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과 치유의 신학 – 내 아버지의 뜻


월미도와 이승복


(1)


지난 9월 16일은 연변과학기술대학이 세워진 10주년 기념일이었다. 황량한 북산가 언덕 무덤가에 첫 삽을 뜨고 기초를 놓기 시작한 이래 숱한 고난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제 어엿한 신흥명문(?)대학의 모습으로 발돋움하였다. 1992년 첫 해에 대학이 세워지기도 전에 마음이 급하여 부설 산업기술훈련원생을 먼저 모집하였었다. 93년 4년제 대학으로 학생을 받을 때만 해도 다른 대학에서 떨어져 오갈 데 없는 학생들을 받아 시작한 무명의 사립대학이었다. 그러나 10년 만에 연변과기대는 동북 3성에 있는 조선족들의 희망이 되었고 해가 갈수록 우수한 학생들이 앞 다투어 입학을 하고 있다. 이제 재학생이 1,500명을 넘어섰고, 2,000명에 가까운 졸업생들이 중국 전역에 흩어져 씨를 뿌리고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날 나는 10주년 행사를 돕기 위해 서울서 합류한 16명의 부흥한국팀(Revival Korea)과 더불어 백두산 천지에 올랐다. 구름 한 점 없는 드문 날씨 속에서 청아하게 모습을 드러낸 초가을의 천지는 태초의 신비 그 자체였다. 그 장엄한 창조의 위용 앞에서 우리는 백두산 정상에 서서 조용한 기도와 찬송으로 내일의 부흥을 위한 영적 조율을 먼저 맞추었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백두에서 땅끝까지…>라는 타이틀의 부흥 3집을 제작하던 도중에 오른 백두산 정상이었기에 부흥팀에게는 더욱 큰 의미가 있는 산행이었다.


17일 저녁 야외 무대로 펼쳐진 기념 <열린 음악회>에서, 지난 10년을 회고하며 3,000여명의 청중들이 운동장에 운집한 가운데 고형원, 이무하 가수(?)를 앞세운 부흥팀의 기념비적인 만주 공연이 펼쳐졌다. 그들이 만주 벌판에서 목 터져라 외쳐 부른 노래는 대부분 가요였다. 그것은 그들에게도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고, 사역의 지경을 넓히는 새로운 시도가 되었다. 무대 앞줄에는 공산당 영도들이 줄지어 앉아서 그들의 노래를 예의 주시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 전날에는 이미 가사 검열이 진행되었고 우리는 행여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부분에서는 가사들을 건전하게(?)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장장 3시간에 걸친 그 음악회를 감독하고 연출하기 위해 우리 부부는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무대 앞 진행본부에 앉아 있었다. 그것은 실로 보이지 않는 전쟁이었다.


(2)


이곳 만주에서 일하는 동안 종종 내가 있는 이곳이 바로 우리 민족 근대사의 격전지였음을 새삼 체감하게 될 때가 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고 알았던 독립운동의 본거지와 역사 유적지들이 바로 인접지역에 흩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김좌진의 청산리 전투와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 격전지가 바로 이웃한 화룡현에 있고, 그들이 근거지로 활동했던 북로군정서가 위치하던 곳이 연길에서 두 시간 남짓한 왕청현이다. 그러니, 이곳 조선족들의 가계를 들추어보면 바로 항일독립운동사와 우리 민족의 근대사의 피 어린 애환들이 스며들어 있기 마련이다.


KBS 역사 스페셜에서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에 세워졌던 신흥무관학교의 역사를 추적 방영하는 것을 보며 더욱 감회가 새로웠다. 1910년 만주로 건너간 이회영, 이동녕 등에 의해 교포교육과 군사훈련을 목적으로 길림성 류하현에 세웠던 신흥강습소가 나중에 통화현 합니하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위한 무관 양성학교로 변신하게 된다. 1920년 폐교될 때까지 10년간 무려 3,000명에 달하는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그들이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 상해 임시정부와 의열단 활동 및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해방 전 중국 내 독립운동의 주체세력을 이루었던 것이다.


잃어버린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만주로 만주로 모여들었던 지난날의 우리 선조들.. 그들 가운데는 한성에서도 가장 이름을 날리던 대 부호 가문의 이회영, 이시영, 이석영… 6형제의 헌신이 있었고, 일본 육사 출신의 직업 군인으로서 당시의 출세 가도를 뿌리치고 3.1운동 직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후진 양성에 투신했던 지청천 같은 인물이 있었다. 그들의 손에 키워졌던 제자들이 무릇 3,000명이나 배출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바로 청산리와 봉오동 전투의 주인공들이었으며 광복군으로 마지막까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이다. 훗날 역사에 알려져 독립운동가로 기록되고 또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던 사람들과는 달리 신흥 무관학교 출신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조국의 독립을 바라며 항일 전쟁의 전선에서 이름도 없이 사라져갔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더욱 뜨거워졌다.


그토록 바라던 광복을 이루었건만 국토는 허리가 잘리고 민족상잔의 잔인한 전화가 다시 한번 한반도에 몰아침으로 우리민족은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어야 했으며 또 피눈물을 흘려야만 했는지…. 그 이후 반세기 동안 한반도는 안타깝게도 동서 냉전의 최전선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형제를 원수로 생각하며 서로의 가슴에 총칼을 겨누어야만 했으며, 그 비극은 21세기에 이른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새롭게 알게된 사실은 남북한의 싸움으로만 알았던 6.25 전쟁이 사실은 이곳 만주의 조선족들까지 직접적으로 깊이 관여한 3국 전쟁이었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 이곳 작가협회 주석으로 있는 K시인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의 부친이 항미원조(抗美援助)전쟁(중국에서 6.25를 지칭하는 말)에 참여했던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중국 인민해방군으로서 명성을 날렸던 팔로군(八路軍) 소속의 군인으로 장개석 군대를 몰아내기 위해 남방의 해남도 최전선까지 배치되었던 그의 부친은 1949년 말 겨울, 갑작스런 상관의 지시로 기차에 올라 어디론가 하염없이 끌려가게 된다. 그가 내린 곳은 뜻밖에 귀에 익은 조선 말씨가 들리는 북한 땅이었고 그는 중공군에서 인민군 장교의 군복으로 갈아입게 된다. 그와 같이 6.25가 발발하기 직전 북한으로 전격 배치된 팔로군은 1개 사단 병력이 넘었으며, 결국 파죽지세로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갔던 최전방 인민군들은 사실은 북한군인이 아니라 엄격하게 훈련받은 팔로군 정예부대 소속의 중국 조선족 군인들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인천 상륙작전 이후 유엔군이 북한으로 밀고 올라가자 중공군이 쳐들어와 1.4 후퇴를 하게 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중국 조선족 출신의 중공군은 처음부터 인민군 복장으로 6.25에 참전하였던 것이다. 그의 부친은 인천 전투에서 숱한 동료들의 시체를 남기고 결국 퇴각해야만 했던 눈물의 역사를 반추하며 죽는 날까지 아들에게 두고 두고 입으로 전해 주었던 것이다. 그 같은 사실을 알게되자 나는 다시 한번 역사의 회오리 속에서 영문도 모르고 전쟁에 참전해야했던 이곳 조선족들의 애환을 생각하며 더욱 뼈저린 아픔을 느껴야만 했다. 6.25의 민족상잔의 고통은 이곳 만주의 우리 조선족들에게까지 잊을 수도 씻을 수도 없는 아픈 상흔으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3)


내가 처음 가르쳤던 1회 졸업생 중에서 한국의 고려대학교로 유학을 갔던 한 여학생이 있었다. 언젠가 유학생들을 모아 수련회를 하는데…, 그 여학생이 앞에 나와 처음 한국에 와서 자신이 겪었던 정신적 혼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자기는 유학이 결정된 이후, 마음 속으로 한국에 도착하면 꼭 한번 먼저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도착한 첫 주말 부랴 부랴 길을 물어 신기한 전철을 타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곳을 향했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인천 앞 바다의 “월미도”였다. 무엇이 이 여학생을 그곳까지 이끌고 왔을까? 나는 처음에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곧 그녀의 어린 추억을 들으며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소학교 시절 어느 날 학교에서 단체로 애국주의 영화를 관람하게 되었다. 그 영화의 제목이 월미도였다. 항미 원조전쟁 시, 인천 앞바다에서 악랄한 미 제국주의 항공기가 폭탄을 비 뿌리듯 쏟아 붓는 가운데 끝까지 사투를 벌이던 인민군 장교의 장렬한 최후를 보며 그 어린 소녀는 너무나 안타깝고 속이 상해서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던 그 생생한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말로만 듣고 교과서에서 배웠던 인천의 월미도는 그녀가 성장하는 동안에도 잊혀지지 않고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가 마침내 한국 땅을 밟는 그 순간 그녀의 발길을 그 곳까지 이끌고 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월미도에서 두 가지 사실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고 만다. 첫째는 영화에서 나왔던 그 비참하고 끔찍했던 전쟁터가 이토록 놀랍게 발전한 현대식 거리로 바뀌어졌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었고, 둘째는 자신들이 그토록 미워하며 증오하던 미국 군대의 괴수 맥아더의 동상이 월미도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게 된 사실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대다수가 맥아더 장군을 가장 존경하는 위인 중의 한 사람으로 꼽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그녀는 큰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도대체 그러면 지금까지 내가 알고 믿고 또 증오하던 그 실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이 한국 생활을 시작하는 그녀 앞에 던져진 첫 번째 질문이 되었다.


우리 역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며 죽어갔던 이승복 어린이를 교과서에서 배우며 더러는 눈물지었던 세대였다. 죽어가면서까지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던 애국소년 이승복의 입을 찢어 죽였다는 그 잔인한 공산당 간첩들이 미워서 치를 떨었던 그 시절이 있었다. 그 세대가 바뀌어 요즘은, 이승복 어린이가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콩사탕이 싫어요.’라고 말한 것을 잘못 알아들었던 것이라는 유머 개그까지 등장할 정도로 세월은 변했다. 그리고 그 세월의 간격을 뛰어넘어 나는 이곳 중국 공산주의 국가에서 공산당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이 간격…. <월미도와 이승복>의 간격을 어떻게 메워야만 할까? 그 세월의 아픔과 거짓과 미움과 허위들을 우리 모두의 마음에서 지우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축제의 밤이 무르익어 가고 음악회가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에, 부흥팀이 기도하고 준비한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동안 음악시간을 통해 아내가 가르치고 또 아이들 속에서 퍼져나간 두 노래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과 <보리라>를 함께 부르며 우리 안에 감추어진 사랑과 비전의 마음들을 안타깝게 표현했다.



당신은 사랑받기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
태초부터 시작된 아름다운(수정가사임) 사랑은…


이 노래가 울려 퍼질 때 내가 들어온 대학이 어떤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신입생의 고백을 들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저들의 상처를 싸매어 줄 수만 있다면….



우리 오늘 눈물로 한 알의 씨앗을 심는다.
꿈꿀 수 없어 무너진 가슴에 저들의 푸른 꿈 다시 돋아나도록
우리 함께 땀 흘려 소망의 길을 만든다.
내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던 저들 노래하며 달려갈 그 길….
그날에 우리 보리라. 새벽이슬 같은 저들 일어나
뜨거운 가슴 사랑의 손으로 이 땅 치유하며 행진할 때….
오래 황폐하였던 이 땅 어디서나 순결한 꽃들 피어나고
푸른 의의 나무가 가득한 세상 우리 함께 보리라.


새로운 10년을 여는 비전 선언문이 낭독되면서 밤하늘을 아름다운 폭죽이 수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