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탄의 소리


어머니의 눈물


중학교 다닐 무렵 우리 가족이 살던 집 안뜰에는 여러 가지 화초와 꽃나무들이 많이 심겨져 있었다. 봄이 되면 개나리와 진달래는 물론이거니와 백목련과 적목련이 화사한 꽃망울을 터뜨렸다. 이어서 라일락과 백일홍 등이 여름철에 이르기까지 연이어 피어나 저들의 자태를 자랑하곤 하였다. 이외에도 많은 꽃들이 피어나곤 하였는데 그 중에서 특별히 뜰 가장자리 한 구석에서 피어나던 모란꽃을 잊을 수가 없다.


모란꽃은 장미꽃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장미꽃보다는 꽃송이가 조금 크다. 특별히 모란은 꽃은 아름답지만 향기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모란을 뜰에 심는 집이 많지 않다고 들었다. 우리 가족이 살았던 집의 주인이 왜 모란을 화단에 심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 모란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었다. 그 이유는 중학교 2학년 초여름 무렵에 어머니가 모란꽃 옆에 다소곳이 앉아 사진을 찍으셨기 때문이다. 내 기억으로는 어머니가 그 꽃을 특별히 좋아하셨던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자형에게 카메라를 잠시 빌릴 기회가 있었는데 돌려 드릴 때쯤 뜰 안에 모란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어서 기념으로 찍었던 것 같다. 대학을 다니기 위해 서울로 떠나올 때 그때 찍은 어머니의 사진을 확대한 후 코팅을 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늘 책상 앞에 붙여 놓고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마다 쳐다보곤 하였다.


그 사진 속의 어머니는 신기하게도 모란꽃을 많이 닮으셨다. 작은 체구에 둥근 얼굴을 가지신 어머니는 언제나 부드러운 미소를 지닌 분이셨다. 어머니는 한평생 힘겨운 삶의 무게를 거의 홀로 감당하시면서 살아오시느라 이렇다 할 여인으로서의 향기는 없으셨지만 모란꽃이 가졌던 기품만은 결코 잃지 않으셨다. 그때 사진 속의 어머니는 지금의 내 아내보다 5살쯤 많은 나이였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5살 이상은 더 들어 보였다. 이마와 눈가에 드리워진 주름이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회상하니 왜 이렇게 마음이 아파 오는 것인가? 어머니는 90년 초 갑상선 암으로 인해 큰 수술을 받으셨다. 다행히 수술 후 경과가 좋아 지금까지 큰 탈 없이 잘 지내고 계신다. 수술을 받기 위해 마취실로 들어가시기 전에 착용하고 있던 틀니를 빼야만 했는데 그 모습을 막내인 나에게조차 보이시기를 부끄러워하시며 입을 가리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어머니도 한 분의 여인이시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내가 주님을 영접한 후 어머니에게 가장 먼저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결실은 잘 맺혀지지 않았다. 한번은 어머니가 서울에 있는 나의 집으로 오셔서 한동안 머무르셨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어머니를 붙잡고 강제로라도 복음을 증거하려고 했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요약해서 거의 1시간 동안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설명하고, 천국과 지옥 그리고 구원에 관해 말씀을 드렸다. 내 자신은 꽤 조리 있게 말씀을 드렸다고 생각했는데 어머니께서는 “네가 한 말을 지금은 잘 이해하지는 못 하겠지만 네가 믿는 하나님이라면 나도 믿어야겠지”하고 말씀하셨다. 내가 철이 들고 나서도 여러 차례 어머니를 실망시켜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믿고 하나님까지도 영접하시겠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너무 송구스러웠다. 어머니는 고향으로 돌아가신 후 교회 권사이신 숙모님과 함께 아버지 몰래 교회에 나가시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이를 눈치 채신 아버지의 만류로 예수님을 향한 자신의 의지를 접고 말았다. 나는 그때 이후로 어머니가 지난 해 말(2001년) 이곳 미국 아이오와주 에임스로 오실 때까지 어머니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지만 좀처럼 상황의 반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년이면 고희의 나이가 되신다. 지난 해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서 어머니를 뵈었을 때 고령의 나이에 긴 비행시간에서 오는 피로 때문인지 어머니는 예전보다 더 늙어 보였다. 그때 어머니는 챙이 있는 모자를 깊이 눌러 쓰시고 등에는 낡은 배낭하나를 지신 채 출구로 걸어 나오셨다. 그러나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시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25년 전 내가 살았던 집 뜰에 피어있던 모란꽃을 떠올릴 수 있었다. 시카고에서 아이오와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머니는 연신 미국 땅이 크다고 말씀하셨다. 그러시다가 피곤하신 지 미시시피강을 지나 아이오와주로 들어올 무렵 잠이 드셨다가 차가 에임스에 거의 다다를 무렵에 잠이 깨셨다. 그리고는 아직 집에 도착하지 않았느냐고 물어 보신 후 집이 왜 이렇게 공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느냐고 의아해 하셨다. 내가 미국에서는 이 정도 거리가 별로 먼 거리가 아니라고 여러 번 말씀드려도 잘 이해하지 못하셨다. 에임스에 도착하신 후 한 달 정도 우리 가족과 함께 머무시는 동안 별로 잘 해 드린 것이 없었다. 학기 중이라서 늘 지친 모습을 보여 드린 것이 못내 죄송스럽다. 네브라스카주 오마하에 있는 동물원에 갔다 온 것과 귀국하시는 길에 시카고에서 미시간호를 훌쩍 구경시켜 드린 것 외에는 미국에 대해서 보여 드린 것이 없다. 내가 좋은 곳을 못 보여 드려 죄송하다고 말씀드릴 때마다 어머니는 에임스가 너무 조용하고 좋았다면서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셨다.


어머니는 에임스에 도착하신 후 처음 맞이하는 주일에 우리 가족과 함께 교회에 가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셔서 집에 남아 계시려고 하였다. 그러나 나와 아내가 간곡히 부탁하시자 마지 못해 함께 교회에 출석하셨는데 그 날 이후 미국을 떠나시기 전날까지 금요찬양모임과 주일예배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셨다. 아내는 어머니를 위해 교회 도서관에서 김진홍 목사님의 자전적 소설인 <황무지가 장미꽃 같이> 시리즈와 원종수 권사의 간증집, 서울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이 LA 사랑의 교회에서 인도하신 부흥회 비디오테이프 시리즈 등을 빌려 드렸다. 아내는 이번 기회에 어머니가 꼭 주님을 영접하실 수 있도록 기도하며, 이를 위해 온갖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다. 어머니는 김진홍 목사님의 책을 통해 당신 자신의 지난 시절을 회상하시면서 재미있어 하셨다. 그리고 원종수 권사의 책을 읽으시면서 많은 눈물을 흘리셨다. 내가 어머니에게 왜 눈물을 흘리시느냐고 물어 보니까 “이 사람이 어려운 가정에서 고생하며 공부하던 모습이 네가 자라면서 공부하던 모습과 너무 똑 같아 너에게 너무 미안하구나” 하시면서 계속 눈물을 흘리시기에 내가 당황하여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래서 “어머니, 저 때문에 미안해하지 마세요. 저는 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이렇게 미국까지 와서 박사 공부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다 잘 되었는데요” 하고 위로해 드렸지만 어머니의 눈물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김삼환 목사님의 비디오 테이프를 보시고 많은 도움을 받으셨다. 하루에 한 개씩 아껴 보시면서 재미있다고 좋아하셨다. 목사님의 구수하면서 시원시원한 설교가 예수님을 잘 모르는 분에게도 꽤 재미있었는가 보다. 어머니는 아내의 이와 같은 노력에 힘 입어서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셨다.


어머니는 특별히 금요찬양시간을 좋아하셨다. 비록 가사의 내용과 곡은 잘 몰랐지만 찬양이 주는 은혜가 어머니의 마음에 와 닿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예배시간보다는 찬양시간을 더 좋아하셨다. 나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어머니와 함께 금요찬양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에 대해 감사드리고 싶다. 철이 들고나서 지금까지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늘 가시로 찌르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꼈어야 했었다. 어머니의 연배에 한국 땅에서 많은 고생을 겪으면서 살아오신 어머니들이 어디 한 두 분이겠는가? 그러나 그 분이 나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에 안타까움은 특별한 것이다. 어머니와 함께 드린 금요찬양시간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귀한 선물이었다. 불혹의 나이에 고희를 앞둔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하나님께 아름다운 찬송을 드릴 수 있는 귀한 은혜를 받았으니 나의 기쁨은 참으로 표현할 길이 없다. 나는 남은 생애 동안 그 추억을 잊지 못할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가슴 아픈 많은 기억들 속에서 어머니와 함께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 그 시간은 모란꽃처럼 선명히 내 마음에 남아 언제나 하나님과 어머니의 크신 사랑을 생각나게 할 것이다.


어머니가 한국으로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주일 예배시간에 어머니에게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 목사님의 말씀이 끝나고 헌금을 드리기 전 성도들과 함께 찬양을 드리고 있는 중에 갑자기 어머니가 고개를 의자 밑으로 떨구시면서 울먹이기 시작하셨다. 나는 그 순간 매우 당황하여 어머니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어머니, 왜 그러십니까?” 하고 물어 보았으나 어머니는 대답을 하시지 못 하고 예배가 끝날 때까지 계속 소리를 죽여 가면서 울먹이고 계셨다. 나는 그때 어머니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신 것을 깨달았지만 무엇 때문에 은혜를 받았는지 알지 못 했다. 예배가 끝나서 모든 성도들이 친교실로 나갈 때 어머니에게 “이제 일어나 가시죠” 라고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어머니는 “나중에 갈 테니 먼저 가 있어라”고 말씀하시고 계속 그 자리에 앉아서 울고 계셨다. 후일에 어머니를 한국으로 배웅하고 돌아와서 아내에게 어머니가 그때 왜 우셨는지 물어 보았다. 어머니는 나보다 아내와 속 깊은 이야기를 더 잘 나누곤 하셨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어머니는 예배시간에 갑자기 예수님을 모르고 살아온 70 평생이 너무나 아쉬워 하염 없이 눈물만 흘리셨다고 한다. 짧은 한 달 간이지만 우리 가족과 함께 주의 몸된 교회를 오고가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 그리고 그분을 믿는 것이 얼마나 기뻐고 감사한 일인지 깨닫게 되신 것이다. 예수님을 진작 알았더라면 어머니가 지고 오셨던 인생의 무게가 지금보다 훨씬 가볍고, 이 세상이 주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쁨과 감사의 생활을 하셨을 텐데 70의 고개를 지나고 나서야 그 진리를 깨달으셨던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원통한 것이었을까? 진작 주님을 알았더라면………


어머니와 에임스에서 마지막으로 함께 보내는 날 저녁에 어머니가 계신 방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오늘밤은 어머니와 함께 자고 싶다고 말씀 드렸더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 부모가 비록 나이가 들고 자식이 장성했을지라도 부모 마음에는 자식이 언제나 어린애와 같아서 함께 자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일텐데 어머니는 의연한 모습을 나에게 보이고 싶어 하셨다. 대신 어머니는 “떠나기 전에 너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네가 나를 위해서 이 시간에 기도를 해 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다. 어머니의 말씀에 “자식인 제가 어떻게 어머니를 앞에 두고 어머니를 위해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씀드렸다. 그때 나는 머릿 속으로 야곱이 그의 아들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과 다른 많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그 후손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생각하고 있어서 자식이 부모를 앞에 두고 안수 기도하는 것이 예의상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대신 어머니에게 가정예배를 드리자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나서 온 가족을 어머니가 계신 방으로 불러 함께 가정예배를 드렸다. 찬송가를 부르고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읽은 후 막내 윤재부터 윤진이, 아내를 거쳐 마지막으로 내가 어머니와 어머니의 믿음을 위해 기도 드렸다. 어머니께서 이곳에서 받은 은혜를 귀국하신 후에도 변치 마시고 잘 간직하시라고 온 가족이 함께 기도 드렸다


어머니가 한국으로 돌아가신 후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거의 석 달이 지났다. 한국에 전화를 드릴 때마다 어머니의 신앙생활이 궁금하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다. 이곳에서의 나의 학업도 끝나고 우리 가족은 얼마 지나지 않으면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그때가 되면 어머니의 신앙생활을 자세히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시간 어머니를 위하여 또 주님을 믿지 않고 있는 모든 젊은이를 위해 이렇게 기도 드린다. “하나님, 저의 어머니가 이곳 에임스에서 하나님 앞에 흘린 회한의 눈물이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그리고 아직 예수님을 개인적인 주님으로 영접하지 못 한 젊은이들이 이제라도 주님을 영접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 갈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그들은 저의 어머니와 같이 인생의 황혼에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일이 없도록 도와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에필로그


나는 앞으로 언젠가 다시 뜰이 있는 집에 살고 싶다. 그리고 그 뜰에 어릴 때 내가 보았던 여러 화초들과 꽃나무를 심을 것이다. 계절마다 제각기 다른 꽃들이 아름다운 향기와 자태를 뽐내면 그들 가운데 서서 온 몸으로 저들을 느낄 것이다. 그 중에 특별히 몇 그루 모란을 뜰 가장자리에 따로 심어 정성 드려 가꿀 것이다. 그리고 모란꽃이 탐스럽게 필 때면 나의 어머니를 생각할 것이다. 나는 특별히 미국 에임스 반석장로교회에서 어머니의 주름진 손을 잡고 주님께 찬송을 드리던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그와 함께 그날 저녁 함께 있었던 사랑하는 여러 교우들의 모습을 떠올리려고 애쓸 것이다. 비록 나이로 인해 기억이 쇠퇴해져 그들 중 겨우 몇 명의 이름을 떠올릴 수 밖에 없겠지만….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