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탄의 소리


아가페의 정신으로


영적 성숙이란 무엇일까. 가끔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자체만 가지고는 영적 성숙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우리는 각자의 체질과 성격이 다르고, 또 하나님이 주신 저마다의 재능과 다양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저마다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간(time)과 방법(mode)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 성숙에 이르는 과정에는 어떤 단일한 기준이 있을 것이라는 걱정 때문에 스스로를 돌아보며 낙심을 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을 자신의 잣대로 쉽게 속단하는 실수를 범하는 우리 스스로를 보게 된다. (특히 나는 이런 실수를 범하는 내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 중 이러한 실수를 가장 많이 저지른 사람의 하나다. 그는 행동주의자요, 모든 일에 자신을 던지는 열정과 열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성경의 구석 구석에서 전하는 베드로의 성격과 행동은 그가 누구보다 자신의 열심을 통해 예수님께 사랑을 받고자 했던 제자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물론 예수님은 베드로의 거침없는 열정, 대담하리만큼 솔직한 허풍과 폭풍 같은 성미를 존중하고 사랑해 주셨다. 그러했던 베드로가 베드로후서에서 전하는 영적 성숙에 대한 내용은 참으로 많은 것을 우리에게 전해 준다. 각자의 개성과 성품,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행동을 통해 영적 성숙의 길로 한 걸음씩 걸어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베드로는 이미 예전의 베드로가 아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버린 제자가 되어 있다. 아니,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제자가 되어 있다.


첫째, 베드로는 영적 성숙은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은혜의 약속으로 시작한다고 고백한다.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베후 1:4). 원어로 살펴보면 하나님의 성품을 나누어 가지는 자가 됨으로 인하여, 우리가 구별되는 사람이라고 적고 있다. 따라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그는 소중한 하나님의 성품을 나누어 가지는 형제요 자매다. 다시 말하자면, 믿음이 영적 성장의 기초요, 교회의 내용이다.


둘째, 베드로는 믿는다는 신앙의 기초 위에 두 가지를 더해야 한다고 권유한다. 그 두 가지란 도덕적인 탁월성(moral excellence)과 지식(knowledge)이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베후 1:5). 우리는 “오직 믿음”(sola fide)이라는 단어를 알고 있다. 15세기, 16세기에 흑사병과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납득하기 힘든 체벌과 강요를 일삼던 부패한 로마교회에 저항하며 일어난 종교개혁의 주인공들이 죽음 앞에서 외쳤던 표현으로 우리에게 잘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오직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큼은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는 결단의 내용이지, 오로지 믿음(faith)만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 사회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잘못된 행위까지도 정당화 시켜준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믿음에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고개가 숙여지는 도덕적인 참됨과 사려 깊은 지식이 필요하다. 베드로는 이러한 두 가지가 함께 하는 믿음은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한다고 지적한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베후 1:2).


보통 우리는 지식을 하나의 장식처럼 생각할 때가 많다. 즉, 지식은 곧 자신을 내세우기 위한 도구이거나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별하여 지식 없는 사람을 차별하기 위한 수단으로 치부할 때가 많다. 그러나 지식이란 하나님이 주신 하나의 선물을 우리가 잘 관리할 때 나타나는 부지런함의 결과다. 원어로 보면 “에피그노시아”라는 말은 단순히 안다는 사실을 전달하기보다 “정밀하고 정확한 지식”을 말한다. 즉, 인식하고 확인하여 깊이 있게 마음속에 각인된 내용을 의미한다. 그리고, 덕이라는 말은 원어로는 “아레테,” 즉 모든 사람들이 칭찬할 만한 행동의 결과를 의미한다. 따라서, 믿음에 “덕”과 “지식”을 더한다는 말은 단순히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자신의 믿음이 돋보이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의 모습을 보고 기뻐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믿음 없는 세상을 향해 무례하지 않다. 그리고 공격적일 이유가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솔로몬의 충고는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잠언 11:10).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세상과 대립되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세상을 감싸는 덕목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the knowledge of God)을 내용으로 한다는 것이다.


세째, 베드로는 여기에 절제, 인내와 경건을 요구한다. 절제는 곧 우리의 욕망을 다스리는 기술이다. 이런 절제는 현대사회를 끝없는 경쟁이나 비극적인 다툼으로 보는 이른바 Agonistic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절제란 하나님이 주신 이성(reason)으로 다스릴 수 없어 보이는 자신의 순간적인 욕심들(eros)을 하나씩 억제한다는 이야기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약함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자랑스러울 수 있을까. 이러한 한탄 속에 하나님을 통해 용기를 얻고, 이 용기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세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용기는 절제와 인내를 함께 가져오고, 이러한 용기는 하나님 앞에 겸손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구태여 처세의 기술을 사용하지 않아도 믿음을 가진 사람은 경건할 수 밖에 없다. 이런 가운데 얻어지는 실제적인 결과는 “유세베이아,” 즉 하나님 앞에 무릎꿇는 경건함이다.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관대할 수 있는 마지막 끈이 나와 같은 인간을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한없이 부끄러운 우리 스스로라면, 경건은 이러한 믿음을 가진 모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자연스러운 덕목이다. 신앙의 선배들은 모두 이러한 내용이 오랜 시간동안 행동으로 나타난 자기수련의 결과들을 가진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1:7)고 권고하고 있다. 우애란 “필라델피아,” 즉 형제에 대한 믿음과 기다림이 가져다주는 선물이다. 자신의 것이 항상 옳다면, 우리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아 전하는 역사에 몇 안 되는 선견자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서로가 필요하고 또 그러하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귀 기울이면서 생각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가장 기독교적인 덕목인 사랑, 즉 “아가페”가 필요하다. 아가페가 보여주는 덕목의 가장 큰 내용은 자신의 행위의 보상이 사람으로부터 오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확신이다. 이러한 확신을 통해 보상이 없는 일에 조용히 자신의 방식으로 선을 행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행위는 경쟁적일 이유가 전혀 없다. (Agape requires virtue without return, save in the eyes of God. Arete is an agonistic virtue, in that those who possess it must outdo others in the eyes of the world.)


결국, 이 마지막 한 마디 속에 베드로의 참회가 들어있다. 예수님과 요한복음에서 서로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에서 베드로는 Agape라고 말하지 못했다: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필레오)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요한21:17). 이러한 참회의 내용이 곧 그의 영적 성숙을 의미한다. 소금과 빛인 예수의 제자들이 세상 속에서 영적 성숙을 보여줄 수 있는 내용은 바로 베드로의 마지막 고백 속에 들어있다. 참된 믿음은 때로는 강하게 저항하는 용기도 필요하고, 또 때로는 감싸주는 사랑도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세상과 우리의 대립으로 현재를 이해하고 있지만은 않는지, 우리의 영적 성숙을 향해 걸어가는 과정을 세상과 비극적이고 Agonistic한 대립의 연속으로만 이해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볼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곳곳의 부패와 납득하기 힘든 내용들이 매일 신문을 장식하고 있는 현재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하나가 살고 하나가 죽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사는 길을 전하는 기독교적 실천덕목들은 무엇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켰는지를 Agape의 내용으로, 그리고 훈훈한 공기로 전할 수 있는 용기가 더없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미 우리는 어떤 곳에서도 영도자, 지도자, 가르치는 교사라는 이름을 싫어하는 시대에 살고있다. 즉, 상대방이 계몽의 대상이 아니라 나눔의 대상일 수 밖에 없는 상호관계의 끈 속에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런 나눔은 상대방이 우리 스스로에게서 참된 기쁨과 여유를 맛 볼 때, 자발적으로 따라가고 싶다는 소망을 가질 때에 비로소 내가 가진 무엇인가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나눔을 필요로 하는 사회에 대한 인식이 없이 우리의 생각을 전할 때에는 결국 Agonistic한 관계에서 나오는 종교적 갈등과 상호 반목의 책임을 감수해야 한다.


17세기에 관용(tolerance)의 정신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먼저 제시한 덕목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말할 수 없을 때, 반목과 질시로부터 자유함을 얻기 위해 제시한 성서적인 사랑의 다른 표현이었다. 그리고 이 덕목은 자기부정(self-negation)과 상대에게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에 대한 존중(respect)을 내용으로 하는 Agape의 정신이었다. 이런 사랑의 정신은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는 지금의 현실에서 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상호관계에서 가져야 할 덕목일 것이다. 부패한 도시의 지도자들에게 반기를 들었던 칼빈도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육체가 나의 영혼을 통해 순화되고 훈련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오직 한 사람을 위해 바울을 따라다니며 적은 기록으로 우리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전했던 누가도 이런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아가페의 정신이 가장 필요한 때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베드로는 베드로후서에서 이런 용기를 일컬어 영적 성숙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생각한다.

곽준혁
고려대학교를 나왔고, 2002년 여름 University of Chicago에서 정치학(정치철학)으로 박사를 받았다. 현재 동대학에서 박사후과정에 있다. 아내가 University of Illinois에 박사과정에 있는 이유로, Urbana-Champaign에 있는 샴페인어바나 한인교회 출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