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와 회복의 신학 – 내 아버지의 뜻


윗물이 맑아져야 아랫물이 맑아진다


(1)


“두마안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 사~공~ ” 돌아가신 김정구 선생의 구성진 이 노래를 지난 반세기 줄기차게 부르며 술타령을 하던 한국 사람들… 그들이 중국 연길을 방문하면 손쉽게 찾는 곳이 가까운 도문시다. 두만강과 북한을 넘겨다보기 가장 쉬운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두만강을 처음 보고 느끼는 감정에는 약간의 짜증과 실망감이 섞이게 마련이다. 민족 분단 아픔의 현장을 미처 느끼기도 전에,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노리며 호객행위를 하는 조선족 아줌마들이 달라붙는다. 더러는 자칭 북에서 건너왔다는 탈북자들이 구걸을 하기도 한다.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려 하면 장소비를 내라며 가로막는 어이없는 텃세에 기분을 잡치기도 한다. 그 같은 난관을 뿌리치고 두만강 가에 서서 건너갈 수 없는 산하를 바라본다. 눈길에 처음 잡히는 것은 북한의 민둥산에 새겨진 <속도전>이라는 선전문구다. 그 사이를 가로질러 흐르는 샛강이 바로 말로만 듣고 노래만 부르던 두만강인 것이다. 그러나, 그 강은 결코 우리가 머릿속에서 상상하던 푸른 물이 넘실대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 아니다. 실망스러우리 만큼 협소하고 그나마 오염되어 온갖 오물이 함께 떠가는 더러운 탁류가 한줄기 힘없이 역사의 어두운 자락을 흘려보내고 있을 뿐이다.


두만강과 압록강의 물 근원이 백두산 천지에서 갈라져 내려온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 산천어가 서식할 만큼 두만강 물은 맑아진다. 평상시에도 숭선이라 부르는 두만강 상류 지역의 마을로 들어서면 오묘한 산세와 맑은 강물이 굽이굽이 부딪혀 만나며 한 폭의 산수화와 같은 절경을 이루고 있다. 더욱이 가을철에 오색 단풍마저 들게 되면 아~ 이곳이 바로 금수강산 우리 땅이었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오리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장백산을 뒤로 돌아 압록강 쪽으로 넘어가면 북한의 혜산시와 마주하고 있는 중국의 변경 마을이 있다. 조선족 자치현인 장백현이다. 그 곳에서 맑은 압록강 줄기을 타고 올라가는 길 역시 10월 단풍은 미국 메인 주의 가을을 떠올리듯 절경을 이룬다. 더욱이 두만강 쪽에서 볼 수 없는 대 협곡이 압록강 건너 북한 쪽에 나타나 마치 그랜드캐년(?)을 연상케 한다. 어느 모로 올라가 보아도 백두산에서 내려오는 계곡의 물은 태고의 순수를 머금은 듯 맑고 차갑기가 이를 데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 물이 하류에서는 저렇듯 부패하고 썩은 물로 변할 수 있었을까?


두만강 변경을 구경하기에 제일 좋은 코스는 도문에서 강변을 타고 따라 상류로 올라가는 길이다. 변경을 한번 보고 싶어하는 외부 손님들을 모시고 가끔 다니곤 하는 코스이다. 철을 따라 여름철에는 시원한 드라이브 코스가 되어 더러는 강 건너 민둥산조차 정겹게 느껴지기도 한다. 언젠가 97년경 북한이 한창 기아에 허덕이던 무렵 강을 따라 올라가던 나는 두만강 물이 이전과는 달리 갑자기 맑아진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예전에 보던 거무죽죽한 물이 아니라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웬일일까? 의아해 하며 강변을 달려가던 나는 마침내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연길서 승용차로 세 시간 쯤 가는 거리에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내려다보이는 접경도시 북한의 무산시가 있다. 무산은 자철광 마그네타이트가 13억톤 가량이나 매장되어 있는 아시아 최대의 철광 도시이다. 중국 측 언덕바지에서 내려다보면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올 만큼 가까이 있다. 도시 전체가 온통 노천의 철광석을 캐내는 공장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언뜻 첫 인상이 검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처음 그곳을 방문했을 때 다닥다닥 따개비처럼 붙어 있는 낡고 허름한 단층집들마다 가느다란 굴뚝에서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밥을 짓는 모습이 너무나 인상이 깊었었다. 그 속에서 살고 있을 가난하지만 정겨운 가족들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그 해에는 그 적막한 도시가 마치 죽음의 기운에 휩싸인 듯이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고, 그나마 살아 있는 증거로 보이던 굴뚝 연기마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무산시가 움직이고 있을 때에는 공장에서 내보내는 시커먼 폐수가 두만강으로 유입되어 온통 강 하류를 오염시키는 근원이었다. 그런데 그 해에는… 극심한 기아 상황에서 공장을 움직일 전기마저 끊기고 일할 사람들이 먹을 것을 찾아 공장의 부품들을 뜯어 식량으로 바꾸어먹는 사태가 발생하자 공장의 가동이 멈추어 서며 온 도시가 죽어버리고 만 것이다. 오히려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사람이 멈추어 서자 강물은 제 모습을 되찾았다. 굶주림에 죽어가는 북한 주민들을 생각하며 울어야 할지, 맑아진 두만강 물을 바라보며 웃어야 할지… 죄에 깊이 물든 인간들이 만들어낸 한 폭의 희화적인 코메디처럼 느껴졌다.


그때 깨닫게 된 단순한 사실이 있다. 창조주의 손길이 닿아있는 곳, 그 아름다운 상류에서 내려오던 맑은 물이 중간지점 무산에서 시커먼 폐수를 방출하기 시작하자 하류는 몽땅 탁류로 바뀌고 만다. 하류의 물을 다시 맑게 하려면 폐수를 방출하는 상류의 물 근원을 새롭게 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폐수가 사라지면 물은 맑아진다. 아랫물을 맑히기 위해서는 윗물을 변화시켜야 한다.


(2)


1966년, 린 화이트(Lynn White Jr.)는 ‘우리의 생태적 위기의 역사적 근원(The Historical Root of Our Ecological Crisis)’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학계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유명세를 탄다. 그는 지구 환경 파괴의 주범으로 자연을 마음대로 착취한 서구 문명의 책임을 논하면서 그 사상적 배경에는 기독교가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주장한다. 창세기 1장 28절의 문화 명령을 근거로 한 성서적 자연관이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과정에서 무분별한 환경 훼손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 논쟁을 계기로 고대의 유기체적 세계관의 복고 현상이 나타났다. 기독교 이외의 다른 문명권 특히 동양적 유기체적 범신론적 자연관이 환경 문제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최근의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과 같은 생태주의 과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가이아 가설1)이 나 어머니 지구 이론으로 이어진다. 또 하나의 현대적 유기체 이론을 탄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자연 만물에 영혼이 숨어 있다는, 그러니 함부로 다쳐서는 안 된다는 고대의 정령 숭배 사상과 범신론적 물활론이 생태주의의 포장을 하고 새롭게 부활한 것이다.(이 같은 생각들이 지구환경보호를 위해 일부분 기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서구 문명이 동양을 제치고 세계 역사의 주축으로 올라선 계기를 마련한 것은 16세기 과학 혁명 이후 근대 세계에 이르러서였다. 과학 혁명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견지해 오던 중세 이전의 유기체적 세계관으로부터 성서적 기계적 세계관으로의 천이를 가져다주었다. 그 일은 서구인들의 사고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자연을 숭배하고 두려워하던 과거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자연을 이해하고 탐구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 시기 서양의 기독교 국가들이 타민족에게 자행한 제국주의적 환경 파괴에 대하여 역사적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린 화이트의 지적은 일견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역사의 한 단면만을 부각하여 전체의 책임을 전가하는 환원주의적 오류를 품고 있다. 과학혁명을 일으킨 당시의 기계적 세계관은 철저히 유신론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 뉴턴 등 과학혁명을 일으킨 장본인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 안에 감춰진 오묘한 설계와 목적성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없이 확신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충돌을 야기했던 중세적 세계관은 오히려 헬레니즘의 유기체적 세계관에 뿌리를 둔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이었다. 성경은 철저하게 모든 자연 세계가 하나님의 지혜로 만들어진(formed, fabricated)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기계적 세계관은 광대한 우주를 구성하며 규칙적으로 운행하는 행성과 은하들에서부터 시작하여, 지구 생태계의 모든 동식물, 그리고 흙으로 만드신 사람의 몸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지으신 물질을 재료로 하여, 만물이 목적과 설계에 의해 기계적 2)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복잡하고 신비하기 이를 데 없는 자연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지 자연 스스로가 자기조직화 하여 나타난 유기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생명현상의 특징인 유기체가 발현된 것은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간 이후에 나타난 것이라는 관점이다. 사람의 생명 또한 하나님이 만드신 몸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탄생한 것이기에 자연과는 구별된다. 우리의 몸은 죽어서 다시 흙으로 돌아갈 지라도 영혼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대한 유신론적 기계론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몽주의 철학자들에 의해 이신론(理神論)으로 탈바꿈하고, 마침내 무신론적 기계론으로 귀착되고 만다. 다스리고 정복하되 선한 청지기가 주인의 재물을 정성스레 관리하듯 해야 할 자연을 인간이 스스로 주인이 되어 마음대로 탈취하고 빼앗고 남용하게 된 것이다. 타락한 인간에 의해 끝없이 유린당할 그 자연의 모습을 미리 내다보셨던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이제는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예언적 저주를 하고 계신다. 하나님이 사라지고 난 이후의 기계적 세계관은 오직 인간의 이성만을 신봉하는 과학주의와 물질주의로 빠지게 된다. 그 이성의 시대가 만들어낸 사생아가 전 지구적 환경 파괴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오히려 자연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고 숭배하던 시절보다 더 못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만일 기독교 자체가 환경파괴의 주범이라는 논리를 받아들인다면, 현재 기독교 국가마다 환경 파괴 현상이 더 심하게 나타나야만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 반대다. 기독교 문명이 한번 휩쓸고 지나간 국가는 비교적 환경 보존이 양호한 반면에 유물론, 즉 무신론적 기계론 사상에 입각해 세워졌던 공산주의 국가마다 더 심한 환경 파괴와 훼손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환경 파괴는 기독교의 자연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이기적으로 타락한 인간에 의해 야기된 문제인 것이다.


연길에 처음 왔을 때, 우리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 중의 하나는 온 도시를 휘감고 있는 먼지와 악취와 쓰레기들이었다. 우리가 처음 아파트를 얻었던 뻬이따라는 동네와 학교 사이를 오가는 길에는 진흙과 쓰레기가 뒤범벅이 되어 있었고, 각종 오물과 하수가 길 가에 그대로 버려지고 있었다. 여름에는 시뻘건 흙탕물과 싸워야 했고, 물이 안 나와서 항상 욕조에 물을 받아서 살았다. 그 물을 다 쓰고 나면 욕조 바닥에 마치 갯벌처럼 진흙이 남았다. 겨울에는 온 도시를 휘감는 석탄 매연으로 아이들은 폐렴에 시달렸으며, 어른들도 늘 기관지에 새까만 가래가 끓었다. 사람들이 마구 버린 플라스틱 비닐 종이가 바람에 날려 온 도시의 나무 가지마다 빨간 파란 열매처럼 매달린 진풍경을 낳았다. 노상에서 방뇨하는 모습은 다반사요 재래식 화장실에 얽힌 놀란 경험담이 너무 많아 (창피한 일이지만)늘 식탁의 이야기 거리가 되곤 했다. 사실은 그것이 바로 복음이 들어오기 전 한국 사회의 옛 모습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우리들의 모습이었다. 복도에서 기숙사에서 교실에서 아무 곳이나 침을 뱉고 담배꽁초를 버리는 아이들을 붙들고 씨름하기 10년…


중국 전역에, 그리고 연변 지역에 10여년 전부터 조용히 불기 시작한 복음의 바람들… 수많은 발걸음들이 오고가며 씨앗을 뿌렸다. 과기대 교정의 아름답게 다듬어진 조경… 화사한 꽃들과 푸른 잔디밭 사이를 오간 많은 시민과 학부형들… 방문자마다 놀라고 감탄하던 깨끗한 기숙사… 그 생활에 물들어 오히려 방학 때 집에 돌아가기를 싫어하던 학생들… 함께 교정에서 생활하는 외국 선생님들의 깨끗한 옷차림과 예절들… 이런 모습을 보고자란 우리 학생들이 10년만에 어떻게 변했을까? 학생들이 변했다. 학교가 완전히 변했다. 연길 시 전체가 변하고 있다. 해가 다르게 연길이 깨끗해지고 있다. 아니 중국 전체가 깨끗해지고 있다. 이제는 2008년 북경 올림픽을 그린 올림픽으로 만들겠다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복음은 치유의 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 복음은 물과 같이 스며들며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3)


성경에서는 모든 죄의 근원을 불순종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스스로의 길로 나섰던 인간들… 선악과를 따먹은 그들의 원죄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분리되고 모든 피조계마저도 분리되어 큰 상처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불순종의 죄를 일으킨 그 사건의 배후를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탐심과 교만 그리고 불신앙이 도사리고 있다.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고 속삭였던 사단의 교만과 선악과에 손을 대는 순간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느꼈던 아담과 하와의 탐심이 숨어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상류의 오염원을 먼저 치유하지 않고는 결단코 우리의 행동을 순종으로 바꿀 수 없다.
























◆ 죄 (Sin):불신앙교만탐심불순종
◆ 치유(Healing):믿음회개자유함순종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참 믿음은 반드시 회개를 수반한다. 그 속에서 떡(물질, 명예, 권력…)에 대한 자유함과 순종의 행위들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이다.


믿는다고 하면서 회개하지 않는 크리스천들… 이들은 이웃과 자연 속에 불신자들보다 더 큰 상처를 남긴다. 마치 하나님을 떠난 기계론이 하나님 없는 유기체론 보다 더 큰 환경 파괴를 일으킨 것처럼…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과 정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던 우리의 인생 방향을 완전히 180도로 전환시킨다. 비로소 하나님을 향한 순종의 삶으로 만드는 것이다. 회심의 순간 우리는 드러난 자신의 죄악을 내버리고 전 존재를 예수 앞에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게네사렛 호수가의 베드로와 같이…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의 삶이 45도 혹은 90도 정도 방향을 전환했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을 향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의 인생 방향은 세상의 또 다른 어떤 곳을 향해 나가고 있을 뿐이다.


자신은 하나님 편에 서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웃과 피조계에 서슴치 않고 파괴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다. 마피아 크리스천이라고 해야 할까?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수많은 십자군 전쟁의 참상, 그 이면에는 위정자들의 정치 경제적 통치 논리가 있었다.


정치적, 경제적 메시아를 갈망하며 예수를 붙잡아 왕으로 삼으려 했던 군중들의 손을 피해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던 갈릴리 사람을 생각하며, 피 흘림의 현장에서 고통당하는 그의 신음 소리를 듣는다.


전쟁의 포화 속에 함께 유린당할 생태계를 슬퍼한다. 하루 속히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 피조계가 회복되고 온 인류의 상류 물 근원이 맑아지기를 희망한다. 완악한 종교인들을 향해 광야에서 외치던 세례 요한의 목소리가 이 시대에도 필요하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