준비를 하는지 끙끙대더니만, 마침내 그날이 왔다. 강당으로 들어가 보니 교수들을 위해 정성스런 테이블이 마련되고 다과와 함께 아기자기한 풍선 장식으로 꾸며놓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 조선족 학생들의 순박한 마음이 느껴졌다. 졸업생들은 보이지 않고 무대 앞의 휘장이 가려져 있더니 잠시 후에 불이 꺼진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의 노래 선율이 흐르며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학생들과 신사복을 입은 남학생들이 손에 촛불을 들고 두 줄로 갈라져서 무대 앞으로 나온다. 그 모습이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놀라고 있는데… 한 여학생이 감사의 글을 낭독하고 모두 앞에 나와 큰절까지 한다. 뭉클  그리고 눈물



 




사랑하는 교수님들께:



과기대에서 저희가 보낸 지난 4년의 시간은, 정말 너무너무 행복한 순간들이였습니 . 하나하나 방황하는 우리의 심령에 눈물과 피땀으로 새로운 꿈을 심어주신 교수 님들, 감사의 언어로는 너무도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해 한해 지나면서, 커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교수님들한테는 얼마나 큰 기쁨인지 이제 이해할 것 같 습니다.



한알의 씨앗은 떨어져, 썩은 후에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교수님이 우리를 위 한 그 아낌없는 배려는 언젠가 그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걸 믿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아닐지라도, 또 혹시 지금은 너무 실망스러울지라도 우리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꿈, 아니 비전이 있기에 그 밝은 곳으로 열심히 달리겠습니다. 비록 어둠속에 서 가끔 슬피 울고 있던 우리의 모습이 있었고, 인생의 지루함 속에서 방황하는 우 리의 영혼이 있었고, 길을 찾지 못해 갈팡질팡하던 우리의 발길이 있었습니다. 지만, 그때마다 따뜻이 잡아주시던 교수님들의 손을 기억합니다, 그때마다 같이 울 면서 위로해 주시던 교수님들의 얼굴을 기억합니다. 때론 잘못한 우리에게서 너무 실망한 나머지 화내시던 교수님들의 모습도 기억합니다. 그때는 더러 불평과 원망 을 품었었지만 지금은 알 것 같습니다. 교수님들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이젠 우리의 마음을 합하여, 교수님들께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교수님들의 꿈은 꼭 이루어질 것이며, 우리는 우리의 꿈을 안은 채, 사회로 발걸음 을 디디게 될 것입니다. 비록 시작은 미미하지만 신실한 꿈과 진실한 마음, 참된 자세로써 작은 일을 큰 일로 만들 것이며 큰 일을 기적으로 만들겠습니다. 우리의 학교가 세워진 것은 기적입니다. 교수님들께서 여기에 오신 것도 기적입니다. 우리 가 여기에 하나로 모일 수 있는 것도 기적입니다. 하지만 가장 가장 놀라운 기적은 바로 교수님들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젠 교수님들께서 우리에게 남겨준 그 과제를 우리가 스스로 메고 가야할 시간이 되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의 뼈가 세월속에서 한줌의 흙이 되고 우리의 이름이 사람들속에 묻혀서 아주 사라진다 하여도 우리의 목소리, 우리의 외 침은 하늘의 저편 끝까지 남아있을 것입니다. 교수님들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 땅에 진리, 평화, 사랑 이 세 마디가 영원히 메아리치게 될 것입니다.



99학번 졸업생 일동


(3)



한자어로 사랑이라는 말을 나타내기란 쉽지 않다. 남녀간의 사랑, 부모의 사랑, 국가를 향한 사랑 등 이 모든 의미를 애()라는 한 글자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그 앞에 다른 수식어를 붙여 사랑의 종류를 구분한다. 자기애(自己愛), 부부애(夫婦愛), 민족애(民族愛), 인류애(人類愛), 등등……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아가페 사랑, 즉 무조건적인 사랑을 표현할 말을 찾기는 더욱 어렵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이란 말이 있다. 자기 몸을 죽여서 인()을 이룬다는 말이다. 이 말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잘 표현하고 있는 말이 있을까? 흔히 지하철역에서 자신의 몸을 던져 타인의 생명을 구하고 죽은 사람을 가리켜 살신성인을 이룬 의인이라고 칭찬한다. 물론 아름다운 귀감임에는 분명하지만 그의 행동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즉흥적인 용기에 가깝다. 그러나 십자가의 사랑은 즉흥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 계획된 것이며, 많은 고민과 피와 땀과 눈물의 소산이다. 도무지 사랑할 만한 구석이 없는 죄인들을 향해, 아니 자신을 욕하며 조롱하고 채찍질하는 그 원수의 무리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기로 결단한 그 너그러움의 극치…… 그래서 그 사랑을 가리켜 인애(仁愛)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그 사랑을 이룬 예수를 향해 인애하신 구세주라고 부르는 것이다. 온 몸으로 인애를 이룬 그 사랑, 자신의 몸을 산산이 찢어 생명을 살린 그 사랑, 그것이야말로 살신성인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그 사랑, 아가페 사랑은 절대 추상적인 개념이 될 수 없다. 철학적 자아성취를 위한 플라토닉 러브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 사랑은 몸으로 부딪히는 사랑이다. 아니 피를 흘리며 내 살점을 떼어 죽어가는 그 사람을 먹여 살리는 사랑이다. 아니 내가 정녕 죽지는 못할지언정 반드시 손해는 보아야하는 그런 사랑이다. 희생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인 것이다.



평양과기대를 짓겠다고 미국과 캐나다 한국의 여러 교회와 단체를 방문하며 호소하는 가운데, 최근의 북핵 문제를 둘러싼 미행정부의 민감한 분위기 그리고 한국의 지난정권의 퍼주기식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는 보수진영의 거센 목소리와 그에 따른 경색된 정국과 민생 경제의 불안감등이 가중되어 북한을 돕기 위한 마음들이 굳게 닫혀있음을 느끼게 된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크리스천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을 바라볼 때 답답함을 느낀다. 우리 크리스천의 사랑이 언제부터 계산적인 주고받는 사랑이 되었는가?



세상 사람들은 시류를 좇아 행동한다. 어쩌면 당연하다. 그것을 가리켜 전도서 기자는 풍세를 살펴보는 자, 구름을 바라보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다(전도서 114). 그들은 항상 바람과 구름의 향방을 따라 자신의 인생을 투자한다. 주식과 부동산 동향, 정치권의 세력판도와 경제 지수를 살펴보며 자신의 떡을 불리기에 골몰한다. 외풍이 불어오고 먹장구름이 끼면 지금은 씨를 뿌릴 때가 아니야 하며 파종치 아니하고 거두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그들은 바람과 구름은 항상 방향이 바뀌고 또 잠시 있다가 사라짐을 모른다. 그들을 향해 하나님은 이렇게 질책하신다. ‘너희가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 것을 아느냐? 그것도 모르면서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어찌 안다고 하느냐?(전도서 115)’ 그리고 다시 명령하신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전도서 116)



크리스천의 사랑은 조건부 사랑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싶을 때, 우리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을 골라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할만한 학생들을 사랑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아무리 말썽꾸러기고 반항적인 학생일지라도 그의 영혼을 향해 말없이 묵묵히 떡을 던지다 보면 그것이 씨앗이 되어 언젠가 열매로 돌아온다. 졸업할 때까지 교수들의 사랑은 받아들이지 못했던 학생이 오히려 사회 속에 나아가 그 큰 사랑을 깨닫고 자신의 변한 모습을 담아 편지를 보내올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제자가 더 헌신적으로 일하고 모교를 사랑할 수도 있다. 오직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흐르는 강물에 떡을 던지는 그것뿐이다. 떡을 던지는 사랑은 은사가 아니라 주의 명령이다. 하나님이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 가운데 사랑의 은사를 주시지 않은 까닭은 우리의 희생을 통해 사랑을 이루어가기를 바라시기 때문일 것이다. 그 가운데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 십자가에서 아들을 희생시킨 그 큰 사랑을 깨달아 배워갈 수 있기 때문이다. 희생 없는 사랑은 허사에 불과하다.



아내가 가끔 넋두리를 하듯, 자신이 독립운동가 남편을 만나는 바람에 고생을 하게 되었다는 말을 할 때가 있다. 그 말을 들으며 속으로 어느 정도 수긍하게 된다. 과연 그렇다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가 지금 중국과 북한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영적인 독립운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싸우는 이 싸움에 우리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과거 일제시대 때 자신의 일신의 안락을 포기하고 재산을 털어 이 만주벌판으로 달려와 독립운동을 하였다. 대성중학교와 신흥무관학교 같은 학교를 세우고 많은 인재들을 양성해내었다. 그 당시 크리스천의 비율이 전체 국민의 1%정도 밖에 안 되었던 것에 비해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 중에 크리스천이 얼마나 많았던가를 헤아려보면 금방 알 수가 있다. 3.1운동 발기인 33인 중 절반이 크리스천이었다. 유관순이 크리스천이었고 저항시인 윤동주가 크리스천이었다. 상해 임시정부의 여러 주역들과 조만식, 김구, 이승훈, 안창호 같은 분들이 모두 크리스천이었다. 그리하였기에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불신자들에게도 인정을 받았으며, 수많은 민족 지도자들을 배출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떡을 던져 희생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북한의 형제들을 향한 사랑도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북한에 대학을 지어서 그 청년들을 가르침으로 장차 통일 시대를 준비하고 동북아의 큰 역사를 이룰 인재들을 양성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비전이다. 그 비전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 가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북한의 청년들을 위해 그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기도하며 작은 떡을 떼어 자신을 희생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가장 확실한 투자는 영원 속에 약속된 천국 투자이다. 평양과기대라는 또 하나의 역사적인 물줄기를 만드는 그 일을 앞에 두고, 크리스천으로서 우리 민족 공동체의 장래를 생각하며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강물 위에 우리들의 떡을 과감히 던져야할 시기임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