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2)

– 고결함 (Integrity): Christ Inside & Love Outside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Salt is good, but if it loses its saltiness, how can you make it salty again? Have salt in yourselves, and be at peace with each other. (마가 9:50)

들어가며

평소 존경하던 김인수 장로님께서 하나님 품으로 돌아 가셨습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故人은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원칙을 소중히 여기셨고, 타협과 관용을 철저하게 구별하셨고, 늘 진지했던 장로님의 선한 청지기 같았던 삶은 언제나 우리 마음 속 깊이 살아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미주 코스타 강연에서 자주 인용하셨던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로새서 3:23)는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되고자 노력하는 우리 모두의 가슴에 지금도 그리고 이후에도 살아 숨쉴 것이라 생각합니다. 장로님은 세상의 소금으로 늘 우리들에게 기억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소금” (halas)이라는 단어는 4번 나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복 있는 사람의 조건들을 열거하신 후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언급하신 부분이 그 첫번째 경우입니다 (마태 5:13). 누가복음 14장 34절에서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경우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어가기 전에 갖추어야할 인격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고 주인되시기를 늘 소망하는 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고후 13:16).

하나님의 사람 (Divine Individuality)이라는 주제에 이어 이번에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나머지 두 경우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경우들은 하나님의 영성을 소유한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발전시켜야하는 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두가지 경우들은 관계 형성의 원칙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원칙들을 고결함 (integrity)이라고 압축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묵상의 결과를 나름대로 Christ Inside & Love Outside라고 정리해 보았습니다.

Christ Inside

고결함은 영어로 Integrity입니다. 이 말은 라틴어의 integer로부터 파생되었는데 이 단어는 전체(entirety), 완전함(completeness), 또는 흠 없는(blameless) 조건이나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단어가 사람에게 사용될 때에는 어떤 사람이 삶에서 지속적으로 무엇인가를 지켜나가는 태도를 나타내거나 또는 이런 사람의 도덕적 순결함(purity)을 지칭합니다. ‘높다'(高)와 ‘깨끗하다'(潔)는 의미가 합성된 고결이라는 한자어와 마찬가지로 영어의 integrity도 구별되는 삶과 이런 삶의 기준을 유지하려는 개인의 끊임없는 노력을 나타냅니다.

고결은 오만이나 거만과는 다릅니다. 오만이나 거만이 우월함을 고집하는 태도라면, 고결은 비교 우위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동일시 되는 어떤 원칙들을 지켜나가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때 고결은 안팎의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목적한 바를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가는 개인의 능력을 강조합니다. 이때 고결은 열 사람이 옳다고 우겨도 원칙에 기초해서 틀리면 틀리다고 주장하는 소신있는 행동을 강조합니다. 즉 고결은 자기존중이며 자기완성임과 동시에 구별됨입니다. 이 구별됨은 시대의 흐름을 역행할 수도 있는 용기도 포함합니다.

마가복음에서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고결함이 어떤 원칙들 위에 서 있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두 가지 사건들과 연관시킵니다. 첫째는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며 토론한 사건입니다 (마가 9:33-37). 제자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존재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스스로를 구별된 사람들로 생각한 이유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그들의 삶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자기자신들이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 것들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의 다툼은 비교우위를 점하려는 욕심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들이 “천국에서 누가 크냐”는 질문까지 예수께 가져간 사실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태 18:1-5). 이에 예수님은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의 질문이 그들에게 더 시급한 문제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질문에 그리스도인의 고결함을 구성하는 첫번째 원칙 ‘겸손’이 있습니다. 성경은 겸손은 그리스도의 내재하심이 가져오는 당연한 결과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속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마가 9:37). 바울의 말을 빌자면, 성도의 구별됨은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함이기에 그 누구도 자신의 구별됨을 자랑치 못하며, 이런 은혜를 기억할 때 성도들은 겸손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8-10). 겸손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 (Indwelling Christ)의 은혜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인의 고결의 첫번째 원칙은 구별됨으로 겸손할 수 밖에 없다는 역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Love Outside

마가복음에서 소금과 관련된 두번째 사건은 제자들이 자기들과 행동을 같이 하지않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이름을 빌어 귀신을 쫓을 수 없도록 금지한 것입니다 (마가 9:38). 이와 같이 제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남용하자 예수님께서는 기적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이런 이유에서 “반대하지 않는 자”는 적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마가 9:39-40). 이것이 고결함의 두번째 원칙 관용입니다.

관용 (tolerance)은 무원칙이나 무분별한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먹어야할 지 모르는 상태에서 옆에 있는 사람의 의사를 따라 음식을 시킨 것을 관용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무엇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있지만, 다른 사람의 의사를 존중해 주는 것, 바로 이것이 관용입니다. 원칙이 없는 관용은 타협이나 무관심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용서와 사랑을 보여주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상식 밖의 불의가 반복되는 가운데 묵묵히 서 있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때 관용은 무원칙과 동일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 둘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관용은 고결함 그 자체이자 곧 고결함의 한 원칙입니다. 기독교적 관용은 주는 은사 (the gift of giving), 즉 사랑(Agape)에 기초합니다. 양보하고, 용서하고, 인내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을 결국에는 바꾸는 것이 관용입니다. 타협은 요령이나 처세를 가르쳐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타협은 관용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육적 효과, 가치관이나 삶의 궁극적인 목표의 변경을 가져오지는 못합니다.

예수의 이름의 고결함을 지키려는 제자들의 마음 뒤에는 자신들만이 예수님의 능력을 향유하려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마가 10:38).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킴으로써 자신들만을 돋보이게 하려 한 행위와 결코 다르지않았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제자들에게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소금으로는 너를 깨끗게하고” (have salt in yourselves), “다른 사람과는 평안과 기쁨을 나누어라” (have peace one with another)는 두 가지를 명령을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자기자신에게 철저하고 타인에게는 너그러워야 한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얻어지는 평화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적용되어야한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충고하고 이어 “너희 말을 은혜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 같이 하라 (Let your speech always be with grace, seasoned, as it were, with salt)”고 부연하고,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고 말했습니다 (골로새서 4:5-6). 다시말하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토론에서 격론으로, 격론에서 격분으로 치닫을 마음을 억누르고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성의를 다하고 사랑을 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친절과 존중(respect)하는 마음을 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고결함은 모두와 화목할 수 밖에 없는 책임을 그 내용으로 합니다. 간단하게 표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고결함 (Christian Integrity) 오만함 (Arrogance)
존귀함의 원천 하나님의 은혜 (grace)에 기초한 자기존중 (self-esteem)과 자부심 (pride) 자기자신의 노력에 기초한 자기 중요성이나 지나친 우월감 (self-importance or overbearing pride)
내적 열쇠원칙 내재하시는 그리스도 (Indwelling Christ)로부터 나오는 겸손 (humbleness) 자기자신으로부터 나오는 만족 없는 욕구 (insatiable desire)
외적 열쇠원칙 주는 은사 (the gift of giving, Agape)와 관용 (tolerance) 획득(acquisition)과 투쟁 (struggle)

마치며

성경공부를 인도할 때, 소모임을 이끌 때, 불신자들과 토론을 할 때 우리는 감당하기 힘든 자괴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독재자처럼 성경공부를 인도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떨어진 이야기로 공전하는 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독재자가 되어있는 자신을 볼 때가 있습니다. 역으로 갈등을 피하고 부담을 줄이는 관계를 선호하는 쪽으로 선회하는 자신을 보면서 부끄러워 할 때도 있습니다. 제직 수련회나 인도자 교육을 가서 마피아식, 교통순경식 등의 이름들이 붙은 경영학적 원론들을 반복해서 들을 때면 그만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 기본적인 원칙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합니다. 유대인의 배타적 선민의식이 아니라, 내재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사랑을 실천하는 고결함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어떨까 생각합니다. 매일 이렇게 돌아가다 보면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 속의 소금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故 김인수 장로님의 소천소식을 접하며 오늘 다시한번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 6:7)는 말씀을 좌우명처럼 여기신다던 故人처럼 매일을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갈등에대해서 한번 살펴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