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와 회복의 신학


선악과와 무감독 시험 – 그 원죄의 현장


(1)


복음이 들어가기 전에 학생들의 마음 토양을 준비하기 위한 밭갈이 과목으로 <과학사>를 가르친다. 이 과목을 통해 서양 문명에 대해 상식이 부족한 중국 학생들을 일깨우고 더러는 충격을 준다. ‘아담에게 배꼽이 있었겠는가?’ 라는 첫 리포트에 아이들은 당황하기 시작한다. 도무지 아담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학생들이 태반이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문화 비교, 로마제국의 흥망과 기독교의 전파, 중세 스콜라 철학,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과학혁명 그리고 진화론에 이르기까지 가르쳐 나간다. 그러다 보면 학기 초에 굳게 닫혔던 학생들의 마음과 생각이 열리면서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심각한 혼란에 빠져들기까지 한다. 20여 년간 자신들이 지녀왔던 세계관이 허물어져 내리는 아픔 속에서 어떤 학생들은 리포트 빼곡히 자신의 하소연을 적어서 내기도 한다. 더러는 ‘요즘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진리입니까?’ 하는 절규가 담긴 글도 있다.


그러나 과학사 과목의 백미(白眉)는 역시 두 차례 치러지는 무감독 시험이다. 무감독 시험은 학생들에게 양심을 일깨우고 정직한 마음을 심어주기 위하여 실시하는 가장 좋은 훈련이다. 진화론과 유물론 교육에 철저히 물들어 있는 사회주의 학생들은 대체로 양심이 무뎌져 있어 죄의식에 둔감한 편이다. 더욱이 거세게 몰려드는 물질주의에 노출되어 있는 가난한 학생들이 장학금과 직결되어 있는 시험에서 자신의 양심을 지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들키지만 않으면 시험 부정행위를 하고도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예수를 믿는다는 학생들 중에도 그런 모습들이 종종 나타난다.


무감독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는 철저한 사전 준비와 계획이 필요하다. 물론 세밀한 기도가 선행되어야 한다. 무감독 시험에 대한 경험과 이해가 전혀 없는 학생들에게 몇 주 전부터 정직성에 대한 교육을 실시한다. 감독이 있어도 어떻게든 치팅을 하려는 학생들에게 무감독 시험이라는 말은 너무나 생소한 느낌일 뿐이다. 학생들에게 정직의 중요성에 관한 예화를 들려주고 더러는 정직 서약까지 받은 후 시험을 치른다. 그러나 매년 끝까지 양심을 지켜내는 학생들은 삼분의 일에 불과하다. 다른 삼분의 일은 양심을 지키려고 싸우다가 마지막에 무너지는 학생들이고 나머지 삼분의 일은 물을 만난 듯이 처음부터 작심하고 베껴내는 학생들이다. 촘촘히 앉은 계단강의실에서 손만 뻗으면 잡히는 교과서와 강의 노트, 그리고 눈만 돌리면 보이는 옆 사람의 시험지를 외면하고, 더구나 다른 학생들의 부정행위 장면을 목격하면서 자신의 양심을 지켜내는 일은 한 바탕 전쟁을 치르는 일보다 어렵다. 바로 그들이 이제 나아가 싸워야할 세상 속에서의 영적 육적 전투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돌을 떡으로 바꾸라는 속삭임이 확성기처럼 시험 시간 내내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다.


학생들이 제출한 시험지를 가지고 와서 채점을 하는 동안 그들의 병든 양심과 인격을 대면하며 사투를 벌인다. 보통 100여명의 수강생이 시험지 두 세 장에 가득 채워 제출한 논술형 답안지를 읽어보려면 일주일은 족히 걸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답안지는 그들이 살아온 병든 환경과 영적 상태뿐 아니라 앞으로 치유의 가능성까지 전부 담고 있는 병리 기록이기에 어느 한 장도 소홀히 다룰 수 없다. 특별히 무감독 시험의 성공 여부와 자신의 소감을 적으라는 마지막 문제의 답안에는 그들이 시험 시간에 겪었던 심각한 영적 전쟁의 상처들이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특별히 감동과 충격을 주는 눈에 띠는 답안지들을 골라낸 후 그 다음 시간에 들고 들어가서 학생들에게 읽어준다. 내가 읽다가도 목이 매여서 읽기가 힘들만큼 적나라한 자기 고백과 회개의 글들이 튀어나온다. 일단 그 시간에 학생들은 심리적인 충격을 받고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그리고 옛날이야기 식으로 각색한 <두 아들 이야기> 즉, 돌아온 탕자 이야기를 해준다. 그러면 강퍅했던 아이들의 마음까지 대부분 허물어져 내린다. 양심을 지켰다고 자부하며 스스로 교만해져 있던 학생들조차 함께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시험지를 나누어주고 자신의 답안지를 스스로 양심 채점을 하여 점수를 정정토록 한다. 이 때가 되면 대다수의 학생들은 일시적이나마(?) 자신의 양심을 회복하게 된다. 물론 그들의 인생 속에서 또다시 실족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양심 회복에 대한 충격적인 이 체험은 영원히 잊지 못한다. 그리고 비로소 자기 안에 감추어져 있던 죄의 본질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죄에 대한 자각을 이끌어내는 것… 이것이 무감독 시험에서 얻게 되는 가장 큰 수확이다.


회개하고 돌아온 학생들에게는 양심을 되찾은 자유함으로 기쁨이 넘쳐흐른다. 그러나 그 가운데도 끝까지 양심을 속이며 자신의 불의한 이익을 챙기려는 학생들도 일부 남기 마련이다. 그들에 대해 화가 나고 안타까움이 끓어오르다가도 그냥 내버려둔다. 그들은 이미 자신이 선택한 길에서 심판과 벌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2)


어째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선악과의 시험을 주셨을까?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것을 다 알고 계셨을 텐데 왜 그런 시험을 통해 문제를 어렵게 만들었는가?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사람은 선과 악도 분별할 줄 모르는 무지한 상태에 있었는가?
선악과란 도대체 어떤 과일인가? 사과인가? 복숭아인가? 아니면 눈을 밝혀주는 신비한 묘약인가?


창세기 공부를 시작하자마자 넘어야 하는 첫 고개는 두말할 것도 없이 선악과의 준령이다. 말씀에 대해 반감을 지닌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어느 정도 신앙을 지닌 사람들조차도 선악과 문제만 나오면 쉽게 답변키 힘든 여러 가지 질문들을 퍼붓곤 한다.


무감독 시험을 치를 때마다 선악과는 하나님이 인간들을 향해 베푸신 일종의 무감독 시험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물론 선악과 시험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테스트(test)이지 아담과 하와를 걸려 넘어지게 하기 위해 일부러 처 놓은 덫으로서의 시험(temptation)이 아니다. 좋은 선생이라면 학생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시험문제를 내는 것이 당연한 것과 마찬가지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표현된 가장 아름답고 완벽했던 환경… 그 에덴동산 중앙에 놓여졌던 한 그루의 나무 선악과… 금단의 열매, 그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7)”


문제의 그 현장으로 가 보자.


에덴동산을 지구상에 실존하였던 그 어떤 곳으로 보든지… 아니면 피안(彼岸)의 세계를 그리기 위한 또 하나의 가상공간으로 보든지… 아무튼 좋다. 역사의 시작이 그와 같이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가정해 보자. 에덴동산에는 온통 순금과 같은 보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것은 에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은유임에 분명하다. 그만큼 완벽하게 아름다운 곳이었다는 뜻이다. 그 속에서 완전한 모습으로 창조된 두 남녀에 의해 펼쳐지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역사가 그렇게만 될 수 있었다면… 설사 에덴 이야기가 후세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간절한 바람일지라도 말이다. 아무튼 그 가상공간으로 한번 들어가 보자.


가장 사람이 살기 좋게 설계된 자연 환경 속에서 벌거벗고도 부끄러움을 몰랐던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있었다. 왜 그들은 벌거벗고도 부끄럽지 않았을까? 아니, 왜 인간은 벌거벗으면 부끄러워하는 것일까? 왜 인간만이 옷을 입고 살아가는 존재일까? 모두 비슷한 질문이다.


부끄러움은 존재의 불완전성을 나타내는 한 단면이다. 그러하기에 옷은 도덕적으로 격하된 존재의 열등의식을 가리고자하는 도덕적 표현이다. 반대로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의 벌거벗음은 두 사람의 완전한 관계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들에게는 가릴만한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투명하게 들여다보며 살아가는 존재였다. 결국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는 도덕적으로 완전성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도덕적 완전성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그들이 살고 있던 동산 중앙에는 특별한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동산의 모든 실과는 마음대로 따먹을 수 있도록 되어있었지만, 유독 그 나무의 열매만은 금지되어 있었다. 이름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 선악과(善惡果)였다.


자… 선악과 이야기만큼, 성경을 믿는 자들에게나 혹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회자(膾炙)되며 제각기 해석되고 더러는 공격을 당해온 이야기도 드물 것이다. 많은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고,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에게 인간의 본질을 논하기 위한 학문적 주제로서 일련의 통찰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분명 선악과 이야기는 인간이 지닌 선과 악의 양면성을 설명하기 위한 중요한 은유임에 틀림없다.


인간이 지닌 선한 속성은 타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던지기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 악해지기 시작하면 오히려 금수가 행하지 못하는 마귀적 행동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깡패 집단이 동료를 죽인 후, 토막을 내고 그의 내장을 파서 나누어 먹은 후 매장했다는 엽기적 뉴스를 접하고 인간의 악함에 새삼 놀라지 않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 뿐인가? 지난 세기를 붉게 물들였던 수많은 전쟁과 수용소 군도에서 벌어졌던 그 참혹한 역사의 다큐멘터리들을 우리는 물증으로 가지고 있다. 마약과 매춘이 행해지는 사회의 어두운 뒷골목에서, 매일 밤 벌어지고 있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행위들은 어떠한가?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그렇지 않았단 말인가? 그들은 한 점 부끄러운 얼룩도 없이 완전한 존재로 남아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도덕적 완전성… 그것의 기준은 무엇인가?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항거하여 비교적(?)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다가 옥사(獄死)한 독일의 신학자 본훼퍼는 그의 중요한 저서 <윤리학(Ethics)>에서 완전한 도덕의 기준을 가장 간단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1) 불완전한 인간에 의해 제시되는 어떤 기준도 완전성에 이를 수 없기에, 도덕의 기준은 완전한 신에 의해서만 제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즉, 완전한 신이 존재한다면, 바로 그 신이 원하는 것이 선이요, 그 신이 원치 않는 것이 악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신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 곧 선이요, 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는 것이 곧 악이라는 것이다.


선악과… 그것은 신의 뜻을 알리고 인간의 반응을 기다리는 시금석이었다. 선악과가 상큼한 사과이었는지 신 포도였는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특별한 성분을 지닌 과일이어서 먹는 순간 신기한 반응이 일어나서 선악에 대해 무지했던 아담과 하와의 눈을 일깨움으로 선과 악을 알게 한 것은 더욱 아니다.


완전한 신은 그의 형상(the image of God)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도덕적으로 완전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들이 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여 선악과의 화두(話頭)를 던진 것이다. 피조물인 인간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도덕적 완전성을 지키는 길임을 알려주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도덕적으로 완전한 존재로 지음 받은 인간… 여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함의(含意)가 들어 있다. 첫째, 그는 신과의 완전한 관계성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둘째, 그 관계성을 유지하기 위한 선택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선택의 자유가 없는 존재는 도덕적으로 아무런 책임이 없다. 다시 말하면, 도덕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책임(responsibility)이라는 단어 자체가 도덕적 요구에 어떻게 반응(response)하는가 하는 능력(ability)을 나타내는 말이다. 아담과 하와가 도덕적 존재였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신의 도덕적 요구조건을 지킬 수도 혹은 어길 수도 있는… 즉, 선악과를 따먹을 수도 혹은 따먹지 않을 수도 있는 완전한 자유가 주어진 존재였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신의 뜻은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것이었다. 왜? 그들이 도덕적 완전성을 지니고 살아가기를 바랐기 때문에… 즉, 신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완전한 도덕을 유지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곧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선택이었다.


선악과는 그 자체가 아담과 하와에게는 선과 악의 갈림길을 알려주는 이정표였다. 그 갈림길에서 그들은 불순종의 길을 택했다. 하나님이 원하는 길보다는 자신의 길, 인간의 길, 악마가 유혹하는 길…, 결국은 죽음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3)


(L학생) 무감독 시험_ 내 인생의 첫 양심 측정_ 감동과 뼈저림_ 교수님 뭐라 할까요? 느낌이 너무너무 복잡합니다. 내가 무감독 시험에서 양심을 지켜냈다는 뿌듯함과 그 성적에 대한 실망감… 사실은 시험을 치를 때는 많이 갈등을 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무감독 시험… 너무 새로운 느낌을 저희에게 부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시험을 통하여 나는 만족한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자신에 대해 신심이 생겼습니다. 예전에는 단순한 학교생활을 하다가 복잡한 사회에 들어가면 내가 어떻게 적응을 하고 자신을 지켜갈 수 있을지 많이 근심을 했었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이번 시험을 통해서 내 자신에 대해 알게 되었고 신심이 생겼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것… 확실히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그 마음속으로부터 나오는 뿌듯함… 이것이 내 평생의 재산이 될 것 같습니다. 이제 세상 어디를 가도 두렵지 않습니다. 떳떳이 난 정직한 사람이라고 외칠 수 있기에… 교수님,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교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합니다.


(H학생) 전번 시험 때에는 여러 가지 고려가 많았습니다. 보고 쓰려니 마음이 내키지 않고 보고 쓰지 않으려니 밑지는 것 같고, 결국에는 내 양심을 버리고 커닝을 하였습니다. 훌륭한 21세기의 리더를 키우는 우리대학의 과학사 중간고사에 커닝을 하였습니다. 리더가 갖추어야할 양심과 정직성은 나의 손과 눈에 의하여 여지없이 짓밟혔습니다. 커닝을 하면서 전혀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머리 속은 끊임없는 내부 전쟁을 하였고, 시험지에 꽉 적어놓은 답안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지난 일주일을 힘들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오늘 너무도 민망하여 교수님의 얼굴을 도무지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교수님께서 읽으신 동학들의 글은 채찍이 되어 나의 마음을 후려쳤습니다. 숨을 쉬고 있는 것마저도 나에게는 그렇게 큰 부담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량심적으로 다시 채점하라는 말에 나는 내 인생의 1949년이 온 것만 같았습니다. 해방된 기분이었습니다. 성실하게 채점해보니 49점이었습니다. 무려 23점이나 감점이 되었지만 나의 정직을 찾았다는 기쁨이 더 컸습니다. 동학들의 뉘우침과 성실한 고백을 듣고 그렇게 열심히 양심 채점을 하는 동학들을 보면서 이번 무감독 시험이 성공적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잃었던 양심을 되찾고 정직의 중요성을 너무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으니까요. YUST의 신입생으로서 기둥이 되어야할 내가 YUST의 취지_ 정직을 잃을 뻔한 가슴 아픈 교훈…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는 나의 성적을 위하여 량심을 버리는 일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량심을 되찾도록 이끌어주신 교수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B학생) 시험을 치를 때, 좌우에서 많은 학생의 소곤대는 소리와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걸 아니꼽게 생각하고 아직 어려서 그렇겠지 하고 생각했다. 내가 앉은자리는 앞에서 두 번째 자리이고 그 앞자리는 시험지를 제출하는 자리였다. 어떤 학생이 먼저 답안지를 놓고 나가자 옆자리에 앉은 한 학생이 천천히 일어나 그 답안지를 가져다가 보려고 했다. 참 민망하고 불쾌하여 그 애를 지적하고 말렸다. 내가 마음 아팠던 것은 부정행위를 하는 그 친구들보다도 이미 제출한 시험지를 가져다 봐도 용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주위환경 때문이었다. 어지러운 세상 환경을 보는 것 같았다. 다음 시간은 시험 문제를 다시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특별히 무감독 시험에 동의하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교수님은 많은 학생들의 생각을 읽어주셨다. 반대하는, 찬성하는 여러 친구들의 시험지에 남겨진 마음들을 읽으면서 나에게 새로운 감동이 왔다. 다만 부정행위를 하는 애들이 틀렸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나에게 그들의 내면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안간힘을 쓰며 죄와 싸우려는 선한 마음들, 하지만 마지막에 대부분 넘어지는 모습들, 넘어지면서도 정직을 향해 외치는 모습…. 너무나 가슴이 뭉클했다. 내 마음과 눈에서 눈물이 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들의 마음을 몰라주고 있었다. 그저 틀리다고 원망했지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들과 함께 부둥켜안고 울고 싶다. 아픈 마음을 찾아서 위로하고 어루만지고 선한 마음을 찾아서 같이 나서고 싶다. 교수님은 집 떠난 탕자와 남아있던 큰아들 이야기를 했다. 다시 돌아온 탕자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 나도 돌아온 탕자였다. 그러나 어느새 큰아들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이제 그 마음이 깨끗이 없어지기를 바란다. 항상 회개한 탕자의 마음으로 살고 싶다. 교수님께서 학생들의 마음을 읽어주시는 동안 나는 친구들의 선한 마음들과 만났다. 혹시 내 옆에, 내 뒤에 그런 친구가 있을까 하여 둘러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너무나 어두운 세상에 가려서 그저 무관심하고 삐지고 생각 없는 얼굴들이다. 그러나 그 속에 선한 마음들이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 이번 무감독 시험은 성공했다. 한 사람이라도 선한 양심으로 돌아왔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정직히 이 시험을 치러낸 친구들한테는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