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선물로 만난 두 아들이 문득 하나님이 나를 연단하시기 위한 도구같이 느껴질 때 나는 다시금 처음 첫 아들 대인이를 만나게 된 시간들을 되돌아 보곤 한다. 온몸이 온전한 아기의 첫울음을 듣게 되던 그 날이 오기까지 얼마나 눈물로 기도하며 매달렸었는지, 믿음의 첫발을 내딛는 나의 간절한 기도를 귀히 보신 주님의 선한 손길에 감사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만나게 된 첫 아이 대인이는 자라가면서 늘 그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서 엄마인 나를 당황하게 했다. 동생 솔인이가 태어나고도 시샘 한번 하지 않는 너그러운 아이, 늘 엄마, 아빠의 훈계를 달게 받는 순종적이고 온유한 아이, 잘 울지 않고 떼를 부리지도 않던 그 아이의 어른스러움이 실상 단순한 조숙함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깨닫기 시작한 것은 대인이가 학교를 다니면서부터였다. 학교생활 속에서의 어려움이 단지 언어소통의 문제 때문이리라 일축하며 의도적인 느긋함을 스스로에게 강요하던 세월이 한해 두해 쌓여가던 중 문득 대인이가 왜 학교에서 다른 친구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다른 아이에게 안 좋은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믿을만 했지만, 어째서 친구들을 가까이 사귀지 못하는지, 그리고 학교에서 배우는 이런저런 내용을 어려워하기보다는 왜 그렇게 일상적인 생활의 틀을 익히는 데에 어려워 하는지 곰곰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들-예를 들면 방에 있는 어떤 물건을 가져오라든가, 지금 서 있는 곳의 오른쪽에 있는 의자에 앉으라든가 등등…-을 제대로 못할 때 반복에서 이야기를 해도 반응이 느린데다 영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마는 아이를 보면 나는 늘 인내심의 한계에 부딛히곤 했다. 작은 잘못을 바로잡아주려는 좋은 의도는 온데간데 없고 늘 필요이상의 야단을 맞고 주눅이 들어 있는 아이를 마주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아이가 평범하리라는 기대(착각) 속에서 늘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 엄마의 무지함에 있었는데도 늘 피해는 아이에게로 돌아가곤 했다. 자기 반 안에서 일어나는 다른 일들에 그리 관심이 없고, 자신이 뭘 챙겨야하고, 언제까지 무엇을 해야하는지 전혀 긴장하지 않고 지내는 대인이를 보며 이 아이를 위한 새로운 대안들을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책은 수십번 마르고 닳도록 보는 아이, 좋아하는 것은 읽는 순간 다 외워지는 아이, 누군가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에 따라가는 것을 즐기지도, 잘하지도 못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어 시작한 일은 너무도 집중해서 오래 할 수 있는 아이, 자기가 만든 만화책을 읽으며 좋아라 키득거리고 함께 보기를 원하는 아이, 하지만 곁에 있는 사람의 마음이나 감정을 전혀 읽지 못하는 아이, 그래서 종종 오해를 사기도 하고 야단 맞지 않을 상황에 스스로 매를 버는 아이… 남편과 종종 대인이를 놓고 이야기하면 할수록 대인이는 너무도 사고가 자유롭고 틀에 얽매이는 걸 싫어하는 창의적인 아이이며, 주변 상황에 대해 무관심하다 할 만큼 자기세계에 쉽게 빠져드는 아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너무도 긴 시간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대인이를 대하는 태도와 방향이 달라져야 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런 대인이의 독특함을 제대로 바라보게 되기까지 둘째 솔인이의 몫이 아주 컸다. 갓 태어나서 솔인이는 참 많이 울었다. 그때 대인이는 이렇게 울지 않았는데 솔인이는 왜 그러냐며 남편에게 푸념을 하는 순간, 솔인이가 보통의 아기이고, 대인이가 독특한 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말을 익혀가는 속도도 오히려 솔인이가 빠르고 발음도 정확했다. 옹알이와 자기식의 표현이 많았던 대인이와는 달리 솔인이는 일부러 연습을 시키며 가르친 적이 거의 없었는데도 스스로 말을 익혀갔다. 솔인이가 프리스쿨을 가기 시작하면서부터 두 아이의 상반된 모습은 물과 불처럼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금도 솔인이는 학교생활에 대해 모르는 게 거의 없다. 학교 친구들간에 일어난 일이며, 누가 어디가 아파서 학교에 못 오고, 누구의 아빠가 하는 일은 뭐고… 시시각각 일어나는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아이에게 흡수되는 것이다. 심지어 차 안에서 남편과 나누는 대화 속에도 순식간에 끼어들어 참견을 하고, 자신의 의견을 늘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형이 야단을 맞으면 스스로 조심하며 눈치있게 굴고, 자신의 잘못한 정도보다 늘 덜 야단 맞는 길을 잘도 찾아내곤 한다. 온 몸의 감각이 밖을 향해서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깨어있는 듯 솔인이는 잠을 자다가도 너무도 분명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말을 하곤 한다.


하지만 혼자서는 절대로 즐겁게 놀 수 없는 아이가 솔인이이다. 텔레비전을 봐도 혼자서는 재미가 없어 금방 꺼버리고 마는 이 아이는 너무도 사교적이고 주어진 과제는 틀에 맞게 잘 해내지만, 방향이 제시되지 않은 일은 금새 울상이 되어 엄마나 아빠의 도움을 요청하곤 한다. 그렇게 뭔가 창의성을 요구하는 일에 대해 막막해하는 걸 보면 나 자신을 보는 기분이 든다. 반면에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일에 두려움이 없는 대인이는 아빠를 많이 닮은 아이이다. 주변에 대한 관심의 양극단을 보이는 것도 우리 부부를 각각 닮았기 때문이다. 생김새나 식성부터 성격, 성향, 재능까지 모두 놀라울 만큼 대인이는 아빠를, 솔인이는 엄마를 닮았다. 하나님은 자녀가 물려받는 수많은 부모의 특성을 통해 서로를 더 잘 이해하며 사랑도록 만드신 걸까.


초보 엄마 시절, 아이를 잘 키우겠다는 의욕으로 어설프게 엄하기만 했던 나는 아이들이 주님의 아들로 잘 자라게 해달라고, 주님의 지혜를 구한다고 기도는 했지만 정작 늘 판단의 중심에는 내가 있곤 했다. 아이가 엄마를 우습게 아는 듯한 태도나, 똑바른 대답을 하지 않을 때면 쉽게 분을 드러내게 되었고, 겉으로는 나름대로의 기준을 아이를 위해 정한 듯했지만 때때로 나의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영 다른 반응을 보인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두 아이를 재우고 하나님께 눈물로 회개의 기도를 한 적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 어리고 귀여운 아이들을 참 많이 야단치며 키웠었다. 그 시절 내 머릿속에는 “바르게 키워야 한다”는 것이 강하게 박혀있었기에 나 스스로 얼마나 잘못 흘러가고 있는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님께 구하는 회개의 간구는 한참 후에서야 나 자신을 바꾸게 해 주었다.


아직도 가끔씩 그런 나쁜 옛 습관이 나오기도 하지만, 이제는 예전처럼 이성을 잃지는 않는다. 눈물을 흘리며 회개해야 할 정도로 마음 아픈 실수는 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각각에 맞는 도움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는 눈을 조금씩 갖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너무도 다른 두 아이를 같은 방법으로 키워왔던 옛 모습도 버려가고, 원인 모르게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 대인이를 대할 때에도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었다. 여전히 그 아이의 깊은 세계를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다르다는 것을 늘 기억하며 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키워야 한다”는 것이 내 마음과 생각을 채우게 된 것이다. 아이들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할 때 아이들은 바르게 자란다는 걸 뒤늦게사 깨닫게 된 것이다.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사랑으로 아이들을 돌보는 길만이 우리에게 맡겨진 귀한 영혼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바르게 키우는 길이라는 걸 알기에 이제는 내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늘 느끼기를 구한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다른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아이들이 내게 있음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며 내게 속한 물건처럼 다루지는 않도록, 말로 하는 사랑이 아니라 느껴지는 사랑을 나 스스로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날마다 다짐한다.