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탄의 소리


로마를 꿈꾸는 나라에서 (1)


– 결과론에 대하여 (On Consequentialism)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예레미야애가 3:40)


들어가며


몇 해전 9.11테러로 수 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에서 이유없이 죽었을 때만 해도, 사건이 터지자 병원으로 달려가 헌혈하는 미국인들을 보았을 때만해도, 교회에서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을 생각하며 미국인들과 함께 기도할 때만해도,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 알카에다를 소탕한다며 쳐들어가서 부수고 뒤지고 할 때만해도 담담하게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나, 미군이 바그다드 시내 외곽으로 진입한 오늘 십 수년동안 억눌러 온 옛날 일들이 생각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글은 2003년 4월 5일에 쓰여졌습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이후부터는 바울의 고백에 나오는 헛된 과거로 (빌립보서 3:1-16) 치부하던 일들이 뇌리를 스친 것은 아마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이 일들이 구태여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된 이유는 이때 제가 하나님이 중심 된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과, 이 일들이 언젠 가부터 저도 모르게 자랑 삼아 이야기하는 추억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일들을 기억하고 싶은 이유가 있습니다. 스스로를 기만했던 시간이었을 수도 있습니다만, 진지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했던 한 세대의 고민을 통해 우리 기독교인들이 생각해 볼만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결과론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결과론 (Consequentialism)


대학을 다닐 때 미국 유학은 생각할 가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신식민지 반봉건 사회냐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냐 하는 구성체 논쟁에서 민족민주전선 이니 민중민주노선 이니 하는 민주화 방법론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분단의 책임자요 개발독재의 후견인이요 제국주의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민주화에 대한 나름의 생각이 있던 제게 미국에서 공부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또 바람직하지도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아내도 박사과정에 있는 지금의 저를 아는 사람들에게 이 사실들은 자기기만이나 젊은 시절 철없는 생각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결과론적 시각은 ‘현실’이나 ‘힘’만을 강조하는 비관적 현실주의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편견에 사로잡히게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미국이 벌이고 있는 전쟁도 이런 결과론에 입각해 있습니다. 이라크와 벌이는 일방적 전쟁이 많은 사람들이 납득할만한 타당한 명분과 절차를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은 전쟁을 이끌고 있는 강경파든 여론을 두려워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온건파든 인정하고 있습니다. 사담 후세인 을 폭군(tyrant)이라고 부를 때 사용하는 자유(freedom)나 해방(liberation)이라는 용어들은 영미전통에서는 동의를 수반하지않고 법률적 절차를 따르지않은 자의적 지배와 힘으로부터 자유, 즉 ‘비지배’ (non-domination)의 원칙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주권을 가진 다른 나라에 선제공격을 하면서 국제법과 절차를 무시했고, 전쟁이 시작될 그 때까지 한번도 이라크 사람들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미군과 영국군을 환영하는 이라크 사람들, 구호물자를 앞 다투어 가져가는 사람들을 텔레비전으로 보며 미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벌이는 전쟁의 정당성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전쟁의 정당성은 단지 미국인들의 안전, 자기들이 상상한 위협(self-imagined threat)으로부터의 자유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만일 미국이 석유를 놓고 독재와 타협하려 했지만 번번히 기만 당한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말한다면 솔직하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미국이 주장해 온 국제화와 민주화의 세계적 흐름도 이 전쟁에 당위성을 부여하지는 못합니다. 전쟁 이후 경기부양정책이 실효를 거둘 것이라는 전망만이 그나마 솔직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오히려 성경말씀을 자기 주장 속에 작위적으로 집어넣는 현 미국 대통령의 연설들은 우리를 걱정스럽게 만듭니다 (“while almost every president has invoked a belief in God in some manner, Bush’s use of Scripture is notable because he has used it to help frame the stakes for possible war with Iraq” Chicago Tribune, March 2.)


모두가 결과론에 매달려 있는 듯한 인상입니다. 강경파는 이라크 재건과정에 참여하기 위해 벌써부터 손을 쓰는 유럽의 강대국들을 소개하며 국제질서는 결국 승자에게 줄을 서서 떡고물을 먹는 것일 뿐이라는 (to jump on the bandwagon) 신현실주의 이론을 마치 진리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온건파 정치인들은 안전을 갈망하는 중산층의 목소리를 잘 알고 있기에 이번 전쟁이 단기간에 승리를 가져올 수만 있다면 결과적으로는 이익이 될 것이라며 비판보다 협력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테러와의 끝없는 전쟁이 선포되었을 때부터 다문화주의 나 국제협력의 화술은 힘을 잃었습니다. 인권 단체들도 이왕 일어난 전쟁이니 빨리 끝내는 것이 좋다는 주장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1) 이라크가 실제 대량살상 무기를 가지고 있었고, (2) 이라크 인들이 미국이 주도해서 세운 새 정부를 진심으로 환영하며, (3) 전쟁을 반대했던 강대국들이 이라크 재건에 참여하기위해 전쟁의 당위성을 뒤늦게 인정한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는 일만 남은 인상입니다.


이런 결과론에 기초한 텔레비전 뉴스와 틈틈이 듣는 국방부의 발표들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결과론은 어쩌면 ‘자기 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sy)을 심리학적 언어로 위장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폭력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는 일을 고뇌에 찬 결단인 것처럼 말하면서 우리는 종종 상황을 과장할 때가 있습니다. 개발독재가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은 물리적 힘으로 질서를 잡고, 강제로 반대론을 잠재우고,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만든 그럴듯한 결과를 무조건 칭찬하는 문화입니다. 이런 결과론적 입장에서 본다면 가롯 유다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완성하는데 가장 공이 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 그대로 예수님을 팔아 하나님의 말씀을 만족시킨 사람이었습니다. 너무나 극단적인 예가 될 수도 있습니다만, 어느 누구도 결과론에 입각해서 가롯 유다를 잘했다 칭찬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결코 결과로 정당화할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인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로마 흥망 사 속의 기독교


미국에서 벌어지는 보수다 진보다 하는 논쟁에서 흥미로운 점은 로마에 대한 언급입니다. 미국이 로마 공화국을 모델로 삼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몇 차례나 농사를 짓다가 독재 관(Dictator, 6개월 임기로 위기 시에 선출되며 전시 미국대통령과 비슷한 지위가 보장되는 직책)으로 선출되어 위기로부터 국가를 건져내고 위기상황이 끝나자마자 미련 없이 농부로 돌아간 킨키나투스 (Cincinatus)를 존경했다는 것, 연방 주의자들 (the Federalist)과 이에 맞선 반 연방 주의자들 (the anti-Federalist)의 논쟁에서 로마에 대한 갖가지 해석들이 공공연히 나타나는 것은 이런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미국 정치인들의 활동이 로마공화국의 원로원과 민회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연상하게 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닙니다. 선동적이라는 비난에 민감한 미국 정치인들의 모습을 볼 때 선동이라는 죄목으로 서로를 견제했던 로마의 귀족들이 생각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국가를 위해 죽는 것이 최고의 영광이라고 생각했던 로마의 평민들이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귀족과 벌이던 싸움을 포기한 것과, 미국 시민들이 많은 문제들을 접어두고 하나가 되어 전쟁에 몰두하는 것도 비슷합니다. 로마보다도 더 로마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시무시한 적이라고 자기들이 먼저 규정하고, 직접적인 위협도 없는 상황에서 쳐들어간 전쟁을 75% 이상이 지지하는 것은 11년 전의 걸프 전쟁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도 놀라운 일입니다. 수천발의 폭탄이 터지는 바그다드의 야경과 미군 탱크가 진입하는 바그다드 전투상황을 프로농구와 프로야구와 동시에 시청할 수 있는 이 상황을 이제부터는 미국적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미국의 소위 ‘신보수’로 분류되는 정치인들 중에 로마의 멸망을 기독교때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남성적인 전투성, 견제와 균형에 기초한 정치제도의 역동성, 경쟁을 통한 탁월함을 덕(virtus)으로 추구하던 로마의 문화는 공화국이 몰락한 이후에도 계속 되었지만, 기독교가 전파된 이후에는 차츰 변질되어 로마제국의 멸망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의 역사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말기, 중세와 르네상스의 초기, 그리고 니체의 자조적인 비난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들이 현실을 회피하는 생활태도를 소위 ‘사색적 생활’ (vita contemplativa)이라며 비난했던 경우는 많습니다.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삶(vita activa)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비난을 하는 경우는 그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나타나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쳐들어가는 이스라엘의 용맹성으로 신약에서 가르치는 사랑의 실천윤리를 보완해야 한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힘듭니다. 부시대통령이 “America is not soft!”라고 말할 때, 럼스펠드 국방부장관이 기자들에게 “we will see soon!”이라며 비판을 피해갈 때 혹시 이 지도자들에게 신보수의 생각이 미국의 미래라는 이름으로 이미 자리잡지는 않았는지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로마의 멸망은 기독교가 가르치던 사랑이라는 덕목이 아니라 무분별한 향락문화, 지도층의 부패, 그리고 가난에 허덕이던 하층민들에게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애국이라는 화 두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에 나타난 여러 가지 사실들을 종합해보면 이런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로마는 어쩌면 기독교로 인해 멸망의 시간이 조금 연장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향락으로 가정이 파괴되고, 양심이 상실되고, 빈부의 격차가 극심해지고, 지도층의 부패가 이미 상식이 된 로마에서 기독교인은 오히려 소금이요 빛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건강한 로마는 건강한 삶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부패한 로마는 부패한 삶에 대한 집착만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며


결과가 과정을 합리화한다는 말이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을 가지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꿈 속에 나타나는 일들입니다. 따가운 햇빛때문에 벌어진 땀구멍으로 최루탄 가스가 들어가서 온통 물집이 생긴 일, 가로투쟁을 가며 두려운 마음에 선배의 대수롭지않은 영웅담을 애써 기억해 내려고 한 일, 종로와 동대문 뒷골목을 이를 악물며 도망 다니느라 허리춤에 넣어둔 유인물들이 땀으로 흠뻑 젖은 일, 닭장차에서 친구와 함께 두들겨 맞은 일들이 꿈 속에 나타납니다. 이런 과정에서 어쩌면 힘(power)이 지배하는 권위주의를 무의식 중에 배웠을 수 있습니다. 혹은 독재에게 배운 나쁜 버릇들이 익숙해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숫자에 기초한 싸움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민주주의는 오랜 시간동안 순간순간 소신을 굽히지 않은 사람들과,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보여준 조용한 다수의 노력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 졌다고 생각합니다. 이 과정을 우리가 소중히 여기지 않을 때, 이러한 과정을 모르는 세대에게 민주주의는 야망을 달성하기 위한 경쟁의 공간이나 제도일 뿐이고 권력만이 그 목표가 될 것입니다.


케이블 회사마다 기본에 공짜로 넣어주는 Fox뉴스에서 미국 중산층의 배타적인 애국심이 여과되지 않은 체 나올 때, 이 흥미위주의 뉴스채널에 기독교방송 책임자라는 사람이 나와 ‘이스라엘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역사에서 모두 반 기독교 세력이었다’라는 말을 내뱉을 때, 이 사람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비난하던 뉴스 진행자가 매 시간마다 달라진 것 하나 없는 전쟁소식을 스포츠 뉴스처럼 전하는 것을 볼 때면 여러 해 동안 미국에 살았지만 철저하게 이방인일 수 밖에 없는 스스로를 보게 됩니다. 학교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식료품 가게에서 말을 걸어온 미국인이 전쟁이야기를 피하는 제게 ‘북한사람’이냐고 물을 때면 로마제국 말기의 기독교인들이 생각납니다. 다음에 이런 질문을 받으면 한국인이라는 말과 함께 ‘기독교인’이라고 꼭 말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미국은 우리가 가지지 못한 장점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공부를 하러 왔던 아니면 이민을 왔던 간에 배워야 할 것이 많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 땅이 예전 같지 않을 때에도 과정과 결과 모두를 소중히 여기는 그리스도인 들은 예전같이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번에는 애국심에 대해서 살펴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