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탄의 소리

한 사람의 힘(Power of One) – 누가(Luke)를 그리워하며

들어가며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누가복음 1:3-4)

성경을 읽을 때마다 나의 생활을 돌아보게 하는 인물이 있다. 그 인물이 바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 (Luke)다. 그가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이유는 그의 꼼꼼한 문체나 직업이 의사라는 그만의 독특한 이력이 아니다. 진정 그를 위대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이유는 그가 해야할 바를 했고, 있어야 할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누가는 자신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목적을 오직 ‘한 사람’이 예수에 대해 확실히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데오빌로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친구(또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데오빌로를 로마의 기관장으로, 그의 신분을 밝힐 수 없었던 ‘한 사람’으로 이해했을 때 우리는 누가의 헌신이 바로 예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제자도의 본보기가 됨을 알게 된다. 오랫동안 예수의 행적을 기록하고, 예수의 제자들을 따라다니며 그들의 행실을 기록한 이유가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누가의 참된 성실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시 한번 우리를 놀라게 한다 –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디모데후서 4:10-11). 모두가 병든 바울을 떠나 자신의 문제로 돌아갔을 때, 바울의 옆에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묵묵히 동역자를 보살피는 누가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누가의 모습을 보시며 기뻐하시고 그를 사랑하셨으리라는 것을 아무도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곧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골로새서 3:12).

1. 새로운 일대일 패러다임: 문지기(Gatekeeper)

누가가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모습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그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만 드러내는 섬김을 했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사랑에 보답하고자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아니면 “내 사람”을 만들기 위해 양육이나 전도를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피양육자를 “끝까지 책임”진다는 의무감에서, 아니면 피양육자가 “예수님”보다 눈 앞에서 헌신하는 양육자를 더 따르게 되면서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의 빛을 가리는 섬김을 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누가는 이런 함정을 피해갈 수 있는 그에 대한 지혜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이번 여름 우리 교회에서 인도자 수련회 때, 새로운 학기에 실시될 일대일 양육에 대한 개괄적인 내용을 작성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하루 전에 통보를 받았기에 그동안 생각해왔던 것들을 간단하게 정리해서 보내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를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 프로그램은) 개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경 말씀에 기초해서 만들어가는 과정을 도와주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매일 성경말씀을 묵상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참된 기독교인으로 변화되기를 소망합니다. 둘째…” 그리고, 몇 주 후에 주일예배 광고에 이 글을 올릴 수 있는지 행정서기로 일하시는 집사님께서 물어오셨을 때도 그저 담담했다. 그런데 예배시간에 내가 쓴 이 글을 보면서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과연 나는 어느정도 이를 위해 조심하고 노력했던가….

교수들이 학부생을 위한 정치철학 입문이나 고전 텍스트들을 읽는 수업을 할 때 항상 하는 말이 있다 – “교수보다 저자들의 책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것. 교수를 저자들의 생각을 이해하는데 이용할 것. 교수로 인해 텍스트로부터 벗어나는 경우를 결코 허용하지말 것(You should not allow yourself to be diverted or distracted from the great books by the professors!!).” 한편, 이런 교육을 위해 강의자들에게 제시되는 공통된 충고는 “텍스트에서 벗어나지 말 것,” “질문을 많이 던지고 가능하면 답을 주지말 것,” 그리고 “주입(indoctrination)하지 말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학생들이 자신들의 스스로의 생각과 방법으로 저자의 사상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지식의 전달자라는 사실이 강조된다. 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피교육자가 저자의 사상을 이해하기보다 전달자의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따를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2년 전 우리 교회의 양육프로그램을 도우면서, 이러한 소위 영혼 교육(soul care)의 문제와 아울러 일대일 제자양육이 소수정예 전사를 만드는 과정으로 인식되거나, 혹은 어떤 ‘단일한 인간유형’을 재생산하려는 경향이 없는지 검토할 기회를 가졌다 – 단일한 인간유형이란 “예수님 안에서의 다양성”(diversity in Jesus)과 대립되는 교육방침을 의미한다. 제자훈련이 마치 80년대 독재 하에서 민주화 투쟁을 하듯 은밀하거나 전투적인 각오로 진행되는 경우, 아니면 젊은 학생들이 목회자가 되는 길만이 신앙의 척도인 것처럼 느끼도록 만들어 버리는 경우나, 이러한 행동들을 방치하는 모습에 개인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제자훈련과 교회의 양적 성장이 연결될 때, 그리고 이를 위해 하나님의 소유인 자녀들이 삶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을 잃어버리고 ‘헌신’이라는 이름 앞에서 개인주의나 집단화라는 양극단으로 치닫는 모습을 볼 때 더욱 굳어졌다.

일대일 제자훈련에서는 ‘양과 목자’라는 관계가 설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알고 있다. 인도자의 책임성을 강조하는 이러한 관계설정 자체는 나쁠 것이 없다 –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베드로전서 5:2-4). 그렇지만, 일대일 훈련에서 이런 설정이 어떤 관계를 만들어 나가느냐의 문제는 조금 다르게 접근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인도자는 ‘목자’요, 피인도자는 ‘양’이다. 즉 인도자에게는 한 사람의 영혼과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지나친 부담이, 피인도자에게는 인도자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이미 주어져 있다. 인도자는 자신의 열매를 보고자 피인도자의 영혼과 인생을 ‘관리’하는 지경에까지 이를 수 있는 위험성도 없지 않고, 피인도자는 인도자가 누구냐에 따라 신앙의 내용이 달라질 수도 있다.

이런 고민을 하던 중에 요한복음 10장 2-3절의 말씀이 눈에 들어왔다 –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gatekeeper)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이 설정에서는 불러 내시는 이도 예수님이시고, 인도하시는 분도 예수님이시다. 문지기는 원어로는 “뒤로로스,” 즉 파수꾼이나 문 앞에서 손님을 주인에게 알리는 종이다. 즉, 문지기는 주인이신 예수님을 위해 문을 지키고, 예수님을 찾아 오는 사람을 위해 문을 열고,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동일한 역할이라도 예수님과 피교육자의 관계가 강조되고, 인도자는 이러한 관계의 형성을 도와주는 ‘문지기’의 역할에 그치는 것을 원칙으로 할 수 있다. 이 때 문지기의 성실성은 양육에 헌신하는 모습뿐만 아니라 “문”이신 예수님과의 거리, 즉 매일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자신의 삶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요한 10:9). 함께 일하던 분들과 이런 생각을 나누고, 우리 교회에서는 ‘문지기’라는 새로운 일대일 관계설정을 했다.

누가는 이러한 ‘문지기’의 훌륭한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첫째, 누가는 ‘한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이나 견해를 전달하기보다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을 전달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둘째, 이러한 헌신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자신의 노력의 결실을 스스로의 손으로 거두려는 욕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원어로 보면,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글로 ‘한 사람’이 배운 바를 확신할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 즉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에 ‘한 사람의 영혼’을 맡기고 있다. 이와같은 누가의 태도는 데오빌로라는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는 문지기의 소임과 자세를 보여주기에 너무나 충분하다.

2. 겸손과 관용의 손길

다음으로 눈에 뛰는 것은 누가의 겸손한 태도다. 누가는 자신의 기록이 당시 많은 사람들의 헌신보다 크게 뛰어날 것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 – “우리 중에 …내력을 기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나도”(누가 1:1-3) 신학자들이 인정하듯 누가의 문체나 꼼꼼한 기술은 사도 요한의 논리와 자신감에 비추어 부족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자신의 기술만이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고 생각된다. 예수님의 복음이 허탄한 소문들로 퇴색되어 갈 시점에 분연히 붓을 든 요한이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요한 21:24) 하고 말했다면, 누가는 “한 사람”의 영혼이 분열과 다툼으로 얼룩지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의 기록은 많은 것 들 중 하나라는 말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진지한 배려와 아가페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는 철저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함을 강조하셨던 예수님의 가르침을 외면할 때가 종종 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분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태 7:5). 그러나 이와 같은 행동에서 우리는 쉽게 정욕과 탐심과 다툼으로 들끓는 우리의 지배욕(desire of domination)과 주목받고 싶은 욕망(love of recognition)을 관리하는 것에 실패할 때가 많다. 서양에서16세기 르네상스는 이러한 지배욕에 휩싸인 부패한 교회와 신학으로부터 정치와 인문학이 독립을 선언했고, 17세기는 이러한 욕망에서 끝이 보이지 않던 종교전쟁의 소용돌이를 절대왕정 국가라는 철퇴로 풀어가는 새로운 해법을 선택했다.

일반적으로 관용(tolerance)이라고 하면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인식된다. 그러나 관용은 상대주의적 회의(relativistic skepticism)나 영과 속을 구분하는 이원론이 아니다. 관용의 정신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임을 인정하는 기독교의 정신이 담겨져 있다(잠언 1:7). 이는 “하나님이 내 뒤에 계신다”(God behind me!)는 선지자적 전투자세에서 한 걸음 물러나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감찰하신다”(God over us!)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한 거리낌 없는 온전함을 가지고자 하는 용기이다. 이는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역대상 28:9)는 확고한 믿음 위에 서 있는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는 실천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아 보일 예루살렘의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도, 과부된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늙은 선지자도 이런 누가의 눈에는 참으로 소중한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이들의 경건한 눈에는 누구보다도 먼저 예수님이 보였다는 누가의 차분한 기록을 읽으며, “데오빌로 각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누가 2:25-40). 유명한 마리아의 찬송에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라고 표현된 누가의 긍휼과 공의의 하나님의 모습에서 데오빌로는 무엇을 느꼈을까. 아마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하신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라는 예수님의 사랑이 아니였을까(누가 11:34).

결국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전하고자 했던 것은 예수님의 모습이었다. 즉,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즐거울 수 있는 넉넉하고 부드러운 마음, 정죄하고 비난하고 싶은 마음을 다스리는 ‘진정한 섬김’의 사랑을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와같은 맥락에서 누가는 데오빌로가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잠언 6:7)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준비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소망했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지나친 비약은 아닐 것이다. 이런 누가의 손길은 참으로 따뜻했을 것이다.

마치며

며칠 전 대학부(Crossway) 담당목사님이 조장들 성경공부의 인도를 부탁하시면서 교재를 전해 주셨다. 누가복음이다. 과연 누가처럼 우리의 미래를 짊어질 하나님의 소중한 청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최선의 조건을 제공해 줄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앞섰다. 과연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몸과 마음과 영혼을 그분의 말씀으로 매일 매일 바꾸어 나가는 삶의 본을 보여줄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이들이 각자의 개성과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자신들의 소명(the Call)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좋은 문지기(Gatekeeper)가 되어야 할텐데 하는 걱정이 앞선 것이다.

이런 걱정들을 하다가 나는 이번에도 누가처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로 했다. 부패와 악이 성행하던 시대마다 소리높여 부르짖는 의인들이 많았다. 그러나 소돔성이 멸망한 이유가 횡행하던 부패와 악이 아니라, 의인 10인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오늘도 작은 일에 주목하는 열심을 가르쳐준다(창세기 18:34). 참으로 있어야 할 곳에 있었고, 해야할 바를 묵묵히 했었던, 그럼으로써 믿음의 선한 싸움을 누구보다 잘 소화해 낸 누가(Luke)가 그리워지는 시대다(디모데전서 6:12). 왜냐하면 루터의 말처럼 기독교의 진정한 능력은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은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에서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