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탄의 소리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3)


– 갈등 (Conflict): 현실의 벽을 넘어



”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디모데전서 6:11-12)


들어가며


기독교적 시각에서 갈등에 관하여 잘 서술된 책을 말하라면 저는 스스럼없이 랄프 네이버 (Ralph Neighbour)의 Living Christian Values를 꼽습니다. 이책은 이미 ‘영적성장의 정상에서’ (Survival Kit 2) 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평신도 사역자를 훈련시키는 교재로 많은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최근에 6주짜리 교재로 편집되어 다시 출판되었는데, 훈련의 강도는 약해졌지만 기간이 단축되어 많은 사람들이 끝까지 훈련을 마칠 수 있어서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장점은 성경에 철저하게 기초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말씀의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 실천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훈련을 통한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동감할 것입니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성령의 힘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원론에 지나치게 착념하다가 성경에서 강조하는 훈련의 중요성을 망각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히 5:8). 그리고, 르네상스시대 전술학 (the art of war)에서도 이와 유사한 말이 있습니다: ‘훈련 없이 전쟁에 나간 군인의 높은 사기는 어떤 효과도 없다.’ 다시 말하면, 훈련되지 않은 군대는 한번 승리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계속 승리할 수도 또 승리를 지킬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현실주의 vs. 현실직시


첨예한 갈등들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고결함 (integrity)이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 가운데 인간 본성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강조하는 현실주의(realism)의 편견이 신중 (prudence)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일상 속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면, 인간은 결코 자신의 소유와 안전은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사실처럼 전제한 후, 대화를 통한 갈등해결의 한계를 강조하거나, 강제 또는 폭력을 통한 갈등의 해결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경향은 현실주의 시각에서 쉽게 발견됩니다.


현실주의에서 이야기하는 인간본성(human nature)은 성경에서 묘사하는 인간의 ‘옛 속성 (the old nature)’의 내용과 유사합니다. 분쟁, 시기, 분냄, 그리고 파당과 연결된 옛 속성과 현실주의의 비관적 인간관은 여러 가지 면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갈 5:20). 물론 육체의 소욕은 원죄론(the Original Sin)에서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비관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주의가 꿈꾸는 이상의 세계와 그리스도인이 만들어가려는 세상은 출발점이 유사하더라도 큰 차이를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현실주의적 세계관은 ‘죽음에 대한 공포’ (the fear of death)를 가지고 모든 인간의 행동을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갈등도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본능적인 몸부림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나타나고, 또 이러한 공포를 역이용함으로 갈등이 합리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됩니다. 인간이 사회를 형성하는 이유도 죽음의 공포와 관련이 있습니다. 자연환경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결핍(scarcity)과 경쟁 속에서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국가며 정치사회라고 이해합니다. 여기에서 갈등은 필연(necessity)입니다. 그리고, 갈등 해결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공포의 제도화, 즉 죽음이 연상될 정도로 강력한 강제(coercion)를 통해 순종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대화는 선택일 수는 있지만, 불확실성(uncertainty)을 제거하기위해서는 폭력이 합리적인 갈등해결의 필수적인 수단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인은 ‘생명에 기초한 소망’ (the Hope in the Eternal Life)으로부터 현실을 바라봅니다. 영생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예수로 말미암아 이미 이겨낸 사람들 만이 가지는 삶의 이유입니다. 모든 행동은 생명에 기초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죽이시기까지 이루시려고 한 것도 ‘모든 자에게 영생 (eternal life)’을 주려 함이셨고, 영생을 얻은 자의 목표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요 3:16). 현실주의와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에서 죽음은 인간이 神을 찾는 이유라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는 갈등을 해결하는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까지 다가오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임하게 되면 모두가 ‘새 사람’ (the new nature)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갈등을 바라보고 또 해석합니다 (고후 5:17). 여기에서 갈등은 불가피하지만, 갈등해결의 원칙은 생명이요 수단은 사랑입니다.


요한의 편지는 이러한 원칙과 수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은 갈등을 두려워하지도 또 회피하지도 않았습니다. 가혹한 훈련을 통한 인간성 개조와 지식을 통한 구원을 믿었던 영지주의자에 대항해 요한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지 말라고 충고할 뿐만 아니라, 거침없이 영지주의자들을 ‘적그리스도’라고 몰아 세웁니다 (요일 4:1-6). 요한은 새로운 형태의 바리새인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점에서 다릅니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사랑이 그의 원칙이었습니다 (요한 20:31).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절대적 진리는 부정될 수 없다는 것이 요한이 붓을 든 동기였고, 사랑은 모든 갈등을 생명으로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요한이 분연히 일어난 이유였습니다. 요한의 이런 태도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갈등을 일으키신 이유가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셨고, 목숨을 내놓으시기까지 사랑하신 결과로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 사실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요한은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고 우리에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요일 4:12).


상호존중 (Mutual Respect)


랄프 네이버는 갈등을 네 가지 종류로 나눕니다: (1) 내적 갈등 (conflict inside), (2)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 (conflict with someone else), (3) 확신에서 오는 갈등 (conflict because of your convictions), 그리고 (4) 권위와 책임에서 오는 갈등 (conflict between authority and responsibility) 입니다. 여기에서는 네이버의 분류에 기초해서 상호존중의 훈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모든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은 내적 갈등, 즉 옛 속성과 새 속성 간의 갈등에서 시작됩니다. 내적 갈등의 해결은 평생을 요구하는 긴 여행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 또한 내적 갈등과 함께 생활 속에서 늘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네이버는 이 두 가지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인도 하심에 순종하는 자세, 그리고 예수를 본받아 끊임없이 용서하고 사랑하는 생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새로울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겸손과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에서부터 다음과 같은 실천 강령들이 나온다는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 (1) 갈등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적 갈등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아울러 더불어 사는 우리에게 서로 간의 차이에서 나오는 대립은 늘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갈등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할 때 다른 사람과 갈등관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좌절하거나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쉽게 실망하는 오류를 줄일 수 있지않을까 생각합니다. (2) 갈등의 발생이 아니라 갈등의 해결에 성경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 갈등이 우리에게 일어났을까 하고 성경을 동원해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보다, 갈등이 발생한 이후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관계를 회복할 방법을 고민하면서 성경적인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왜 더욱 사랑하지 못했을까”를 고민하기보다 “어떻게 상처를 사랑으로 감싸주고 치유할 수 있을까”에 대한 대답을 서로 기도하며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태 18장).


확신에서 오는 갈등이나 권위와 책임 사이에서 나오는 갈등은 교회나 단체에서 나타나는 갈등들입니다. 특별히 이러한 유형의 갈등들은 평신도 사역자들을 감당할 수 없는 시험에 빠뜨리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확신에 찬 사역자가 목회자와 빈번한 갈등을 피해 교회를 떠난 다던지, 동역자들 사이에서 의견의 차이로 반목하는 경우는 성경을 통해서나 우리의 생활을 통해서나 보게 됩니다. 랄프 네이버는 이러한 갈등의 예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주저하는 베드로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반박한 사도 바울 (갈 2:6-14), 롯이 아브람의 권위에 도전해서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나버리는 사건 (창세기 13), 그리고 (비록 다른 사람과의 갈등으로 분류되었지만) 바울이 바나바와 마가와의 동행을 놓고 서로 다툰 사건 (행 15:35-40, 디후 4:11)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다양한 사건들에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갈등해결의 원칙들이 있습니다. 갈등의 해결을 위해서는 (1) 갈등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말씀을 담고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2)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상대를 끝까지 사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바나바에 대한 믿음만은 결코 잃지않았다는 사실은 그가 죽기 전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전한 편지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디후 4:11). 아브람은 롯의 잘못을 침묵했지만, 아브라함은 롯의 죽게된 환경을 결코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창 18). 베드로도 자기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행 10:16).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1) 자기자신의 의견이 최선이 아닐 수 있다는 겸손한 자세 (Only God is the Master who decides what’s best), 그리고 (2) 하나님께서 갈등을 통해 하시는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자세 (Mutual respect through listening to people in conflict with you can bring His message to you) 였습니다. 이 같은 자세때문에 누구도 갈등이 발생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지만 갈등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또 그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원칙이 발견됩니다.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상호존중 하는 것입니다. 이 원칙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베드로전서 4:8).


마치며


최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세계는 신으로부터 선택 받았다고 믿는 사람이 비관적인 현실주의만으로 갈등을 바라볼 때 생길 수 있는 위험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적대적인 종교갈등의 위험만을 강조하는 입장을 고민 없이 수용할 때 우리는 사사기 19장에 나오는 레위인처럼 무책임한 행동으로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들었지만 의무를 다했다며 자위하는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표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비관적 현실주의 그리스도인의 현실직시
갈등해결의 목적 죽음의 공포로 부터의 해방 (Free from the Fear of Death) 생명에 대한 희망 (Hope for the Eternal Life through God)
갈등해결의 일반적 원칙 죽음의 공포에 비례하는 처벌의 제도화 (Institutionalization of the Fear of Death with the Fear of Punishment) 사랑과 상호존중 (Love and Mutual Respect)
갈등해결의 궁극적 수단 폭력과 강제 (Violence & Coercion) 용서 (Forgiveness in God)

그리스도인도 갈등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때때로 첨예한 갈등을 가져오는 의견들은 서로 납득이 가는 근거들을 가지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는 결코 갈등이 용납되지 않는다거나, 그리스도인의 갈등은 사랑을 깊이 있게 배우지 못한 경우에만 발생한다고 단정하는 것은 비현실적입니다. 기독교인이 비관적 현실주의를 무슨 진리인 것처럼 강조하는 것은 무분별하고 원칙 없는 태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폭력과 강제를 통한 갈등의 해결만을 강조해 왔다면, 아마도 우리는 복음을 듣지도 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하심으로 주신 ‘생명에 대한 희망’을 잃지않고 세상 속에 당당히 서 있을 때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